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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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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해에 나는 너희를 회개로 초대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을 너희 삶의 중심으로 모셔라. 그러면 그 열매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거의 기쁨이 나타날 것이며, 너희 삶의 거룩함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해에 나는 너희를 회개로 초대하고 있다.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시기’라는 일반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하시지만,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표현인 ‘이 은총의 해’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성모님께서 ‘해’를 특정하셨을까요? 이는 교회가 2025년을 희년으로 지정한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24년 5월 9일에 발표하시기를, 2024년 12월 29일 성가정 축일부터 2025년 12월 28일 성가정 축일까지 1년 동안 전 세계 가톨릭 교회가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희년을 지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를 염두에 두시고, 희년이 시작된 2025년 1월 25일 메시지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해에 나는 너희를 회개로 초대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희년의 개념은 구약 성경 레위기 25장에서 시작됩니다. 시나이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빚을 탕감받고, 노예를 해방하며, 잃었던 땅과 재산을 되찾는 등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시기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전통을 영적인 차원에서 계승하며, 신앙의 쇄신과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특별한 시기로 희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첫 희년은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후 보통 25년마다 정기적인 희년과 특별 희년이 교황에 의해 선포되고 있습니다. 희년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하고,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며,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시기입니다. 신자들은 이 기간 동안 성지 순례, 고해성사, 미사 참례, 자선 활동 등을 통해 전대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25년 희년은 25년마다 선포되는 정기적인 희년입니다. 이번 희년은 우리 신앙을 쇄신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이를 위해 우리는 영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노력의 시작은 바로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회개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화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처음 하신 말씀도 바로 회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회개 없이는 복음을 진정으로 믿을 수도,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나아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체험 역시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예언자로 메주고리예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성모님께서는 회개가 가장 필요한 덕목임을 아시기에 1996년 2월 25일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회개로 초대한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너희에게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2025년 희년의 첫 번째 달인 1월 25일, 성모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해에 나는 너희를 회개로 초대하고 있다.” 1996년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회개를 강조하셨던 성모님께서, 약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회개의 여정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 흐르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인 회개의 길이 열립니다. 이 과정은 고해성사를 통해 이루어지며, 고해성사는 참된 회개의 외적인 표징이자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 없는 참된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이번 희년이 우리에게 은총의 해가 되도록, 성모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무엇보다 먼저 고해성사를 받읍시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탄과 악으로 인해 잃었던 우리의 삶, 마음, 영혼을 되찾아 주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또한,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희년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 성모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우리의 회개 여정을 시작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을 너희 삶의 중심으로 모셔라. 그러면 그 열매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거의 기쁨이 나타날 것이며, 너희 삶의 거룩함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하느님께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회개로 초대하시는 것은 우리를 향한 성모님의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늘 사랑이 담긴 음성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두번이나 우리를 그렇게 부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회개한 사람에게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회개 이전에는 자신의 욕망이나 죄가 삶의 중심에 자리했지만, 회개 이후에는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거나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중심에 두듯이,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의 삶, 마음, 영혼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우리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마음, 영혼은 물론 육신의 상태까지도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실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빛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려 노력하게 되고,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우리 이웃에게 흘러갑니다. 마치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전해지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통해 이웃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사랑은 이러한 ‘내리사랑’의 형태를 띱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우리가 그분을 닮아 거룩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9,2). 거룩하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사람은 누구보다 거룩한 삶으로 초대받습니다. 사제, 수도자, 신자 모두가 거룩함으로 불리움을 받으며, 거룩한 삶은 단순히 종교적 열정이나 신심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참된 신앙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은 바로 이러한 삶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그 사랑을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삶. 나아가 거룩함, 정의, 자비를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를 향해 간절히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2024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모든 마음 안에 자리 잡고, 모든 악과 불화를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 승인 하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많이 기도할 것을 힘주어 말씀하실 때마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하는 식으로 세 번을 반복하십니다. 세 번 아니라 네 번, 다섯 번, 아니 그 이상 더 훨씬 많이 반복해도 좋으실텐데 왜 굳이 세 번만 반복하실까요? 
    세 번, 즉 3이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서 챗지핏 인공 지능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래와 같은 답변을 주었습니다. 이 가운데 약간의 용어 수정을 하고 답변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숫자 3은 많은 문화와 종교에서 특별한 의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래는 주요 의미와 상징성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그리스도교에서의 의미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한 하느님 안에 계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 가지 신앙의 덕목: 믿음, 소망, 사랑. (1코린 13, 3)
기도 시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마태 26, 44)
완전함과 충만함: 성경에서 숫자 3은 완전함,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예언자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3일을 보낸 것. (요나 1, 17)

2. 철학과 자연에서의 의미
세 가지 구조: 시작(기원), 중간(과정), 끝(결과)이라는 삼단 구조는 시간,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입니다.
균형과 조화: 세 개의 점은 삼각형을 형성하며 안정성과 균형을 나타냅니다.
생명 주기: 탄생, 삶, 죽음이라는 생명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3. 다른 종교와 전통에서
힌두교: 창조(브라마), 유지(비슈누), 파괴(시바)의 삼위일체를 상징합니다.
불교: 불교의 '삼보(三寶)'는 부처(佛), 법(法), 승(僧)을 의미합니다.
동양 철학: 천(하늘), 지(땅), 인(사람)의 삼재(三才)를 나타냅니다.

4. 일상적인 상징
완전한 집합: "좋은 일은 세 번 일어난다"는 속담처럼 3은 사람들에게 완전함과 만족감을 주는 숫자입니다.
의사소통의 기본 구조: 연설에서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세 단락 구조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숫자 3은 성경적, 철학적, 그리고 일상적 측면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조화와 완전함을 상징하는 특별한 숫자입니다.

    이렇게 3이라는 숫자는 조화와 완전함을 상징하는 특별한 숫자이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성모님께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기도의 지향이 이루어질 때까지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그 지향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으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뭔가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할 때 우리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기도할 만큼 기도에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을 기울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번 달 우리의 기도의 지향은 성모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가 모든 마음 안에 자리 잡고, 모든 악과 불화를 이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정, 교회, 그리고 온 세상에 평화가 굳건히 자리 잡고, 모든 악과 불화를 몰아내게 만드는 도구는 오직 기도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면 평화가 오고 모든 악이 물러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충실한 종이 되고,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자랑스러운 사도가 될 것입니다. 

   
 
 
2024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이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에나는 대림절이 가정 기도가 되게 하라고 너희를 기도로 부르고 싶다특히 내가 다정하게 품에 안는 어린 자녀들아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너희를 격려한다평화가 불화와 증오를 이기도록 기도하여라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교회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이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에나는 대림절이 가정 기도가 되게 하라고 너희를 기도로 부르고 싶다.

 

   어제는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었습니다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오늘성모님께서는 이 시기를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왜일까요이는 교회 전례력상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절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기다림의 시기입니다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온 누리의 임금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그렇기에 이 기다림의 시기는 은총으로 충만합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은총이 가득하신어머니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은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주시기를 고대하며온 마음을 다해 그분의 오심을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만약 '은총이 가득하신어머니 마리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잉태하라는 천사의 전갈에 ''라고 응답하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또한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시며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 몸은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나이다."라고 하시며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시기로 결심하지 않으셨다면오늘날 우리에게 '은총'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고우리를 향한 그분들의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육화의 신비가 이루어졌습니다그 결과인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이 세상에 모시는 크나큰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 14. 16. 17b)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일은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그러나 단순히 멍하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그분만을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우리에게 은총 위에 은총을 주시는 그분이 오시는데어찌 우리가 적당히 그분을 기다리고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을 태중에 잉태하셨던 성모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 아드님의 얼굴을 뵙기를 갈망하셨습니다마침내 신비롭게 태어나 당신 품에 안기신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들여다보시며 성모님께서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언제나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를 갈망해야 합니다성탄절에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또 특별히 영성체 때 우리 손에 성체 예수님을 모시며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한없이 기뻐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한 번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지만그분은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 가운데 다시 태어나십니다따라서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는 단지 대림절에 국한되지 않으며우리의 일생 동안 계속됩니다우리에게 은총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그분께 감사를 드리며우리의 발걸음이 언제나 그분을 향해야 합니다.

   다음 시편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제 영혼이 하느님을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 2-3)

   첫 번째 대림절이 공표된 것은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난 직후였습니다. (창세 3,15 참조따라서 첫 대림절을 지낸 사람들은 바로 아담과 하와였으며첫 대림절에 구세주를 기다린 이들 역시 그들이었습니다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직접 맺어주신 첫 부부였고곧 첫 가정이었습니다이처럼 대림절은 처음부터 가정의 축일이었고가정의 구원을 위해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대림절을 가정의 기도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를 기도로 초대하십니다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죄가 최초의 가정에 들어왔고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과 성 요셉이 이루신 가정 안에 은총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시어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그러므로 대림절은 마땅히 가정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은 어떤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우리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따라서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그분이 우리 가정 안에 태어나시고 우리 가정 안에서 영원히 사시도록 초대해야 합니다이를 실현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뿐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대림절을 시작하며우리 가정의 기도는 다시 시작되고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특별히 이번 대림절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예수님과 성모님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우리 가정에 함께하십니다성가정께서 우리 가정 안에 머무시며우리 가정을 성가정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이는 우리 가족이 함께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기로 한마음으로 결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림절을 통해 우리 가정을 기도의 성가정으로 만듭시다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우리 가정에 충만히 넘치도록 합시다그리고 우리 가정 안에서 넘치는 그 사랑과 평화가 이웃 가정으로 흘러들어가그들도 성가정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 가정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합시다.

   기도로 시작하는 대림절이 우리 가정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고더 많은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내가 다정하게 품에 안는 어린 자녀들아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너희를 격려한다평화가 불화와 증오를 이기도록 기도하여라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특히 내가 다정하게 품에 안는 어린 자녀들아,"라는 성모님의 표현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랑을 한껏 드러냅니다성모님은 단순히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것이 아니라사랑이 가득 담긴 다정다감함으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성모님의 품 안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우리의 부족함이나 약점에도 불구하고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는 분입니다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우리 자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그리고 그 품 안에서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고어머니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십시오어머니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인도하시도록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품에는 한없는 평화가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불화와 증오가 넘쳐납니다성모 마리아를 통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체험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그리고 평화가 불화와 증오를 이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평화는 단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세상의 모든 사람들 역시 성모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며우리와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사랑을 본받아우리가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살아갈 때이 세상이 성모님 품 안의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2024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 너희가 그들과의 일치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와 기도를 청하여라. 성인들이 너희의 모범이 되고 전구자가 되어, 너희가 그들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 너희가 그들과의 일치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와 기도를 청하여라.

    교회는 매년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그런데 이번 10월 25일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날을 특정하지 않고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성모님께서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을 7일 동안 갖고, 그 이후에도 여유를 두어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단 하루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특별한 날을 앞뒤로 넉넉한 시간을 두고 깊이 경축함으로써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지속적이고 깊이 있게 새기고, 이를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많은 성인들이 있습니다. 일부는 시성 절차를 통해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또 일부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다가 천국에 든 비공식적인 성인들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있는지 정확한 숫자는 집계되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은 그 말 그대로 ‘거룩한 사람’을 뜻합니다. 성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서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성인이 되어 천국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상에서 누구보다도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 44)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생전에 스스로를 거룩하게 가꾸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사람들, 즉 성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속한 삶을 살고자 했으며,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살되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성인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으며, 늘 하느님과 그분이 계신 천국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흠 없이 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죄의 기회를 피하려 했고, 혹여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죄를 지었다면 즉시 고해성사를 통해 회개했습니다.
    성인들은 육적인 욕망이 아닌 영적인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영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매일 미사와 성체조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성경 읽기, 잦은 고해성사, 묵상과 관상, 그리고 짧고 강렬한 화살 기도 등을 통해 가능한 모든 시간을 영적 훈련에 쏟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이와 같은 노력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성인들은 지금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 이 지상에 살면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거기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 속에서 하루 종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을 믿습니다. 이는 하느님 안에서 지상에서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연옥에서 정화의 시기를 겪고 있는 영혼들, 그리고 이미 승리하여 천국에 있는 성인들이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통교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우리와 일치해 있으며, 천국에 있는 성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준비해 두신 최고의 지원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 너희가 그들과의 일치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와 기도를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진정한 평화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전구가 힘을 모을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분들의 전구와 기도의 힘을 신뢰하고 청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무엇을 망설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성인들이 너희의 모범이 되고 전구자가 되어, 너희가 그들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인들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곧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기도, 단식, 자선, 희생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참하느님이시자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전부였으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언제나 천국을 그리워하며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아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의 성화를 보면 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거나 성화 한쪽에 해골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천국의 영원한 삶만을 갈망했던 성인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거룩함의 모범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모범적인 삶을 따르게 된다면 성인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함의 길을 보여주고, 성인으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의 전구자입니다. 그분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들의 주된 임무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들처럼 오직 주님만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주님 보시기에 순수하고 영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분들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전구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모든 성인들은 우리의 모범이자 훌륭한 전구자가 되어 줍니다. 그들의 모범을 따르고 그들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성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2024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은, 너희를 사랑하시고 기도와 회개로 격려하시기 위함이다. 어린 자녀들아,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 너희의 평화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은, 너희를 사랑하시고 기도와 회개로 격려하시기 위함이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 발현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메신저이자 예언자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메주고리예에 보내시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발현하게 하셨기에, 하느님 없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 자신, 가정,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도와 회개로 격려하고자 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깨닫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도 단 한 가지입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은 그 단어, ‘기도’입니다.
지난 43년 동안 성모님께서는 한 번도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오랫동안 기도를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만 빼고 우리가 원하는 다른 모든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해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회개가 이루어지며,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시기를 알지 못하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그 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과 그 메시지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알아보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라고 고백했던 우도처럼,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절박함을 가지고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에 응답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 너희의 평화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성모님께서 그 방법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이 말씀은 기도가 참된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이 평화 자체이시고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에, 그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는 길은 우리가 하느님께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평화를 주시도록 청할 수 있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힘이나 능력으로는 그 평화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는 절대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인류는 잊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평화이시며,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024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너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어머니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공동 기도 지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다른 수많은 기도 지향이 있을 수 있으나 성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며, 6월 25일 메시지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서 평화를 앗아가려고 하는 사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몸소 우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든든한 말씀입니까? 우리의 미약한 기도에 성모님의 강력한 기도가 더해진다면, 그 기도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기도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 지향들에 앞서 항상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가장 중요한 지향으로 두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 지향의 우선순위를 조정함으로써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평화와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너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희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존재하시고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절망과 비탄에서 구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받아들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볼 때 그 어떠한 해결책이나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희망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큰 어려움이나 절망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도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합니다. 여기서 오상의 비오 성인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며 희망하십시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세상 만물, 아니 우주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 37)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깊은 신뢰, 즉 믿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드리고 그분을 굳게 믿는다면,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1, 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를 살게 해 주고(요한 11, 25 참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요한 6, 47 참조)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어머니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탄은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관계를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이 세상의 평화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이 세상이 평화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평화의 모후로서 이 세상에 오신 성모님께서는 발현 셋째 날, 즉 1981년 6월 26일 메주고리예에서의 첫 번째 발현지인 포드브르도(발현산)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신 후, 산을 내려가던 마리야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평화, 평화, 오직 평화만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야는 성모님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았는데, 성모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고 두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43년 이상이 지난 2024년 8월 25일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께서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평화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 평화가 없다면, 우리 주변에 평화를 가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평화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평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할 수 있도록 성모님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어머니 마리아의 축복을 늘 청합시다.


   
 
 
2024년 7월 25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기쁘게 너희를 선택하고 너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어린 자녀들인 너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기도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것이고 내가 너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의도가 바로 이 의도이기 때문에 너희와 너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기쁘게 너희를 선택하고 너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어린 자녀들인 너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기도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거의 모든 메시지를 주실 때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는 말로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그 앞에 “나의” 라는 소유격을 붙이셨습니다. 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이번 달 메시지가 주어지기 3일 전인 7월 22일에 축일을 지냈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주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갔던 그녀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울고 있을 때 왜 울고 있느냐고 묻는 두 천사의 질문에 그녀가 한 답변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 13) 
그녀는 그냥 “누가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하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저의” 라는 소유격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저의 주님”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그 말을 통해서 자신이 그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사랑과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은 가까이하기에 멀리 계신 그런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온 마음을 차지하시고, 자신과 하나가 되어 계시는 그런 인격적인 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한 분이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우리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하시는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표현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기쁘게 희생하며 일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은 우리를 기쁘게 선택하셨고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이유를 우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기도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모르지만 성모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마도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모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과 희망 그리고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성모님의 인도와 도움을 청해야 하고 성모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것이고 내가 너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단순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께 속한 귀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속해 있다는 이 사실은 우리의 존엄성을 한껏 드높여줍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이 소속감은 우리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우주의 여왕,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선택하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이와 더불어 당신이 우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자부심을 가지기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고 그분의 것이며 전적으로 그분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몫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몫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당신의 발치에 앉아 온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를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2)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진리를 발견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죽거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모님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의도가 바로 이 의도이기 때문에 너희와 너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성모님은 그 하느님의 명에 의해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성모님은 그분의 메신저로서 당신이 이 세상에 왜 오고 계시는지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의도가 바로 이 의도이기 때문에 너희와 너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평화의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고 굳게 믿고 회개하며 희생과 보속의 삶을 살도록 수많은 메시지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초대하며 부르고 계십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이 초대와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 가장 좋은 몫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인도되고,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024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하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인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것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하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인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오늘은 성모님 메주고리예 발현 43주년 기념일입니다. 43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성모님은 매일 발현하셨고, 지금도 세 사람의 발현목격증인인 마리야, 이반 그리고 비츠카를 통해 그 매일 발현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성모님 발현은 역사상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고, 앞으로 지상에서 이와 같은 발현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것이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성모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43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성모님의 발현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모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고 그 외적 표징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가장 잘 알아듣고 그에 가장 완전하게 순명하시는 분은 성모님 밖에 없습니다.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계획과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그 실현을 위해 일하는 당신의 특사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특사로 이 땅에 오고 계시지만, 메주고리예 발현에는 성모님의 자발성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분 역시 당신의 자녀들인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 모두가 구원과 평화를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한번도 멈추신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메주고리예 발현 43주년 기념일인 오늘도 역시 성모님은 우리들을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만민의 어머니이신 그분께는 자녀의 인종, 언어, 종교, 피부색, 지위 등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엄청난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성모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당신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성모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 45 참조) 하느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기뻐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성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그리고 온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성모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도 어머니와 함께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들처럼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거룩함과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길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모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해 주신 결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느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려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성모님께서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누가 평화를 위험에 빠뜨리고, 누가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고 세상을 파멸시키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탄과 그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이 바로 그 범인입니다. 이들의 계획과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기도와 단식 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성모님은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것은 가정을 영적인 요새로 만드는 일입니다. 가족이 함께 기도할 때 사탄이 그 가정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기도할 때 그 가정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의 집, 곧 작은 가정 교회가 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당에 감실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또 다른 작은 교회인 가정에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곳, 눈에 잘 띄는 곳에 성경을 두면 그것을 통해 그 가정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시각적으로 매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펴서 매일 가족이 함께 읽으면 우리의 영과 마음과 삶이 바뀝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구원과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담겨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공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일 성경을 펴고 읽으면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과 영혼에 태어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충만해지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당신의 능력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하게 하셨던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과 영혼 안에 예수님의 모습을 새겨 주시도록 간절히 청합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것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어느 날엔가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이 언젠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날은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 하루조차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오늘 하루 중에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다른 일상을 하면서도 미사 참례, 묵주기도, 성경 읽기, 묵상, 십자가의 길 바치기, 성체조배, 자선적인 봉사 등을 하고 저녁을 맞이하여 다시금 무릎을 꿇고 그렇게 하루를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그런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짧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성공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삶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나 풀과 같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언제나 그 자리에 영원히 계시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외적으로 표현했던 우리의 모든 행위만이 남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이 단순하지만 가장 확고한 진리를 믿고 그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살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고 초대하십니다. 내일로 미루거나 다른 시간이나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오늘 이 순간부터 성모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합시다.


   
 
 
2024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회개하고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 말씀대로 지금 이 시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우리가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살아 가면서 그 힘으로 그분께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이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라고, 즉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 마음을 드리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우리 마음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만 속해 있어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차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우리 삶의 맨첫자리에 놓으라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우리 각자가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이러한 기도 모임의 첫 단위는 바로 가정입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기도하면 거기서 바로 기도 모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 기도 모임을 통해 가족들이 서로에게 좋을 일을 행하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며 함께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과 성모님 안에서 기쁨을 느끼며 성장해 나갑니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없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비록 함께 기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가족이 다른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의 힘이 다른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믿고 가족들이 각각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금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가족 일원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해 준다면 그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도 모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세 사람일지라도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그 청원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모아 한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기를 버리고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 모임 구성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바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를 먼저 생각하는 이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것 없이는 기도 모임이 존립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회개하고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일까요?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 그리고 우리 자신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한눈을 팔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하느님께로 향하는 작업, 즉 회개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매일의 양심성찰과 매달의 고해성사가 우리의 계속되는 회개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모님 말씀대로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 마음으로 기도하고,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죄를 피해야 합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지상의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가까이 있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024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죽음과 증오를 선택한 이들을 통해 날마다 그의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죽음과 증오를 선택한 이들을 통해 날마다 그의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조건 이긴다.’는 뜻입니다. 어떤 싸움에서든지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이 누구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싸움을 하지만 특별히 우리는 매일같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적 싸움의 대상, 즉 우리의 적은 바로 사탄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주적 사탄은 분명 존재하고 우리와 이 세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심지어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마저도 파괴하려고 온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자신의 존재를 가리우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그럴 듯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와 영향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달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지 곳곳에서 성모님은 사탄이 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증오를 선택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자신을 내맡겨 그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 몸집을 더 크게 키우고 악한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합니다. 
    사탄이 그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 더 강해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강력한 연합군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연합군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증오를 선택함으로써 사탄의 군대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생명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성모님의 군대에 합류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어머니 군대의 한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적 군대의 지휘관이시며 총사령관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사탄과 그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신이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조건 이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적인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고, 큰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고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를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1-39)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혹시라도 우리가 이 사실을 잊고 우리 자신이 마치 하느님이나 된 것처럼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늘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탄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 8)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그분의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매년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 사제는 우리 머리 위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하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이를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보다는 악을 선택하여 죄를 짓곤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한 이야기가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루카 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36-50)
    이 이야기에서 죄인인 여인은 비록 죄 중에 살고 있었지만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가 살고 있는 고을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 자리였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녀를 위해 그 집에 가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님께서 창녀와 세리를 비롯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이 초대받으신 바리사이의 집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발치 뒤쪽에 서서 울며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리고 나서 향유를 발라드리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회개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비록 죄인이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녀의 참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달리 바리사이 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눈으로 죄인인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를 여전히 죄인으로 단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기 위해 그분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죄 중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죄라는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그들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양심의 불이 계속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다고 해서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고 우리처럼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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