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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ies
 
작성일 : 14-01-10 22:44
성모님과 함께하는 감사와 축복으로의 여정 (로마~메주고리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441  
1. 성모님과 함께하는 감사와 축복으로의 여정 (로마~메주고리예)
 
정희 아가페
(서울 대교구 수색 성당 교우)
 
솔직히 이 순례 후기 제의를 받고 왜 거절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바람처럼 훒고 지나간 로마, 아씨시, 산 조반니 로톤도가 그랬고, 생전처음 와보는 메주고리예를 몇 번씩이나 다녀갔다는 형제, 자매가 수두룩한데 왜 이 글을 이 촌뜨기가 써야 하는지 아무 생각 없었던 자신을 나무랐다.
     때늦은 고백이지만 이번 순례는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필요했던 나 자신에 대한 귀 기울임이며 온전히 자신을 알기 위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얼마나 수많은 나날들을 수행에 쫓겨 잃어버리고 부서졌던 영혼이었는지. 스스로에 대한 내밀한 연민을 가질 여유도 없이 쉰이라는 고개를 바라보고 있는 무모한 나에게 대한 또 다른 도전장이었다.
     철저히 혼자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어떠한 감정에서도 자유롭고자 노력했다. 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고 한 끼 단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때론 철저히 융화되기도 때론 철저히 자신의 영역을 엄격히 사수하면서 철없는 가을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침묵은 언제나 한없이 감미로운 기도가 되었고 공동체 미사와 찬미는 풍성한 잔치가 되어 감사와 은총 속으로 우리 모두를 견인하고 있었다.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드린 아침미사를 시작으로 공식 순례가 시작되었고, 굳이 많은 것에 눈독을 들이기보다 최대한 마음이 머무는 곳에 충실하고자 했던 이번 순례는 나의 삶에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현상계 저 너머에 존재하는 실존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과 확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진리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순례 후기는 기행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편의 역사적 아름다운 파노라마로 쓰여 질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바라 본대로 느껴진 대로 사고한바 대로 의식의 잔무늬들을 하나씩 간추려 본 사유의 모음집이며 삶의 울타리 속에서 벗하게 되는 또 다른 한편의 꾸밈없는 사적 전승으로 남게 될 소박한 유산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러나 마침내 다다라야 할 곳은 감사함이었으며 일치의 아름다움이었다는 사실로 이 순례는 귀결된다.
     힘들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부르심에 응답하며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당신을 알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알기를 바라고 계신 그분들의 요청은 내 남은 삶의 주제어가 될 것이기에 이제 더 이상 인식의 두께에서 방황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 이 하나 만으로 순례는 충분히 값지다. 그래서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은 다르다. 늘 우러러 볼 것만이 아니라 이제 기꺼이 하늘이 되어야 한다는 비껴갈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 활발한 떨기세포처럼 내 안에 자리 잡아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가슴이 없다면, 모든 것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랑이 없다면 이렇게 이식 받은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할 것이다.
     참을 향한 동행, 빛을 향해가는 여정, 나를 찾아 떠난 순례는 이렇게 살아 있는 신성에 눈뜨는 작업이었고 그 식별을 통하여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깨달아 가는 숭고한 과정 이었기에 나의 양심은 깊은 참회를 통해 치유되고 거듭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 가을 첫 수확은 이렇게 풍요롭고 아름다웠다. 무엇을 더하고 얻을 수 있었기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더 넓어 졌기에 좀 더 우주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용기가 필요했던 자신에게 다분히 감사한 시간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며 오늘 또 파견되어 살아갈 힘을 얻는 영혼의 산실이 되어준 이번 순례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모든 감사했던 마음들 주님께 돌려드리며...
 
2. 2013년 9월 29: 거룩한 가난 (성프란치스코의 아씨시에서)
비 내리는 아씨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꿈꾸어오던 하늘, 그렇게 그리워하던 사부님의 발자취를 찾아 한걸음에 올라선 그 고도에서 프란치스코 성인 스스로 다져 오셨던 가난과 겸손의 정원을 돌아볼 때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빈 마음이 되어 사부님의 영전에서 그 거룩한 가난과 빛나는 가르침에 언제나 미약하기만 했었던 나의 마음은 결국 아련한 아픔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얼마만큼 나 더 살아야 나의 이 작은 아버지의 뜰 안에서 지나간 삶들에 조차 참된 논리를 가지고 살갑게 자신을 껴안게 될지 몰라 한동안 서성거렸다.
     나의 사부님은 맑은 눈빛으로 깊은 침묵으로 그렇게 나를 맞아주셨고, 오묘한 사랑과 희망을 말씀하시며 내적 가난과 순종의 덕에 대한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만연한 하느님의 선성에 대한 깨달음을 일깨워주셨다. 그랬다. 허름해서 육신을 온전히 가눌 수 조차 없는 누더기를 걸치고 문전걸식을 하며 별을 보면서 잠을 청하면서도 행복해하셨던 사부님의 아리따움과 귀도 주교 앞에서 세상이 입혀준 헌 옷을 벗고 하느님의 새 옷으로 갈아 입으시고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신 나의 사부님을 스치고 지나갔을 바람 한자락조차도 그리웠기에 오늘 이 하늘은 그 자체로 영원하다.
     프란치스칸으로 살기에 너무 헛된 주제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에게 그 어떤 꾸지람보다 더 따가운 말씀의 행적들이 긴 시간 마음을 붙들어 매었고, 때문에 수많은 이방인들의 발자국 소리에 낡아 가고 있는 아침의 고요조차도 사랑할 수 있었다.
     실로 짧은 만남이었다. 하늘가에 번져오는 익숙해진 노을 빛을 마주하며 아씨시를 뒤로 하고 돌아 나오던 시간 난 호주머니를 뒤져 만져지는 묵주를 꺼내 들며 ‘거룩한 가난은 더 이상 선포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가난은 내 안에 자리 잡은 하느님의 것들을 온전히 드러내어 그분의 신성 안에서 죽은 자신의 인성을 발견 하는 것’이라고 쓸쓸히 정의했다. 많은 아쉬움을 간직한 채 내려오는 프란치스코 대성당 돌계단 어귀에서 나도 한줌 바람으로 머물고 싶던 마음을 가까스로 달랬다. 태양의 찬가를 혼자 읊조리며 그렇게....
 
“올 한해는 영. 육의 모든 고통을 잊은 채 사부님 덕분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얼마나 기뻐했는지 이 가치를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잠 못 들던 소중한 시간들이 제 의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어느 소풍보다 아름답고 참되고 거룩한 소풍에 부족한 저를 초대해주시고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식탁 앞에서 저를 친히 맞아주신 사부님!
당신이 저의 사부님이셔서 행복합니다.
<2012년 11월 10 아씨시의 하늘을 그리워하며 >
 
3. 2013년 10월 2: 믿음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산에서)
듣던 대로 거칠고 험한 산이었다. 아니 무지막지한 돌밭이었다. 도무지 위만 쳐다보면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이었기에 오히려 땅바닥에 그리고 내디딤에 충실해야 했다. 적어도 이 산을 오르는 동안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고백이다. 그렇지만 난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왜 이런 척박한 땅에 성모어머님 당신이 오셨는지 왜 저를 이 험한 곳으로 부르셨는지, 어떤 이유도 어떤 의혹도 제기 하지 않은 채 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에 나의 시선을 맡기며 세상 어느 곳에서 맞는 바람보다 상쾌하던 아침바람에 잠시 마음을 빼앗겨 보았다. 나의 기억대로라면 난 성모어머님께 나의 마음을 드렸던 것 같다.
      날이 밝고 성모님 발현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 남다른 표징을 감지한 사람들의 눈빛을 엿볼 수 있었고, 성모 어머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온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눈망울과 염원들이 묻어나던 그 산 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에게는 어떤 표징도 어떤 메시지도 결코 없었지만 그 사실이 나에게 안쓰러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성모님은 비록 어떤 가시적 형태로 다가오시지 않으셨지만 나의 영혼의 부분, 부분들을 이미 어루만져주시고 계셨다.
     내가 메주고리예에 있는 동안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심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인내해야 하는 일들, 포용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무관심하시지 않으신 어머님의 깊은 손길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저녁 안개처럼 온몸으로 번져오던 평화의 기운 때문에 순례의 나날들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었다. 혼자 오른 순례길 이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 감사함은 온전히 성모님의 몫이다. 성모님은 나를 부르셨고 나는 응답할 수 있었다는 이 계시의 본질에 대한 해석 말고는 더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시간이었다.
      내가 발현 산을 오르는 날에도 오르지 않는 날에도 성모 어머님의 발현은 계속 되고 있고 계속될 것임을 믿고 있는 나에게 비추어진 오늘이 바로 가장 큰 표징이다. 이제 메주고리예는 내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주제어가 된다. 늘 나와 머리를 맞대고 계신 성모어머님을 어떻게 증거하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내 생존의 이유가 되는 날까지 기도하고 어머님 말씀처럼 기도가 삶이 되고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소명을 새기며 나는 또 그렇게 나의 십자가산을 기쁘게 맞을 마중물을 준비한다.
 
“그날을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설레고 기쁩니다.
그 순례의 날들이 천상의 날들이 되어 제 삶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되길
바라는 이모든 마음들 주님께 맡겨드리며
제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함과 부족함 들과 불완전성 속에서 승리하시는 어머님이
되 시길 빕니다.
성모 어머님! 이 밤도 촛불 밝혀 당신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내 어머님 어서 오소서!
<2013년 5월 25 성모의 밤 >
 
4. 2013년 10월 5: 기도 (약물 중독자들의 재활터인 체나꼴로 공동체를 방문하고)
눈이 부실만큼 신선하고 아름답던 가을날 아침, 내 안에 가득한 성모님의 향기를 잃을까 조심조심하며 걸어왔던 길이다. 아무 부러울 것도 없었고 무엇 하나 보태고 싶은 것도 없는 마음 채워짐이 결국 비워짐과 일치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요 며칠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평화의 기운에 휩싸여 체나꼴로 공동체를 돌아보았다.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기도가 무엇인지 전해주고 있었던 두 형제의 증언은 그들의 삶을 통한 하느님의 실재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감사함과 맞닿아 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신비는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한다는 신학적 차원의 사고가 아니더라도 사랑은 얼마든지 설명되어질 수 있고, 기도는 얼마든지 실천되어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 그들은 충분히 꽃다웠고 빛났다.
      고작 두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온 우주와 화해한 기분이 들었고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손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관대함이 내면 가득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가고 있었다. 인간은 인간 때문에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만이 희망이고 생명의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고귀한 시간들, 그 중심에 계시던 하느님의 손길 때문에 더더욱 빛나던 그들의 눈동자를 통해 이 순례가 천상의 어귀에 닿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난 또 새로운 주제의 기도를 챙겨 들며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체나꼴로 공동체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준 공동체다. 수많은 중독자와 가족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있는 나에게 주신 성모 어머님의 살아있는 메시지이다. 나는 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저 이 작은 몸으로 거인 같은 청년들을 포옹하며 위대한 그들에게 격려를 더해줄 수 있었을 뿐.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가는 내가 맞닥뜨릴 미래, 내가 살지 않은 날들의 계획에 앞서 필요한 것은 오직 기도뿐임을 그 신앙적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답을 안고 내려오는 비탈길에서 바라본 발현산의 어머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나에게 속삭였다. “모든 것을 경청하라. 참된 경청자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고...
 
"가장 가난했지만 가장 순수했던 그 아주머니 같은 분들을 위해서 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통을 함께한다는 가당찮은 의지보다
진정 그들과 함께 흘려야 할 눈물을 위하여 인간다운 삶이 다다라야 할 마지막
종착역을 위하여 꽃답게 죽을 수 있는 길 그 길이 남의 길이 아니라 나의 길임을
깨달았던 시간들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듯하다.
내가 마시고 먹고 있는 것들의 삼분의 일만 줄여도 어느 배고픈 이의
빵 한 조각이 마련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 것이 나의
고단한 일상을 기쁘게 살아가게 해주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에
참으로 감사하다."
<2000년의 어느 봄날을 회상하며 >
 
5. 2013년 10월 6: 감사 예수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 주일미사)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어 공동체 미사에 참석해야 할 시간, 한마디 말도 알아들을 수 없고 통역 방송이 나오지도 않는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 주일 아침 미사에 낯선 이방인 순례객의 한 사람으로 주님과 마주했다. 한번은 꼭 맞닥뜨리고 싶은 현실을 거부하고 싶지 않은 생각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모든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미사 통상문도 강론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눈뜬 소경이었지만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앎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얼마나 깊고 넓은 하느님의 자애와 가르침이 나를 감싸고 있었는지 낯선 이 이방인은 눈물로 부서진 영혼을 씻고 있었다. 이미 이해와 해석을 넘어선 이 미사에 난 누구보다 진지하고 거룩하게 임했다. 철저하게 인식의 카테고리를 끊고 만난 주님,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만난 주님은 더없이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철학적 포기와 금욕적 무관심으로 순례를 마감할 즈음 난 이렇게 한 순간 주님 앞에 홀로서기를 자처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해묵은 집착들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온갖 사념들을 고스란히 그분께 내어 맡기며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고자 스스로를 광야로 내몰았지만 주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김없이 성체의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 오셨다. 눈을 씻고 보아도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다. 하느님이 하느님다우시다는 것이 성체의 진실이라는데 생각이 머물면 난 그 감동에 마음을 적시는 한 조각 눈물로만 응답할 수 있는 미약한 존재가 된다. 그분은 오늘 이렇게 사랑으로 오시는데 그 동안 난 얼마나 수많은 날들을 그분을 알겠다고 무모하게 맴돌고 판단하고 곁눈질을 하며 온전한 예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보다 그 허상에 영혼을 팔고마음을 허비 했던가 하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온 핏줄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는 어떠한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해준 이 미사는 나의 생애 최고의 미사로 기억될 것이다. 감사함 때문에 눈물로 드리던 미사, 그마저 하느님의 자비로 인도된 길이었으니 어찌 나의 삶이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기 이전에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 그 길이 나의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회상해 보며 감사함에 설레었던 마음들조차 참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삶의 밑거름이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빌어본다.

 

“당신은 저의 어머님, 저의 사랑이십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당신의 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이길 수 없도록 어머님 지켜주소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만이 저를 성장시키고 새롭게 하는 은총의 샘물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저도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2013 10 3일 티할리나 성모님 성당 미사 후 묵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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