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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10 10:18
나와 메주고리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857  
나와 메주고리예

고중원 데레사
(서울 대교구 세검정 성당 교우)

2003년 7월 23일부터 우리 집에서 구역 식구끼리 일 주일에 한 번씩 기도회를 하였는데 그 때 신심 깊은 교우가 예수 성심상과 성모 마리아 상을 가져왔다. 그런데 예수 성심 상은 흔히 보는 것이었으나 마리아 상은 처음 보는 것으로 약간 푸른 색 도는, 거의 흰색의 로브(긴 원피스)와 연한 오렌지 빛의-속칭 환타 색- 베일을 두르셨는데 허리띠를 두르지 않은 옷과 베일은 바람에 휘날리는 듯 하고 오른 손은 가슴에, 왼손은 앞으로 주욱 뻗어서 마치 ‘이리 오렴’ 하시는 모양이었다.  얼굴은 어찌나 예쁘신지! 눈을 아래로 내리 뜨셔서 나는  발밑으로 가서 올려다보기 까지 하면서 눈을 맞추고 싶었다. 

이것이 나와 메주고리예 성모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리고 이 분이 메주고리예에서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이란 걸 알았다. 성모님 상을 주신 자매는 여러 번 그 곳을 다녀왔다고 하고, 내가 나가는 로타리 클럽 자매도, 성모님께 청하러, 들어 주신 것에 감사하러, 서 너 번 다녀왔단다. 아, 나도 가고 싶다! 사람들 없을 때 그 성모님을 쓰다듬으며 나도 가게 해 주세요. 습관처럼 했다. 

재작년에 기회가 왔다. 우리 본당출신 신부님 아버님이 계시는데 이 분은 한 번 가시면 한 달도 더 단식과 기도를 하신단다. 내게 책을 주셔서 읽고, 독일에 연주하러 간 김에 이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혼자 가니까 비행장에 마중 나와 주시기로 약속을 받고.

성지를 갈 땐 마귀의 방해가 심하다고들 한다. 정말 나는 이것이 마귀의 방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내 비행기는 6월29일 수요일에 크로아티아 스플릿 행인데 아, 왜 나는 그 날이 목요일이라고 착각했을까! 오후 비행기니까 아침에 조배나 해야지 하고 성당에 들르니 마침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여행 중엔 매일미사 책을 가져가 언어가 무엇이든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우리 책을 읽는다. 아, 복음 내용이 달라? (독일어 약간 안다.) 그리고 날자와 요일을 보니, 29일은 수요일, 어제다. 오 맙소사! 무조건 공항에 갔다. 스플릿 행은 일주일에 두 번 밖에 없고 그건 어제 떠났고. 물론 비행기 표는 무효이고... 어떻게든 스플릿으로 가는 연결편은 없고 어렴풋이 들었던 사라예보 까지는 세 번을 갈아  타야 그날 늦게 도착한단다. 뮌헨, 비엔나 거쳐서 사라예보 이다. 여기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메주고리예에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나의 다급함을 알아서인지 직원이 일반석은 없고 비즈니스 석 뿐이란다. 어쩔 수 없이 표를 샀다. 사라예보엔 가본 적도 없고. 거긴 보스아니아 즉 회교국이고 한 밤중에 내리고... 그런데 성모님이 천사를 보내 주셨다. 대합실에서 보스아니아인 여기자를 만나서 호텔, 택시, 다음 날 성지에 갈 차편까지 안내를 받았다. 

다음 날 가슴 두근거려가며 도착한 메주고리예. 그런데 어디서 이 분을 만나지? 엊저녁 공항에서 눈 빠지게 나를 기다리셨을 테고 비싼 차비까지 쓰셨을 텐데-여긴 일반 교통이 없어 택시를 타거나 차를 빌어 타야 한다.- 얼른 만나야 한다. 어제 고생 하신 것 사과 드리고 차 삯도 드리고... 그런데 어떻게 찾나? 집 얻어 짐 들여 놓고 4시부터 십자가 산에서 행사-그 땐 그렇게 알아들었다-에 계실지 몰라 뛰듯이 올라갔다. 내려올 때 거꾸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다. 다음 날도 성모 발현 산으로, 다시 십자가 산으로, 오후 성당 뒤편의 야외에서 드리는 묵주신공과 미사예절 하면서 아무리 찾아도 안 계셨다. 일요일 작은 성당 미사에서 덤으로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학생과 신부님들의 아름다운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었고 특별한 영성체도 하였다. 약간 두려웠지만 성지에 온 이상 교회에서도 인정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거기서도 못 찾고 야고보 성당 앞의 성모님상 앞에 놓인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데 누가 온다. 거기서! 너무 반가워 막 끌어안았다.

내가 미리 사 온 표에서 한 구간을 사용 안 했기 때문에 집에 가는 표도 없어져 귀국하는 표를 다시 사야 했다. 아주, 아주 비싸게 들인 순례였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돌아오는 편 사정으로 이틀을 더 머물 수 있었다. 집에는 너무 좋아서 좀 더 있겠노라 하고. 우리 식구는 아무도 이 얘기를 모른다. 조심성 없다고 흉잡힐까봐 말 안 했다. 이 글은 안 보여줄 거다.
 
다녀와서 다시 성모님 머리 쓸어가며 “한 번 더 보내주세요.”하고 빌었다.  먼저 성모상 준 교우가 또 간단다. 나는 계획에 없었지만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가자! 나중에 어릴 적 친구도 가기로 했는데 정작 먼저 말 꺼낸 이는 사정이 생겨 못 갔다.이렇게  성지란 허락이 떨어져야 가게 되는구나 했다. 친구는 출발 사흘 전에 다리를 다쳐 깁스에 목발 차림으로 함께 갔다. 공항에서 휠체어 밀고 ‘원님 덕분에 나발 분다’고 특별 출입구로 들어가고 자리도 편 한 곳으로 앉혀주는 대접을 받았다.  

모스코바에서 환승하여 로마로 갔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더위에 한 없이 줄지어 기다렸는데 나는 목발 짚는 친구와 먼저 그늘에 가서 기다리는 특전도 얻었다. 성 바오로 대성당, 성 마리아 대성당, 특히 로마 박해시대 생겨난 지하 공동체 장소 겸 묘지인 까따꼼베에서 죽음을 많이 묵상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성녀 클라라 대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 성 프란치스코 생가, 성인이 참회를 위해 장미꽃 밭에 구르신 후 가시 없는 장미가 계속 자란다는 그 곳, 새들에게도 설교하셨다는 그 곳엔 정말 흰 비둘기가 나무 위에 앉아 있어서 시간을 거슬러 간 느낌을 가졌다. 

저녁에 비오 신부님이 계셨던 산 죠반니 로톤토로 갔다. 성 비오 신부님 무덤도 가고, ‘고통을 덜어주는 병원’이란 큰 글자가 박힌 병원, 성인 유품 전시관 등도 관람하였다. 새로 지은 대 성전은 너무 화려하다 싶게 금칠이 되어 있어 오상의 고통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신 성인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생각이 짧겠지.’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아주 가까운 친구 남편이 주무시다 돌아가셨다고 딸로부터 문자가 왔다. 너무 놀랍고 슬프고 친구가 가엾고...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구나.’ 계속 연미사 드리며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빌었다. 나도 상중인 듯싶었다. 
 
란치아노로 이동하여서는 8세기경 미사 때 봉헌된 제병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한 상태로 보존 되어 있는 성체 성혈의 기적 성당을 순례하였는데 아직도 피 묻은 살점이 보이고 응고된 혈액을 볼 때는 전율을 느꼈다. 수 세기에 걸쳐 검사가 이루어 졌는데 최후의 결과는, ‘이는 사람의 피로써 AB 형이고 살점은 사람 심장의 조직으로 보인다.’ 라는 결론이다.  그리고 그 변화된 것이 사진으로 확대되어 잘 보이게 전시해 놓았다. 내가 늘 그렇게 믿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건 또 무슨 두려움인고.’하고 생각했다. 

앙코나 항구로 가서 크로아티아 스플릿으로 가는 밤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아침에 내렸다. 보통 한국에서 몌주고리예 순례를 위해선 비행기를 타고 밤에 내려 고속도로로 가는데 우리는 이렇게 아침에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변을 버스로 달리게 되니 이것 또한 은총이었다. 가는 도중에 크로아티아 성모 성지인 베프리치에서 야외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과 함께하는 성지순례는 매일 미사를 함께 드린다는 특전이 있다. 가족, 인척, 친구, 은인, 이웃들이 쉴 새 없이 떠올라 이 틈에 은혜 갚자는 심정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아, 메주고리예. 
 ‘내가 이태 전 고생, 고생을 하며 왔던 이 곳에, 먹여 주며 재워 주고 실어다 주셨구나.’ 감사했다. 지난번엔 혼자 와서 모르고 놓친 것도 많았는데 이번엔 정말 알뜰하게 다 경험할 수 있었다.  십자가 산, 성모 발현 산, 야고보 성당서의 미사와 야외 고백성사, 광장에서의 묵주신공과 미사, 발현 증인에게서 직접들은 증언과 권고.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얼굴로 알려진 그 성모상이 있는 티할리나의 작은 본당, 알콜, 마약 중독자들이 와서 치유 받고 생활하는 공동체 체나콜로. 이 날, 젊은이 둘이 자기의 악습에서 벗어나 이런 공동체에서 기도와 노동을 하며 사는 얘기 -이곳에서 신부님 여섯이 배출 됐단다.- 대부분이 어머니 순례자였던 우리는 그 청년들의 어려서 받은 학대, 부모의 불화 목격, 학교서 인정 못 받아 결국은 밖으로 나가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 등 가슴 아픈 얘기를 듣고, 그러나 ‘이 공동체에 와서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이젠 이렇게 행복하게 됐습니다.’라고 했을 때 마음이 아파 모두 울었고, 이들의 변화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한 한마디 한마디가 애들을 이렇게 망칠 수가 있구나 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러는 사이 나의 친구는 깁스한 것을 풀어 버렸고, 떠나오는 날엔 목발마저 버렸다.
모두 놀라워하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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