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 자신의 용기와 의탁의 성령의 힘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이 때가 너희에게 선물이 되고, 거룩함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지금은 참으로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 모두를 자녀로 사랑하시는 어머니께서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께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우리 자신과 세상이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 있는 시기이기에, 분명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가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덕들을 우리 삶 안에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희망하고, 평화를 구하며, 기쁘게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덕들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충만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온전히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불안, 그리고 슬픔에 잠겨 있던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안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평화를 선물로 주셨으며,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먼저 희망과 평화,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참으로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자신이 먼저 변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타인에게 변화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우리 자신을 더욱 완고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로부터 부정적인 인상만을 받게 하여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사람들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 자신의 용기와 의탁의 성령의 힘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명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더 큰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오는 힘을 기다리며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모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바로 그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온 교회가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사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비겁함을 모르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용기백배하였고, 박해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제 두 주가 지나면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보듯이,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모님을 중심으로 그분과 함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 모범을 따라, 성모님 곁에 모여 그분과 함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만일 바로 그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워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가 너희에게 선물이 되고, 거룩함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그분께서 반드시 오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령의 오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은 마땅하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와 준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이며, 그것만으로 성령의 강림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에게 자유롭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불화, 이기심, 그리고 죄의 바람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불화와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과 기도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 마음 안에서도, 너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불화와 이기심, 그리고 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관계까지도 단절시킵니다. 그 결과 초래되는 것은 바로 불화와 멸망입니다. 이 참혹한 현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성모님께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 그 진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전해 주실 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은 마치 마음이 녹아내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일 것입니다. 자녀들이 불화와 멸망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통을 느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육신의 부모도 그러하거늘,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느끼시는 고통은 얼마나 더 깊고 애절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슬퍼하시며 경고하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십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과 기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다시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되찾고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단순하지만 깊은 부르심—‘하느님과 기도로 돌아가라’는 초대—를 우리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부르심은 단순하게 들릴 수 있으나, 불화와 멸망에 이르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부터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 자체이시며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평화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그렇습니다. 우리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그분의 계획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도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믿음과 그분을 향한 사랑을 보시고, 모든 것을 친히 안배하시며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그분의 가르침과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땅 위에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짐을 체험한 시편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 1,1-3).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회개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은 피로를 모릅니다.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지난 43년 10개월 동안 단 한순간도 피로하거나 지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치지 않고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성모님의 사랑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깊이 염려하시는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고 있는지—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회개로 초대받은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너희를 격려한다. 어린 자녀들아, 내 아들 예수님의 성심에서 멀어진 마음들의 회개를 위하여 너희의 기도와 고통, 그리고 눈물을 나에게 봉헌하여라.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 없이는 너희에게 미래도, 영원한 생명도 없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만, 너희 없이는 너희를 도와줄 수 없다. 그러니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회개로 초대받은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너희를 격려한다.
우리 중에 은총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께 다양한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은 다르지만, 주로 건강, 취업, 결혼, 입학, 승진, 재물, 그리고 가정의 평화 등을 기도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기에, 우리가 하느님께 그것을 청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 달 성모님의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은총들 대신,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회개로 초대받은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너희를 격려한다.”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로 초대받는 것’이 진정한 은총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우리가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려는 깊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며 기쁨 속에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천국에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리고 성모님의 메시지를 통해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시듯,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는 것이며,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청해야 할 은총은 세상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것, 곧 천상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청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써 온전히 하느님만을 모시고 살며, 그분의 뜻을 언제나 따르고자 할 때, 우리는 이 땅과 하늘에 영적 보물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보물은 기도와 단식, 자선과 믿음, 용서와 사랑, 그리고 거룩함과 구원, 평화의 열매들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우리의 참된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회개’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회개로 초대받은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너희를 격려한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이루는 회개는 하늘도 기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7).
오늘, 아니 바로 지금 이 순간, 회개하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님, 그리고 모든 성인들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어린 자녀들아, 내 아들 예수님의 성심에서 멀어진 마음들의 회개를 위하여 너희의 기도와 고통, 그리고 눈물을 나에게 봉헌하여라.
비행기를 타면 이륙 전에, 모니터나 승무원을 통해 안전 수칙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지침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함께 탑승한 부모나 보호자는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먼저 자신이 산소호흡기와 구명 조끼를 착용한 후 아이에게 착용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준비된 사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나 준비할 수 없는 이를 도와야 하듯, 성모님께서도 우리가 먼저 회개한 다음, 다른 이들의 회개를 도우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내 아들 예수님의 성심에서 멀어진 마음들의 회개를 위하여 너희의 기도와 고통, 그리고 눈물을 나에게 봉헌하여라.”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희생할 줄 알며,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우리 자신과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하느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 누구보다도 그것을 깊이 체험하고 실천하셨기에, 지금도 우리 모두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와 고통, 그리고 눈물을 당신께 봉헌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정성껏 봉헌한 모든 것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바치실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봉헌을 통하여 당신의 성심에서 멀어진 영혼들의 회개를 위해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혼자 기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를 실천해 온 사람이라 해도, 아주 의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혼자서 기도를 이어가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하는 기도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함께할 때 더 큰 힘과 시너지가 생기듯, 기도 또한 함께 바칠 때 놀라운 시너지가 일어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가능한 한 매일 공동으로 기도할 것을 더욱 강하게 권고하십니다. 가정에서든, 기도 모임에서든, 성당에서든,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어느 자리에서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공동 기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당신도 항상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향하고 있기에,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에 성모님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거나 의식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묵주기도를 바칠 때는, “어머니, 저는 지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 이 기도를 드리오니,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소서.” 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또한 자유롭게 화살 기도를 드릴 때는 마지막에, “예수님,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이 기도를 당신께 바치나이다.” 라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이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도록 합시다. 그 기도 안에서 성모님은 언제나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 없이는 너희에게 미래도, 영원한 생명도 없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만, 너희 없이는 너희를 도와줄 수 없다. 그러니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늘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은퇴 이후의 삶, 곧 노후 준비에 더 많은 관심과 신경을 기울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안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에 가입하고, 연금을 준비하며, 여러 가지 투자를 통해 미래의 안전을 도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련하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미국 캘리포니아와 우리나라 경상북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에서도 보았듯이, 예상치 못한 순간,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과 모든 재산을 잃는 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 없이는 너희에게 미래도, 영원한 생명도 없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오직 하느님께 두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온갖 삶의 풍파를 겪은 듯한 시편 저자도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네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신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시편 121, 1-8)
우리는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 언제나 “예”라고 응답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번 봄이 너희에게 개인적인 회개의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너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나의 평화와 기도의 손이 되어라. 사랑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평화를 원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사랑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번 봄이 너희에게 개인적인 회개의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너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무엇보다 사랑하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날씨는 따뜻해지고, 나뭇가지에는 새순이 돋아 꽃이 피어납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며,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겨울이 지나 봄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번 봄이 너희에게 개인적인 회개의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인 봄을 맞이하기를 바라시기에 이러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봄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개인적인 회개’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온기와 빛, 사랑과 평화로 가득 채워지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삶을 하느님께 되돌리는 과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회개를 통해서만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우리의 ‘개인적인 회개’를 언급하십니다. 회개는 항상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미사의 참회 예식에서 우리가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도록 이끕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의 개인적인 회개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한 방울의 빗물이 다른 방울들과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마침내 바다가 되듯이, 모든 변화는 우리의 개인적인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회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봄을 가져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요한 3, 16 참조).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말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는 곧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각자의 상황과 처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말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삶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위선자라 부를 것입니다.
또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한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 진실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그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아시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생각할 때는 하느님도,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의 처지를 우선적으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도와 사랑, 그리고 연민은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아는 사람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 이 순간, 나 혹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동시에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나의 평화와 기도의 손이 되어라. 사랑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평화를 원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사랑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이처럼 귀하고 존경스러운 분께서 우리에게 “나의 평화와 기도의 손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감히 무엇이기에 성모님의 평화와 기도의 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초대는 세상 그 누구의 초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예로운 초대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초대를 통해 우리의 존엄성을 한층 높여 주십니다. 우리의 손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존재를 성모님께 내어 드려, 성모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도록 한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심지어 죄 중에 있더라도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깨닫기 위해 무엇보다도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평화 없이 살아가는 인류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열라고 끊임없이 초대하십니다. 이 부르심과 초대, 권고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온 인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비난과 지적, 단죄가 아닌, 공감과 연민,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따뜻하게 품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성모님의 이 부르심에 온 마음으로 응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에, 나는 대림절이 가정 기도가 되게 하라고 너희를 기도로 부르고 싶다. 특히 내가 다정하게 품에 안는 어린 자녀들아, 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너희를 격려한다. 평화가 불화와 증오를 이기도록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교회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에, 나는 대림절이 가정 기도가 되게 하라고 너희를 기도로 부르고 싶다.
어제는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성모님께서는 이 시기를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이는 교회 전례력상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절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온 누리의 임금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렇기에 이 기다림의 시기는 은총으로 충만합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은총이 가득하신' 어머니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은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주시기를 고대하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의 오심을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만약 '은총이 가득하신' 어머니 마리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잉태하라는 천사의 전갈에 '예'라고 응답하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 또한,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시며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 몸은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나이다."라고 하시며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시기로 결심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은총'과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우리를 향한 그분들의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육화의 신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이 세상에 모시는 크나큰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 14. 16. 17b)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멍하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그분만을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총 위에 은총을 주시는 그분이 오시는데, 어찌 우리가 적당히 그분을 기다리고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을 태중에 잉태하셨던 성모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 아드님의 얼굴을 뵙기를 갈망하셨습니다. 마침내 신비롭게 태어나 당신 품에 안기신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들여다보시며 성모님께서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언제나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탄절에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또 특별히 영성체 때 우리 손에 성체 예수님을 모시며,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한없이 기뻐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한 번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분은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 가운데 다시 태어나십니다. 따라서 은총의 기다림의 시기는 단지 대림절에 국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일생 동안 계속됩니다. 우리에게 은총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발걸음이 언제나 그분을 향해야 합니다.
다음 시편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 2-3)
첫 번째 대림절이 공표된 것은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난 직후였습니다. (창세 3,15 참조) 따라서 첫 대림절을 지낸 사람들은 바로 아담과 하와였으며, 첫 대림절에 구세주를 기다린 이들 역시 그들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직접 맺어주신 첫 부부였고, 곧 첫 가정이었습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처음부터 가정의 축일이었고, 가정의 구원을 위해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대림절을 가정의 기도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를 기도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죄가 최초의 가정에 들어왔고,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과 성 요셉이 이루신 가정 안에 은총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시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마땅히 가정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은 어떤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그분이 우리 가정 안에 태어나시고 우리 가정 안에서 영원히 사시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대림절을 시작하며, 우리 가정의 기도는 다시 시작되고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대림절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우리 가정에 함께하십니다. 성가정께서 우리 가정 안에 머무시며, 우리 가정을 성가정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는 우리 가족이 함께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기로 한마음으로 결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림절을 통해 우리 가정을 기도의 성가정으로 만듭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우리 가정에 충만히 넘치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 가정 안에서 넘치는 그 사랑과 평화가 이웃 가정으로 흘러들어가, 그들도 성가정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 가정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합시다.
기도로 시작하는 대림절이 우리 가정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고, 더 많은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내가 다정하게 품에 안는 어린 자녀들아, 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너희를 격려한다. 평화가 불화와 증오를 이기도록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특히 내가 다정하게 품에 안는 어린 자녀들아,"라는 성모님의 표현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랑을 한껏 드러냅니다. 성모님은 단순히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 담긴 다정다감함으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성모님의 품 안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이나 약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우리 자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품 안에서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고, 어머니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십시오. 어머니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인도하시도록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품에는 한없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불화와 증오가 넘쳐납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체험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불화와 증오를 이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평화는 단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역시 성모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며, 우리와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가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이 성모님 품 안의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너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어머니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공동 기도 지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다른 수많은 기도 지향이 있을 수 있으나 성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며, 6월 25일 메시지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서 평화를 앗아가려고 하는 사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몸소 우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든든한 말씀입니까? 우리의 미약한 기도에 성모님의 강력한 기도가 더해진다면, 그 기도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기도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 지향들에 앞서 항상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가장 중요한 지향으로 두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 지향의 우선순위를 조정함으로써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평화와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너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희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존재하시고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절망과 비탄에서 구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받아들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볼 때 그 어떠한 해결책이나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희망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큰 어려움이나 절망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도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합니다. 여기서 오상의 비오 성인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며 희망하십시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세상 만물, 아니 우주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 37)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깊은 신뢰, 즉 믿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드리고 그분을 굳게 믿는다면,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1, 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를 살게 해 주고(요한 11, 25 참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요한 6, 47 참조)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어머니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탄은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관계를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이 세상의 평화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이 세상이 평화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평화의 모후로서 이 세상에 오신 성모님께서는 발현 셋째 날, 즉 1981년 6월 26일 메주고리예에서의 첫 번째 발현지인 포드브르도(발현산)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신 후, 산을 내려가던 마리야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평화, 평화, 오직 평화만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야는 성모님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았는데, 성모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고 두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43년 이상이 지난 2024년 8월 25일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께서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평화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 평화가 없다면, 우리 주변에 평화를 가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평화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평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할 수 있도록 성모님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어머니 마리아의 축복을 늘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