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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하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인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것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하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인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오늘은 성모님 메주고리예 발현 43주년 기념일입니다. 43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성모님은 매일 발현하셨고, 지금도 세 사람의 발현목격증인인 마리야, 이반 그리고 비츠카를 통해 그 매일 발현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성모님 발현은 역사상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고, 앞으로 지상에서 이와 같은 발현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것이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성모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43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성모님의 발현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모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고 그 외적 표징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가장 잘 알아듣고 그에 가장 완전하게 순명하시는 분은 성모님 밖에 없습니다.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계획과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그 실현을 위해 일하는 당신의 특사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특사로 이 땅에 오고 계시지만, 메주고리예 발현에는 성모님의 자발성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분 역시 당신의 자녀들인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 모두가 구원과 평화를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한번도 멈추신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메주고리예 발현 43주년 기념일인 오늘도 역시 성모님은 우리들을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만민의 어머니이신 그분께는 자녀의 인종, 언어, 종교, 피부색, 지위 등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엄청난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성모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당신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성모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 45 참조) 하느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기뻐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성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그리고 온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성모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도 어머니와 함께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들처럼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거룩함과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길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모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해 주신 결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느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려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성모님께서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누가 평화를 위험에 빠뜨리고, 누가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고 세상을 파멸시키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탄과 그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이 바로 그 범인입니다. 이들의 계획과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기도와 단식 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성모님은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것은 가정을 영적인 요새로 만드는 일입니다. 가족이 함께 기도할 때 사탄이 그 가정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기도할 때 그 가정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의 집, 곧 작은 가정 교회가 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당에 감실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또 다른 작은 교회인 가정에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곳, 눈에 잘 띄는 곳에 성경을 두면 그것을 통해 그 가정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시각적으로 매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펴서 매일 가족이 함께 읽으면 우리의 영과 마음과 삶이 바뀝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구원과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담겨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공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일 성경을 펴고 읽으면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과 영혼에 태어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충만해지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당신의 능력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하게 하셨던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과 영혼 안에 예수님의 모습을 새겨 주시도록 간절히 청합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것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어느 날엔가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이 언젠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날은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 하루조차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오늘 하루 중에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다른 일상을 하면서도 미사 참례, 묵주기도, 성경 읽기, 묵상, 십자가의 길 바치기, 성체조배, 자선적인 봉사 등을 하고 저녁을 맞이하여 다시금 무릎을 꿇고 그렇게 하루를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그런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짧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성공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삶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나 풀과 같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언제나 그 자리에 영원히 계시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외적으로 표현했던 우리의 모든 행위만이 남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이 단순하지만 가장 확고한 진리를 믿고 그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살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고 초대하십니다. 내일로 미루거나 다른 시간이나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오늘 이 순간부터 성모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합시다.


   
 
 
2024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회개하고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 말씀대로 지금 이 시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우리가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살아 가면서 그 힘으로 그분께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이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라고, 즉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 마음을 드리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우리 마음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만 속해 있어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차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우리 삶의 맨첫자리에 놓으라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우리 각자가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이러한 기도 모임의 첫 단위는 바로 가정입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기도하면 거기서 바로 기도 모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 기도 모임을 통해 가족들이 서로에게 좋을 일을 행하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며 함께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과 성모님 안에서 기쁨을 느끼며 성장해 나갑니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없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비록 함께 기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가족이 다른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의 힘이 다른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믿고 가족들이 각각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금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가족 일원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해 준다면 그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도 모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세 사람일지라도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그 청원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모아 한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기를 버리고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 모임 구성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바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를 먼저 생각하는 이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것 없이는 기도 모임이 존립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회개하고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일까요?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 그리고 우리 자신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한눈을 팔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하느님께로 향하는 작업, 즉 회개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매일의 양심성찰과 매달의 고해성사가 우리의 계속되는 회개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모님 말씀대로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 마음으로 기도하고,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죄를 피해야 합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지상의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가까이 있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024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죽음과 증오를 선택한 이들을 통해 날마다 그의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죽음과 증오를 선택한 이들을 통해 날마다 그의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조건 이긴다.’는 뜻입니다. 어떤 싸움에서든지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이 누구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싸움을 하지만 특별히 우리는 매일같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적 싸움의 대상, 즉 우리의 적은 바로 사탄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주적 사탄은 분명 존재하고 우리와 이 세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심지어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마저도 파괴하려고 온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자신의 존재를 가리우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그럴 듯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와 영향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달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지 곳곳에서 성모님은 사탄이 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증오를 선택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자신을 내맡겨 그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 몸집을 더 크게 키우고 악한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합니다. 
    사탄이 그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 더 강해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강력한 연합군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연합군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증오를 선택함으로써 사탄의 군대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생명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성모님의 군대에 합류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어머니 군대의 한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적 군대의 지휘관이시며 총사령관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사탄과 그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신이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조건 이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적인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고, 큰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고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를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1-39)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혹시라도 우리가 이 사실을 잊고 우리 자신이 마치 하느님이나 된 것처럼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늘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탄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 8)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그분의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매년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 사제는 우리 머리 위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하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이를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보다는 악을 선택하여 죄를 짓곤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한 이야기가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루카 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36-50)
    이 이야기에서 죄인인 여인은 비록 죄 중에 살고 있었지만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가 살고 있는 고을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 자리였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녀를 위해 그 집에 가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님께서 창녀와 세리를 비롯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이 초대받으신 바리사이의 집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발치 뒤쪽에 서서 울며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리고 나서 향유를 발라드리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회개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비록 죄인이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녀의 참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달리 바리사이 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눈으로 죄인인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를 여전히 죄인으로 단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기 위해 그분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죄 중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죄라는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그들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양심의 불이 계속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다고 해서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고 우리처럼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4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선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승리하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여라. 하느님 없이, 그분의 사랑 없이 방황하는 이 인류를 위해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가 되고 빛이 되며,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선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승리하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여라. 하느님 없이, 그분의 사랑 없이 방황하는 이 인류를 위해 기도하여라.

통상 교회 전례력에 따르면 3월 25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그러나 3월 25일인 오늘, 교회는 날짜를 이동하여 오늘이 아니라 4월 8일에 이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기점으로 성주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성주간의 둘째 날인 오늘,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시기’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은총의 때이지만 특별히 성모님께서는 이 성주간을 염두에 두고 ‘이 은총의 시기’ 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주간은 우리 신앙의 신비의 가장 중심적인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때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은총이 충만한 때입니다. 
   성주간 시작 첫 날인 어제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군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고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분을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 가는 이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 9-10)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고 그분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예컨대 힘과 권력으로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열두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왕으로 등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그 길만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고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목요일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예루살렘 성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시온산의 어느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시며 성체성사와 신품성사를 세우셨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들고 그것들을 당신의 몸과 피로 축성해서 사도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성유를 축성하신 다음 그 기름을 가지고 일단 사도 베드로와 요한만을 대표로 사제로 축성하시면서 신품성사를 세우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도들에게 직접 신품성사를 주시지 않은 것은 아마도 유다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그러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곧 배반을 실행에 옮기고 자살한 운명인 유다를 사제로 만들지 않으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나중에 예수님 승천 후 성령 강림이 있고 난 다음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다른 사도들을 사제로 축성합니다. 이 또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모든 사도들이 하나 되어 이제 전 교회가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체성사가 거행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성체성사, 그리고 교회 생활과 사명의 원천과 중심이 되는 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인 사제들을 축성하는 신품성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성체성사가 교회를 만들고 교회는 성체성사를 만드는데 그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이 바로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사제 없이 성체성사가 있을 수 없으며 사제가 없으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목요일 마지막 저녁만찬에서 성체성사과 신품성사를 세우시고 나서 예수님은 올리브산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서 피땀을 흘리시며 고뇌에 가득 찬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 이후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배반자 유다를 앞세우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해 갑니다. 대사제 안나와 가야파의 집에서 밤새도록 거짓 심문과 주먹질과 조롱을 받으신 예수님은 다음날 아침 일찍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로 보내져 본격적인 재판을 받게 됩니다.
   성금요일입니다. 빌라도에게 엉터리 재판을 받으신 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까지 드러날 정도의 심한 매질을 당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쓴 채 온갖 조롱을 받으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를 보시고 먼저 그것을 끌어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 골고타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물론 이 기도는 직접적으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인들과 그분을 조롱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과 원로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 이전과 이후의 모든 세대 전 인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의 대상에 우리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단 한번만 이 기도를 바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대사제들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내내 이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모님 역시 영으로 하나 되어 예수님과 함께 이 기도를 바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이번 달 메시지에서 그분은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선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승리하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그분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악을 선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분들 안에서 또 그분들 주변에서 선이 승리하도록 마음안에 오직 선만을 품고 계셨고, 악이 가장 기승을 부리는 그 순간에 선이 승리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직접 체험하셨던 성모님께서 우리도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 없이, 그분의 사랑 없이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류를 위해 기도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성금요일 저녁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은 돌무덤에 안장되었고 흩어졌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이 성체성사가 세워졌던 그 다락방이 있는 집에 모였습니다. 성모님 홀로 밖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셨던 빌라도의 관저부터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천천히 걸으시면서 그분이 넘어지시고 피를 흘리셨던 장소에서 멈추시며 그곳에 입을 맞추십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갈바리아산까지 오르십니다.
   성토요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제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그분에게 예고하셨던 대로 성모님께서는 밤 11시에 갈바리아산 정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직접 걸으셨던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을 다 체험하셨지만 성금요일부터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4처의 십자가의 길을 바치지만 성모님께서는 몽소승천하기 전 9년 동안 사셨던 터키 에페소 셀죽의 집 뒤에 12처의 십자가의 길을 마련해 놓고 매일 그곳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셨고 우리 가톨릭 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사순절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한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우리 삶으로 옮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가 되고 빛이 되며,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번 달 메시지 앞 부분에서 성모님은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아예 ‘기도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가 되고 빛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적인 의탁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특별히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바치셨던 기도가 언제나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 우리 주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아주 작은 일에서조차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며 그를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야 그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우리 신앙과 하느님 자비를 자연스럽게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24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사랑 그리고 펼쳐진 나의 손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닮은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을 닮아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절제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선보다는 악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다가 사탄이 온갖 유혹과 거짓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죄짓게 하고 악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선하게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지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 몸에 밴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을 청하고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굴에 뭐가 묻어 있는지, 머리가 제대로 단정하게 되어 있는지, 혹은 옷은 제대로 입었는지 등을 살피기 위해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듯이, 기도라는 영적 거울을 통해 우리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선한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악한 것은 과감하게 도려낼 수 있도록 매일매일 양심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의식적으로 그런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는, 우리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선을 품고 우리의 행동으로 그 선을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 직장, 학교, 성당, 이웃, 사회, 국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우리 마음의 쇄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 19-20) 고 하셨기에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 모두를 다 마음 밖으로 들어내고 그 자리에 좋은 생각들, 사랑, 자비, 용서, 헌신, 절제, 인내 등과 같은 선한 것들을 새로이 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쇄신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쇄신은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 26)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했는데도 기쁨의 열매,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가 선이라고 믿고 뿌렸던 그 선이 진정한 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선처럼 보이지만 그 동기가 자기 자신의 만족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전혀 식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이목을 끌기 위해 행한 것이라면 거기에서는 참된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가 절대로 맺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뿌리는 모든 선의 씨앗은 그 동기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순수하고 아무 사심 없는 마음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 1-4) 이 시편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 숨은 생각까지도 다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가 감언이설이나 포장된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만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또한 심지어 잠깐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그것 역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 26)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감추어진 것은 끝내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올 수 없고, 팥 심은 데서 콩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뿌린 선이 진정한 선이고 거기에 기도와 마음의 쇄신이 더해진다면 그 선은 분명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사랑 그리고 펼쳐진 나의 손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마태오 13장 20-30절에서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어지는 36-43절에서 그 비유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밀밭에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종말 때에 이 가라지를 다 태워버릴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밀을 보호하기 위해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는 것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 나라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한 자의 자녀들까지도 참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즉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동안 메시지에서 단 한번도 쓰신 적이 없는 단어를 이번 달 메시지에서 처음으로 쓰셨습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가라지’ 입니다.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 즉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사람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뒤흔들어 그들 마음 안에 선한 열매가 맺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도 죄를 짓고 악하게 살면서 마치 전혀 그러지 않은 것처럼 꾸미고 교묘하게, 혹은 대놓고 남을 죄 짓게 하는 사람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적지 않게 많습니다. 그리고 그 폐해가 무척 크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라지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빛, 사랑 그리고 펼쳐진 성모님의 손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비록 가라지가 판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은 여전히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 미움이 아니라 사랑, 그리고 성모님을 대신하여 성모님의 손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도와주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들이 되라고 간청하십니다.

   
 
 
2024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기도의 때가 되기 바란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기도의 때가 되기 바란다.

2024년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주어진 이번 달 성모님 메시지는 아주 짧습니다. 단 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메시지를 처음 접했을 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한 문장으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들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집, 직장, 건강, 자동차, 음식, 옷 혹은 그 외 어떤 것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공간과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그것들이 분명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2024년을 시작하시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기도’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직장도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데 기도를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이 시기를 기도의 때가 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아주 똑 떨어지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찬찬히 읽고 묵상해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25-34)
   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면 우리에게 필요한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 생활했지만 아주 오래 전에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겼던 한 성인의 삶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지난 1월 17일은 성 안토니오 성인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그는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내지 스무 살 정도였고 가사와 여동생의 양육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주일 날 성당에 가던 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세주를 따랐는가? 또 사도행전이 말해 주는 대로 무엇 때문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나온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는가?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크고 위대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당에 들어갔는데 그때 막 복음이 봉독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 21)
   안토니오는 성당에서 나온 즉시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소유지 약 37만평 전부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동산 전부를 처분한 돈 가운데 여동생을 위해 약간만 남겨 두고 상당한 액수가 되는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음 번 성당에 갔을 때, 그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이 담긴 마태오 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위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후 성당에서 나와 남겨 둔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여동생을 잘 알고 있던 믿을 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기고 거기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근처에서 고행 생활을 시작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 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 기억하며 손수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번 수입 중에서 약간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또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 6)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고 하신 말씀에 따라 오랜 시간 기도하고, 그 내용을 모두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3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으며,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리울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동과 극기와 기도로 주님을 따랐던 안토니오 성인은 모든 성경 말씀을 살고자 했지만, 특별히 평생 동안 마태오 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평화의 모후께서는 한 발현목격증인을 통해 매주 목요일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바로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무엇을 통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은 그 답이 바로 ‘기도’ 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면 밥이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입을 옷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마실 물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적으로 혹은 독점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신 섭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의 때입니다!

   
 
 
2023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평화이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마음을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도록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라.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그분은 너희 각자에게 그분 자신을 매일 주시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아라." 오늘 성대하게 차려 입으신 성모님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오셨다. 성모님이 우리를 향해 아람어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표징으로 그분의 팔을 벌리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평화이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마음을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도록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대림과 사순 시기 밖의 모든 주일, 대축일과 축일, 그리고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전례를 거행할 때 성령 안에 함께 모여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양께 영광을 드리고 간구하는 대영광송을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이 대영광송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저는 미사 중에 이 부분을 노래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예수님 탄생 때의 베들레헴으로 향해 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이 말씀이 첫 번째 성탄, 즉 2천년 전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 앞에서 하느님을 찬양했던 찬미가였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이 짧은 찬미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성모님의 몸을 통해 아기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라고 말하는 하늘 군대의 찬미가 뒷부분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평화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찬미가 뒷부분은 아무나 그 평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 즉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그 평화가 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한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며 하느님의 계명과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지만 그를 받기 위해 먼저 회개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이후 이어진 공생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여러 기적들을 통해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갈릴래아 지역의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 고을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 21-24)
   이렇게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인류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당신의 어머니를 마지막 시대의 ‘천상 예언자’로 이 땅에 보내고 계십니다.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발현하고 계시는 메주고리예 성모님께서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통해 인류를 회개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인류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과 평화를 얻을 수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다음 성모님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초대한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너희에게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1996년 2월 25일)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라.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그분은 너희 각자에게 그분 자신을 매일 주시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아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소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 마음은 수많은 생각과 걱정들 때문에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 같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모님께서는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침묵하기 위해 내적인 고요를 찾아야 하지만 그에 앞서 외적인 침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침묵하려고 해도 외적인 소음이 계속되고 있을 때는 절대로 집중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침묵을 방해하는 외적인 소음을 먼저 제거하거나 차단하고 마음으로 침묵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맞는 시간과 장소를 정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정해야 합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 시간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기와 선택 그리고 헌신이 있어야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며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어느 곳일까요? 그곳은 바로 성당입니다. 성당 안에 성체가 현시되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앉아 사랑의 눈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경배한다면 우리 마음은 저절로 침묵을 지키게 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 마음과 영혼 안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성체 앞으로 나가 마음의 침묵을 지키면서 그분을 조배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성체조배도 무척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사 참례입니다. 미사는 가장 최고의 완전한 기도이기에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한 만큼 매일미사도 참례해야 합니다. 사제를 통해 매일미사 때마다 새롭게 우리 가운데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며 심지어 그분을 우리 몸 안에 모실 수 있는 그 엄청난 기적이 매일 우리 성당의 미사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27.35.51)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청원합니다. 예수님은 매일미사 때마다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매일같이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오십니다. 매일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성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매일미사 참례를 하루 중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로 정합시다. 

오늘 성대하게 차려 입으신 성모님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오셨다. 성모님이 우리를 향해 아람어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표징으로 그분의 팔을 벌리셨다.

1984년 3월 1일부터 성모님께서 공식적으로 메시지를 주기 시작하셨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메시지 뒤에 성모님 발현 광경을 묘사하는 글이 공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야고보 본당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번 2023년 12월 25일 메시지 뒤에 위와 같은 광경 묘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기에 성모님께서 이것을 당신의 메시지와 함께 첨부하도록 마련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발현목격증인 비츠카는 성모님이 어떻게 생기셨느냐고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모님은 매우 아름다운 파란 색 눈을 지니셨고, 머리칼은 검은색인데 약간 곱슬거리며 키는 자신보다 약간 더 크시다고 대답했습니다. 비츠카의 말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에는 언제나 앞서 밝은 빛이 나타나고, 성모님께서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긴 회색 드레스를 입으시고 흰 베일을 쓰고 계시며 머리 주위에는 늘 12개의 별이 왕관처럼 둘러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축일에는 종종 황금색 옷을 입으시고 황금색 베일을 쓰시며 많은 보석으로 장식하기도 하십니다.
비츠카가 증언한 바와 같이 이번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성모님께서는 장엄하고 성대한 옷차림으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오셨습니다. 보통 성모님께서는 발현목격증인들에게 그들의 언어인 크로아티어로 말씀하시고 그 언어로 함께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모님께서 메시지 수령자인 발현목격증인 마리야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시면서 아람어를 쓰셨기에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람어는 성모님이 지상에 계실 때 쓰시던 그분의 모국어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언어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2천년 이상이 지난 지금 왜 성모님은 굳이 아람어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을까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혹시 ‘당신이 몸소 아람어를 쓰시던 당시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그 옛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첫 성탄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메주고리예는 사람들 마음에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시도록 만들어 주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번 성탄절에 아람어로 기도해 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또 이번 달 메시지에서 특이했던 점은 성모님께서 보통 메시지 끝에 붙이시는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역시 의아했는데 12월 25일 같은 날 야콥 촐로에게 연간 발현하시면서 주신 메시지 끝에 이 문구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이번 달 메시지와 야콥을 통해 주신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야를 통해 주신 공식적인 월간 메시지와 야콥을 통해 주신 연간 메시지를 함께 읽으면서 이번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성모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는지 그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는 내 아들과 함께, 너희 마음의 치유를 위해 어린 아기 예수님께 기도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싶다. 자녀들아, 너희 삶을 파괴하는 죄가 종종 너희 마음을 지배하기에 너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이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는 이 은총의 날에, 너희 삶과 마음을 주님께 의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은총으로 그 모두를 치유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만 예수님의 탄생을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 탄생의 빛이 너희 삶을 비추어 줄 것이다. 나는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2023년 12월 25일 야콥 촐로에게 주신 연간 메시지)

   
 
 
2023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와 어우러지게 하여라. 그러면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기쁨이 너희 마음, 가정 그리고 희망이 없는 세상 안에서 느껴지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와 어우러지게 하여라.

지난 10월 메시지에서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성모님께서 이번 달에는 “이 때가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와 어우러지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메시지의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와 선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평화와 선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에게서만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평화와 모든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선물들을 내려 주시도록 겸손하고 간절하게 바치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면서 그들에게 선행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때,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 위해 평화와 선의 선물을 내려 주십니다. 
   날이 춥습니다. 이 추운 날씨를 견디며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옷을 두텁게 입고 장갑을 비롯한 여러 장비로 우리의 몸을 단단히 감싸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는 지금 이 때’를 견디어 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모님께서 그 답을 주셨습니다. 바로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두텁고 단단하게 무장하여 지금 이 때와 어우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우리 몸을 영적인 갑옷으로 두르고 손에 영적인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기쁨이 너희 마음, 가정 그리고 희망이 없는 세상 안에서 느껴지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현재 세 명의 발현목격증인 마리야, 비츠카 그리고 이반에게 매일 발현하고 계십니다. 이 세 사람의 발현목격증인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이 있는 지역 시간에 맞추어 하절기인 6월에서 9월말까지는 오후 6시 40분경, 동절기인 10월부터 5월말까지는 오후 5시 40분경에 매일 성모님 발현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마리야가 매월 25일 성모님 메시지를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데 이번 달 역시 11월 25일에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메시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마리야가 이번 달 메시지를 받았던 11월 25일 오후 5시 40분경은 이미 세상 곳곳에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특전미사가 봉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미국 시간으로 11월 25일 토요일 오후 4시에 대축일 특전미사를 봉헌하고 제 사무실로 돌아와 이번 달 메시지를 확인하고 바로 우리말로 번역했고, 우리 평화의 모후 사도회는 그를 홈페이지에 올리고 이메일과 카톡으로 많은 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11월 26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지만 그 전날인 11월 25일 저녁부터 이미 이 대축일은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이 대축일에 성모님은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 누리, 즉 우주의 왕이십니다. 이날 미사의 감사송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이렇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그리고 정의와 사랑의 왕이시지만 무엇보다도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평화의 왕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분명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다시 오심을 굳게 믿고 우리의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안에 그분을 기다리는 기쁨이 생깁니다. 아무런 기도 없이 막연히 그분을 기다리거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안에 그분을 기다리는 기쁨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으로 기도하고, 모든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가정 기도를 바치며, 사랑하는 당신 자녀들인 세상 모든 사람들 역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3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 그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이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 그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이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고통을 당했고, 그 피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또 하나의 큰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입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준군사 조직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수천발의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를 응징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며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며 기본적인 생필품도 없는 가운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 역시 하마스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여파는 이웃 중동 나라들과 온 세계 곳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넘실대며 이곳 저곳으로 불어가듯이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전쟁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마인 그는 악과 증오를 퍼뜨리고 평화와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집단들, 가정 그리고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조차도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에 덧붙여 사탄은 각종 대중매체들과 인터넷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 등을 통해서 사람들 정신과 마음속에 악과 증오를 증폭시키고 평화를 깨뜨리며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구의 어느 한 두 곳이 아니라 지구 전역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생명들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서 불고 있는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을 바라다보고 계시는 성모님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수많은 인명 피해 상황 뉴스를 아무런 감흥 없이 남의 일처럼 바라다보고 있는 시청자와 같은 입장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고 부상당하고 극한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비탄 속에서 통곡하시며 그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는 어머니이시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실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이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악과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을 막아내고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특사로 세상에 파견되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회개하게 되며, 그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참평화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가까이 가고, 그분과 하나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한 정치인들의 대화와 타협, 외교적 노력 등을 절대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로는 진정한 평화를 이 땅에서 구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 평화는 절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말 ‘사탄’은 ‘디아볼로’라는 그리스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사탄의 그리스말인 ‘디아볼로’는 그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 ‘디아볼로’는 ‘분열시키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처럼 사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분열시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하나가 되고, 서로 일치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전역에서 불고 있는 이 지구로 보내시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 5)라고 말하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과 달리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앞에 자신을 한껏 낮추셨습니다. 성모님께서 호칭하시는 대로 우리가 그분의 ‘어린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과 같은 겸손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겸손을 바탕으로 성모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모두 행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우리를 단순한 도구나 종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분신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펼쳐진 손인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그 어떤 재능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성모님의 분신으로서 어머니를 도와 세상 구원과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마음과 실천할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2023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근대주의는 너희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너희에게서 기도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정 안에서 기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밤낮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며, 하늘이 침묵하지 않고 이 은총의 장소에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렸던 초창기 그날들에 그랬던 것처럼, 이 어머니의 마음이 기쁨에 넘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근대주의는 너희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너희에게서 기도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대충 대충해서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땀 흘리고 노력해야 그 결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부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도를 잘 하게 되거나 믿음이 깊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높은 성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힘을 다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하던 기도의 자세나 양보다 더 특별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기도에 더 큰 관심과 노력 그리고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에 힘을 다한다는 것은 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에 전념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까? 근대주의의 위협 때문입니다. 근대주의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전통이나 권위 등에 반대하여, 근대의 과학이나 문화에 의해서 자유 평등한 근대인으로서 살아가려는 개인주의의 입장입니다. 왜 성모님은 이 근대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그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간의 이성만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근대주의는 너희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너희에게서 기도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 위에서 말한 근대주의가 우리 생각 속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기에 하느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과 신비는 이 세상과 인간의 삶 속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자신만의 문명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근대주의는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과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의 중심인데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 근대주의에 따르면 기도는 낡은 구태이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신비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인간은 참 인간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 그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늘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이성, 즉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 생명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대주의는 탈신화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 아니라 그저 높은 경지의 도덕 교사나 예언자 정도로만 인식됩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아니라 그 옛날에 왔다가 가버린 한 사람의 현인으로 인식되기에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근대주의가 우리에게서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정 안에서 기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밤낮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며, 하늘이 침묵하지 않고 이 은총의 장소에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렸던 초창기 그날들에 그랬던 것처럼, 이 어머니의 마음이 기쁨에 넘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1981년 메주고리예 발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가정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린아이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가 가정의 첫 자리를 차지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사탄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인간 사회의 기초이고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인 가정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가족들이 함께 기도를 해야 그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게 되고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이 기도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분명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초창기부터 끊임없이 가족이 함께 모여 가정 안에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정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가정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가정 기도를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우리 가정 안에서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적어도 매주 한 번씩 모여 함께 기도하고, 매주 한 번씩 하고 있다면 그 횟수를 더욱 늘려 매일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 기도가 하나의 형식적인 습관이 되어 있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열성과 진지함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가정 안에서 기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발현 초창기에 성모님께서 가족이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하라고 했을 때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 신자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과 마을에서는 밤낮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은총의 장소에 평화와 축복이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를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정도 그렇게 함께 기도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은총의 장소가 되고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기를 바라십니다. 세상과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인 우리 가정이 새롭게 기도함으로써 근대주의와 그 뒤에 있는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가정과 세상 그리고 교회를 지켜 내기를 원하십니다. 기도의 힘, 특별히 가정 기도의 힘을 믿고 그를 실천에 옮기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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