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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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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 너희가 그들과의 일치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와 기도를 청하여라. 성인들이 너희의 모범이 되고 전구자가 되어, 너희가 그들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 너희가 그들과의 일치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와 기도를 청하여라.

    교회는 매년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그런데 이번 10월 25일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날을 특정하지 않고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성모님께서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을 7일 동안 갖고, 그 이후에도 여유를 두어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도록 초대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단 하루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특별한 날을 앞뒤로 넉넉한 시간을 두고 깊이 경축함으로써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지속적이고 깊이 있게 새기고, 이를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많은 성인들이 있습니다. 일부는 시성 절차를 통해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또 일부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다가 천국에 든 비공식적인 성인들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있는지 정확한 숫자는 집계되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은 그 말 그대로 ‘거룩한 사람’을 뜻합니다. 성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지상에서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성인이 되어 천국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상에서 누구보다도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 44)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생전에 스스로를 거룩하게 가꾸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사람들, 즉 성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속한 삶을 살고자 했으며,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살되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성인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으며, 늘 하느님과 그분이 계신 천국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흠 없이 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죄의 기회를 피하려 했고, 혹여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죄를 지었다면 즉시 고해성사를 통해 회개했습니다.
    성인들은 육적인 욕망이 아닌 영적인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영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매일 미사와 성체조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성경 읽기, 잦은 고해성사, 묵상과 관상, 그리고 짧고 강렬한 화살 기도 등을 통해 가능한 모든 시간을 영적 훈련에 쏟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이와 같은 노력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성인들은 지금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 이 지상에 살면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거기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 속에서 하루 종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을 믿습니다. 이는 하느님 안에서 지상에서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연옥에서 정화의 시기를 겪고 있는 영혼들, 그리고 이미 승리하여 천국에 있는 성인들이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통교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우리와 일치해 있으며, 천국에 있는 성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준비해 두신 최고의 지원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모든 성인의 날을 경축하는 이 시기에, 너희가 그들과의 일치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와 기도를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진정한 평화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전구가 힘을 모을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분들의 전구와 기도의 힘을 신뢰하고 청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무엇을 망설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성인들이 너희의 모범이 되고 전구자가 되어, 너희가 그들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인들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곧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기도, 단식, 자선, 희생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참하느님이시자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전부였으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언제나 천국을 그리워하며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아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의 성화를 보면 손에 십자가를 들고 있거나 성화 한쪽에 해골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천국의 영원한 삶만을 갈망했던 성인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거룩함의 모범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모범적인 삶을 따르게 된다면 성인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함의 길을 보여주고, 성인으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의 전구자입니다. 그분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들의 주된 임무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들처럼 오직 주님만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주님 보시기에 순수하고 영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분들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전구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모든 성인들은 우리의 모범이자 훌륭한 전구자가 되어 줍니다. 그들의 모범을 따르고 그들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성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2024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은, 너희를 사랑하시고 기도와 회개로 격려하시기 위함이다. 어린 자녀들아,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 너희의 평화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은, 너희를 사랑하시고 기도와 회개로 격려하시기 위함이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 발현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메신저이자 예언자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메주고리예에 보내시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발현하게 하셨기에, 하느님 없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 자신, 가정,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도와 회개로 격려하고자 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깨닫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도 단 한 가지입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은 그 단어, ‘기도’입니다.
지난 43년 동안 성모님께서는 한 번도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오랫동안 기도를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만 빼고 우리가 원하는 다른 모든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해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회개가 이루어지며,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시기를 알지 못하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그 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과 그 메시지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알아보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라고 고백했던 우도처럼,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절박함을 가지고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호소에 응답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 너희의 평화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성모님께서 그 방법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이 말씀은 기도가 참된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이 평화 자체이시고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에, 그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는 길은 우리가 하느님께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평화를 주시도록 청할 수 있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힘이나 능력으로는 그 평화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는 절대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인류는 잊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평화이시며,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참된 평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024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너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어머니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공동 기도 지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다른 수많은 기도 지향이 있을 수 있으나 성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며, 6월 25일 메시지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서 평화를 앗아가려고 하는 사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몸소 우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든든한 말씀입니까? 우리의 미약한 기도에 성모님의 강력한 기도가 더해진다면, 그 기도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기도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 지향들에 앞서 항상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가장 중요한 지향으로 두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 지향의 우선순위를 조정함으로써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평화와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너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기를 바란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희망과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희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존재하시고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절망과 비탄에서 구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받아들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볼 때 그 어떠한 해결책이나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희망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큰 어려움이나 절망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도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합니다. 여기서 오상의 비오 성인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며 희망하십시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세상 만물, 아니 우주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 37)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깊은 신뢰, 즉 믿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드리고 그분을 굳게 믿는다면,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1, 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를 살게 해 주고(요한 11, 25 참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요한 6, 47 참조)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도록, 어머니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탄은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관계를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와 이 세상의 평화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이 세상이 평화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평화의 모후로서 이 세상에 오신 성모님께서는 발현 셋째 날, 즉 1981년 6월 26일 메주고리예에서의 첫 번째 발현지인 포드브르도(발현산)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신 후, 산을 내려가던 마리야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평화, 평화, 오직 평화만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야는 성모님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았는데, 성모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고 두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43년 이상이 지난 2024년 8월 25일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께서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평화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너희 안에, 그리고 너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 평화가 없다면, 우리 주변에 평화를 가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평화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평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가 가득할 수 있도록 성모님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어머니 마리아의 축복을 늘 청합시다.


   
 
 
2024년 7월 25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기쁘게 너희를 선택하고 너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어린 자녀들인 너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기도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것이고 내가 너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의도가 바로 이 의도이기 때문에 너희와 너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기쁘게 너희를 선택하고 너희를 이끌고 있는 것은, 어린 자녀들인 너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기도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거의 모든 메시지를 주실 때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는 말로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그 앞에 “나의” 라는 소유격을 붙이셨습니다. 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이번 달 메시지가 주어지기 3일 전인 7월 22일에 축일을 지냈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주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갔던 그녀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울고 있을 때 왜 울고 있느냐고 묻는 두 천사의 질문에 그녀가 한 답변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 13) 
그녀는 그냥 “누가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하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저의” 라는 소유격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저의 주님”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그 말을 통해서 자신이 그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사랑과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은 가까이하기에 멀리 계신 그런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온 마음을 차지하시고, 자신과 하나가 되어 계시는 그런 인격적인 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한 분이었습니다. 
   분명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우리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하시는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표현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기쁘게 희생하며 일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은 우리를 기쁘게 선택하셨고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이유를 우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기도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모르지만 성모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마도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모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과 희망 그리고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성모님의 인도와 도움을 청해야 하고 성모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것이고 내가 너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단순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께 속한 귀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속해 있다는 이 사실은 우리의 존엄성을 한껏 드높여줍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이 소속감은 우리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우주의 여왕,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선택하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이와 더불어 당신이 우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자부심을 가지기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고 그분의 것이며 전적으로 그분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몫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몫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당신의 발치에 앉아 온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를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2)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진리를 발견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죽거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모님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의도가 바로 이 의도이기 때문에 너희와 너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성모님은 그 하느님의 명에 의해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성모님은 그분의 메신저로서 당신이 이 세상에 왜 오고 계시는지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의도가 바로 이 의도이기 때문에 너희와 너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평화의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고 굳게 믿고 회개하며 희생과 보속의 삶을 살도록 수많은 메시지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초대하며 부르고 계십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이 초대와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 가장 좋은 몫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인도되고,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평화가 승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024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하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인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것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하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인도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오늘은 성모님 메주고리예 발현 43주년 기념일입니다. 43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성모님은 매일 발현하셨고, 지금도 세 사람의 발현목격증인인 마리야, 이반 그리고 비츠카를 통해 그 매일 발현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성모님 발현은 역사상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고, 앞으로 지상에서 이와 같은 발현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것이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성모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43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성모님의 발현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모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고 그 외적 표징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가장 잘 알아듣고 그에 가장 완전하게 순명하시는 분은 성모님 밖에 없습니다.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계획과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그 실현을 위해 일하는 당신의 특사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특사로 이 땅에 오고 계시지만, 메주고리예 발현에는 성모님의 자발성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분 역시 당신의 자녀들인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 모두가 구원과 평화를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한번도 멈추신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메주고리예 발현 43주년 기념일인 오늘도 역시 성모님은 우리들을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만민의 어머니이신 그분께는 자녀의 인종, 언어, 종교, 피부색, 지위 등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엄청난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성모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당신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성모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 45 참조) 하느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기뻐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성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그리고 온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성모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도 어머니와 함께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들처럼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거룩함과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길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모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허락해 주신 결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느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려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성모님께서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고 가정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누가 평화를 위험에 빠뜨리고, 누가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쟁과 증오를 부추기고 세상을 파멸시키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탄과 그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이 바로 그 범인입니다. 이들의 계획과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기도와 단식 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성모님은 “가정에서 기도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것은 가정을 영적인 요새로 만드는 일입니다. 가족이 함께 기도할 때 사탄이 그 가정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기도할 때 그 가정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의 집, 곧 작은 가정 교회가 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당에 감실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또 다른 작은 교회인 가정에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곳, 눈에 잘 띄는 곳에 성경을 두면 그것을 통해 그 가정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시각적으로 매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펴서 매일 가족이 함께 읽으면 우리의 영과 마음과 삶이 바뀝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구원과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담겨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읽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공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일 성경을 펴고 읽으면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과 영혼에 태어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충만해지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당신의 능력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하게 하셨던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과 영혼 안에 예수님의 모습을 새겨 주시도록 간절히 청합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것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어느 날엔가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날이 언젠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날은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 하루조차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하루만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오늘 하루 중에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다른 일상을 하면서도 미사 참례, 묵주기도, 성경 읽기, 묵상, 십자가의 길 바치기, 성체조배, 자선적인 봉사 등을 하고 저녁을 맞이하여 다시금 무릎을 꿇고 그렇게 하루를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그런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짧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성공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삶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나 풀과 같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언제나 그 자리에 영원히 계시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외적으로 표현했던 우리의 모든 행위만이 남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이 단순하지만 가장 확고한 진리를 믿고 그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살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고 초대하십니다. 내일로 미루거나 다른 시간이나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오늘 이 순간부터 성모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합시다.


   
 
 
2024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회개하고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 말씀대로 지금 이 시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우리가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살아 가면서 그 힘으로 그분께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이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라고, 즉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 마음을 드리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우리 마음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만 속해 있어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차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우리 삶의 맨첫자리에 놓으라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우리 각자가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서로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기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이러한 기도 모임의 첫 단위는 바로 가정입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기도하면 거기서 바로 기도 모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 기도 모임을 통해 가족들이 서로에게 좋을 일을 행하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며 함께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과 성모님 안에서 기쁨을 느끼며 성장해 나갑니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없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비록 함께 기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가족이 다른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의 힘이 다른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믿고 가족들이 각각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금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가족 일원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해 준다면 그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도 모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 세 사람일지라도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그 청원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모아 한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기를 버리고 철저하게 이타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 모임 구성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바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를 먼저 생각하는 이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것 없이는 기도 모임이 존립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롭게 회개하고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일까요?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 그리고 우리 자신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한눈을 팔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하느님께로 향하는 작업, 즉 회개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매일의 양심성찰과 매달의 고해성사가 우리의 계속되는 회개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모님 말씀대로 거룩함과 희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 마음으로 기도하고,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죄를 피해야 합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지상의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가까이 있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024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죽음과 증오를 선택한 이들을 통해 날마다 그의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죽음과 증오를 선택한 이들을 통해 날마다 그의 힘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조건 이긴다.’는 뜻입니다. 어떤 싸움에서든지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이 누구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싸움을 하지만 특별히 우리는 매일같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적 싸움의 대상, 즉 우리의 적은 바로 사탄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주적 사탄은 분명 존재하고 우리와 이 세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심지어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마저도 파괴하려고 온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자신의 존재를 가리우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고, 그럴 듯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와 영향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달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지 곳곳에서 성모님은 사탄이 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증오를 선택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자신을 내맡겨 그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 몸집을 더 크게 키우고 악한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합니다. 
    사탄이 그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 더 강해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강력한 연합군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연합군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증오를 선택함으로써 사탄의 군대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생명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성모님의 군대에 합류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어머니 군대의 한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적 군대의 지휘관이시며 총사령관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사탄과 그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신이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조건 이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적인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고, 큰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며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고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를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1-39)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혹시라도 우리가 이 사실을 잊고 우리 자신이 마치 하느님이나 된 것처럼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늘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탄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 8)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그분의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매년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 사제는 우리 머리 위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하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이를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보다는 악을 선택하여 죄를 짓곤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한 이야기가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루카 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36-50)
    이 이야기에서 죄인인 여인은 비록 죄 중에 살고 있었지만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가 살고 있는 고을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 자리였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녀를 위해 그 집에 가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님께서 창녀와 세리를 비롯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이 초대받으신 바리사이의 집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발치 뒤쪽에 서서 울며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리고 나서 향유를 발라드리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회개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비록 죄인이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녀의 참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달리 바리사이 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눈으로 죄인인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를 여전히 죄인으로 단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기 위해 그분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죄 중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죄라는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그들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양심의 불이 계속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다고 해서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고 우리처럼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 어린 자녀들아, 어둠 속에서 우리 하느님의 빛을 찾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4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선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승리하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여라. 하느님 없이, 그분의 사랑 없이 방황하는 이 인류를 위해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가 되고 빛이 되며,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선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승리하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여라. 하느님 없이, 그분의 사랑 없이 방황하는 이 인류를 위해 기도하여라.

통상 교회 전례력에 따르면 3월 25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그러나 3월 25일인 오늘, 교회는 날짜를 이동하여 오늘이 아니라 4월 8일에 이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기점으로 성주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성주간의 둘째 날인 오늘,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시기’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은총의 때이지만 특별히 성모님께서는 이 성주간을 염두에 두고 ‘이 은총의 시기’ 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주간은 우리 신앙의 신비의 가장 중심적인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때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은총이 충만한 때입니다. 
   성주간 시작 첫 날인 어제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군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고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분을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 가는 이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 9-10)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고 그분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예컨대 힘과 권력으로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열두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왕으로 등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그 길만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고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목요일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예루살렘 성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시온산의 어느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시며 성체성사와 신품성사를 세우셨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들고 그것들을 당신의 몸과 피로 축성해서 사도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성유를 축성하신 다음 그 기름을 가지고 일단 사도 베드로와 요한만을 대표로 사제로 축성하시면서 신품성사를 세우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도들에게 직접 신품성사를 주시지 않은 것은 아마도 유다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그러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곧 배반을 실행에 옮기고 자살한 운명인 유다를 사제로 만들지 않으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나중에 예수님 승천 후 성령 강림이 있고 난 다음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다른 사도들을 사제로 축성합니다. 이 또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모든 사도들이 하나 되어 이제 전 교회가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체성사가 거행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성체성사, 그리고 교회 생활과 사명의 원천과 중심이 되는 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인 사제들을 축성하는 신품성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성체성사가 교회를 만들고 교회는 성체성사를 만드는데 그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이 바로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사제 없이 성체성사가 있을 수 없으며 사제가 없으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목요일 마지막 저녁만찬에서 성체성사과 신품성사를 세우시고 나서 예수님은 올리브산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서 피땀을 흘리시며 고뇌에 가득 찬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 이후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배반자 유다를 앞세우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해 갑니다. 대사제 안나와 가야파의 집에서 밤새도록 거짓 심문과 주먹질과 조롱을 받으신 예수님은 다음날 아침 일찍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로 보내져 본격적인 재판을 받게 됩니다.
   성금요일입니다. 빌라도에게 엉터리 재판을 받으신 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까지 드러날 정도의 심한 매질을 당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쓴 채 온갖 조롱을 받으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를 보시고 먼저 그것을 끌어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 골고타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물론 이 기도는 직접적으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인들과 그분을 조롱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과 원로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 이전과 이후의 모든 세대 전 인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의 대상에 우리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단 한번만 이 기도를 바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대사제들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내내 이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모님 역시 영으로 하나 되어 예수님과 함께 이 기도를 바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이번 달 메시지에서 그분은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선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승리하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그분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악을 선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분들 안에서 또 그분들 주변에서 선이 승리하도록 마음안에 오직 선만을 품고 계셨고, 악이 가장 기승을 부리는 그 순간에 선이 승리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직접 체험하셨던 성모님께서 우리도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 없이, 그분의 사랑 없이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류를 위해 기도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성금요일 저녁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은 돌무덤에 안장되었고 흩어졌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이 성체성사가 세워졌던 그 다락방이 있는 집에 모였습니다. 성모님 홀로 밖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셨던 빌라도의 관저부터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천천히 걸으시면서 그분이 넘어지시고 피를 흘리셨던 장소에서 멈추시며 그곳에 입을 맞추십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갈바리아산까지 오르십니다.
   성토요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제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그분에게 예고하셨던 대로 성모님께서는 밤 11시에 갈바리아산 정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직접 걸으셨던 성모님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을 다 체험하셨지만 성금요일부터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4처의 십자가의 길을 바치지만 성모님께서는 몽소승천하기 전 9년 동안 사셨던 터키 에페소 셀죽의 집 뒤에 12처의 십자가의 길을 마련해 놓고 매일 그곳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셨고 우리 가톨릭 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사순절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한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우리 삶으로 옮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가 되고 빛이 되며,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번 달 메시지 앞 부분에서 성모님은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아예 ‘기도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가 되고 빛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적인 의탁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특별히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바치셨던 기도가 언제나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 우리 주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아주 작은 일에서조차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며 그를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야 그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우리 신앙과 하느님 자비를 자연스럽게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24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사랑 그리고 펼쳐진 나의 손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닮은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을 닮아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절제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선보다는 악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다가 사탄이 온갖 유혹과 거짓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죄짓게 하고 악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선하게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지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 몸에 밴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을 청하고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굴에 뭐가 묻어 있는지, 머리가 제대로 단정하게 되어 있는지, 혹은 옷은 제대로 입었는지 등을 살피기 위해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듯이, 기도라는 영적 거울을 통해 우리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선한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악한 것은 과감하게 도려낼 수 있도록 매일매일 양심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의식적으로 그런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는, 우리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선을 품고 우리의 행동으로 그 선을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 직장, 학교, 성당, 이웃, 사회, 국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우리 마음의 쇄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 19-20) 고 하셨기에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 모두를 다 마음 밖으로 들어내고 그 자리에 좋은 생각들, 사랑, 자비, 용서, 헌신, 절제, 인내 등과 같은 선한 것들을 새로이 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쇄신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쇄신은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 26)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했는데도 기쁨의 열매,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가 선이라고 믿고 뿌렸던 그 선이 진정한 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선처럼 보이지만 그 동기가 자기 자신의 만족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전혀 식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이목을 끌기 위해 행한 것이라면 거기에서는 참된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가 절대로 맺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뿌리는 모든 선의 씨앗은 그 동기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순수하고 아무 사심 없는 마음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 1-4) 이 시편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 숨은 생각까지도 다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가 감언이설이나 포장된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만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또한 심지어 잠깐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그것 역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 26)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감추어진 것은 끝내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올 수 없고, 팥 심은 데서 콩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뿌린 선이 진정한 선이고 거기에 기도와 마음의 쇄신이 더해진다면 그 선은 분명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사랑 그리고 펼쳐진 나의 손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마태오 13장 20-30절에서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어지는 36-43절에서 그 비유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밀밭에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종말 때에 이 가라지를 다 태워버릴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밀을 보호하기 위해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는 것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 나라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한 자의 자녀들까지도 참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즉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동안 메시지에서 단 한번도 쓰신 적이 없는 단어를 이번 달 메시지에서 처음으로 쓰셨습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가라지’ 입니다.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 즉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사람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뒤흔들어 그들 마음 안에 선한 열매가 맺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도 죄를 짓고 악하게 살면서 마치 전혀 그러지 않은 것처럼 꾸미고 교묘하게, 혹은 대놓고 남을 죄 짓게 하는 사람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적지 않게 많습니다. 그리고 그 폐해가 무척 크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라지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빛, 사랑 그리고 펼쳐진 성모님의 손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비록 가라지가 판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은 여전히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 미움이 아니라 사랑, 그리고 성모님을 대신하여 성모님의 손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도와주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들이 되라고 간청하십니다.

   
 
 
2024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기도의 때가 되기 바란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기도의 때가 되기 바란다.

2024년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주어진 이번 달 성모님 메시지는 아주 짧습니다. 단 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메시지를 처음 접했을 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한 문장으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들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집, 직장, 건강, 자동차, 음식, 옷 혹은 그 외 어떤 것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공간과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그것들이 분명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2024년을 시작하시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기도’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직장도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데 기도를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이 시기를 기도의 때가 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아주 똑 떨어지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찬찬히 읽고 묵상해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25-34)
   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면 우리에게 필요한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 생활했지만 아주 오래 전에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겼던 한 성인의 삶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지난 1월 17일은 성 안토니오 성인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그는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내지 스무 살 정도였고 가사와 여동생의 양육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주일 날 성당에 가던 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세주를 따랐는가? 또 사도행전이 말해 주는 대로 무엇 때문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나온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는가?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크고 위대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당에 들어갔는데 그때 막 복음이 봉독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 21)
   안토니오는 성당에서 나온 즉시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소유지 약 37만평 전부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동산 전부를 처분한 돈 가운데 여동생을 위해 약간만 남겨 두고 상당한 액수가 되는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음 번 성당에 갔을 때, 그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이 담긴 마태오 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위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후 성당에서 나와 남겨 둔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여동생을 잘 알고 있던 믿을 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기고 거기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근처에서 고행 생활을 시작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 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 기억하며 손수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번 수입 중에서 약간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또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 6)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고 하신 말씀에 따라 오랜 시간 기도하고, 그 내용을 모두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3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으며,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리울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동과 극기와 기도로 주님을 따랐던 안토니오 성인은 모든 성경 말씀을 살고자 했지만, 특별히 평생 동안 마태오 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평화의 모후께서는 한 발현목격증인을 통해 매주 목요일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바로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무엇을 통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은 그 답이 바로 ‘기도’ 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면 밥이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입을 옷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마실 물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적으로 혹은 독점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신 섭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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