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며, 그들에게서 태어난 첫 형제는 카인과 아벨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우 아벨의 제물만을 기꺼이 굽어보시자 분노를 품게 됩니다. 그는 아우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결국 그를 죽입니다. 그 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하며 모른다고 잡아뗍니다(창세 4,3-9 참조).
이 성경 이야기는 형제 사이의 갈등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함께 공존해야 하고, 서로의 생명과 안위를 지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구약성경 안에서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표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여겨 ‘야훼’ 대신 ‘엘로힘’이나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곧 인류 전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나의 대가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나 전례 안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이기에, 그로 인해 우리는 당연히 서로 형제자매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다면,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결코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그 가운데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 또한 하느님과 성모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 가정의 한 일원으로서 그들에 대해 형제적 책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형제적 책임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성모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위해 한 번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축복 안에 언제나 그들이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지향은 나 자신과 내 가정을 넘어, 세상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특히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사랑을 체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의 안녕과 축복만을 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세상 모든 이가 행복과 평화 안에서 살아가며 하느님의 축복이 언제나 그들 위에 머물도록 청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들이 되어, 너희의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라.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성모님 메시지 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평신도들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의 바리사이라 불리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참된 정신보다는 자신의 의로움과 신심을 앞세우며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3,1-36 참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하실 때, 그 말씀 안에는 오늘날의 새로운 바리사이가 되지 말라는 경고 또한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세상 안에서도 스스로를 남들과 다르다 여기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오늘날에도 존재하듯, 바리사이 또한 오늘날 우리 안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다름’은 그러한 다름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말투에서, 태도에서, 심지어 걸음걸이와 뒷모습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우리 자신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서도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될 때, 우리는 쉽게 또 다른 바리사이가 될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의 삶에도 선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과 평화에 이르도록 초대받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든지 아름답고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참되다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증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말보다 삶이 더 큰 힘을 지니며, 사랑으로 살아낸 삶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오래 지속되는 힘을 발휘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삶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는 나의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며,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요즈음 성모님께서는 메시지의 끝에서 이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축복하시고 전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 말씀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지금 더 큰 축복과 전구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전보다 더 힘겹고 어려운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겨움과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 안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며 예수님 앞에서 전구해 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너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 그분께서 너희를 사랑의 열정과 평화로 가득 채우시어, 이 은총의 때에 모든 마음이 그분의 성심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러면 이 은총의 때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너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
예수님의 성탄절인 오늘,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너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시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당신의 품에 안고 우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시며 현재형을 사용하십니다.
분명 예수님의 성탄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성탄은 지금도 매번 새롭게 이루어지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그분께는 모든 것이 언제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과거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다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경배합니다.
옛날 그러하셨던 것처럼, 성모님께서는 이번 성탄에도 평화의 왕이신 당신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우리에게 모셔 오십니다. 이 성탄에 필요한 것은 크리스마스트리나 카드, 선물 교환이나 파티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없이 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미래도, 희망도, 영원한 생명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분을 이번 성탄에 우리에게 모셔 오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던 목자들처럼, 우리 역시 구유와 감실과 십자가가 있는 성당으로 달려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깊이 경배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성당입니다. 성당에는 그분이 태어나신 구유, 매 미사 때 그분께서 새롭게 육화되시는 제대, 그분의 몸이 모셔져 있는 감실, 십자가와 말씀 등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사제가 그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절에, 이 성당은 우리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가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은, 성모님과 사제를 통해 매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활짝 열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도 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만 열리고 그분께만 매이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너희를 사랑의 열정과 평화로 가득 채우시어, 이 은총의 때에 모든 마음이 그분의 성심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 탄생 때,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이 찬미 안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이 찬미를 가장 먼저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던 사람들, 곧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과 하늘 군대의 찬미를 듣고, 예수님의 탄생과 그 표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본 것을 그대로 믿었으며, 자신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쁨 속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메주고리예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 발현을 통해, 매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 제대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시며 성체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표징으로 믿고 받아들였던 그들처럼, 우리는 하얀 작은 빵의 형상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표징으로 굳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지녔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을 지니도록,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끝은 우리 마음의 완전한 변화, 곧 예수님의 성심을 닮는 데까지 이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의 열정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성심을 닮게 된다면,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러면 이 은총의 때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방어하고 지켜야 합니다. 생명과 안전, 권리와 재산에 위협이 닥칠 때,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섭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너희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하고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수호하라는 이 말씀은, 그 사랑이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며 심지어 박해받고 있다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이 현실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고 말한 요한 복음사가는, 자기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에 비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사랑을 수호하기 위해 단호하다는 것은, 이 사랑과 맞서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타협도, 혼합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시어 수많은 박해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진리이시기에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셨고, 그 사랑을 끝까지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전하고 증언하며 지켜야 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증거하기를 바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26-32)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나를 따르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하지 않고, 지극히 높으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와 기쁨을 원하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월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에 가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장을 보는 젊은 엄마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엄마가 물건을 고르거나 잡기 위해 잠시 아이의 손을 놓는 순간, 아이는 금세 다른 곳에 눈길을 빼앗겨 그쪽으로 아장거리며 달려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엄마는 다시 그쪽으로 가서 아이를 데려와 손을 잡고, 다음 물건이 있는 곳으로 함께 이동합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메시지에서 우리를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를 더 실감하게 됩니다. 어리다는 것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미성숙하여 분별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나를 따르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여전히 그분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따르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혹하게 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성모님, 기도, 그 외 거룩하고 천상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물질, 사람, 혹은 세상의 것들입니까?
현재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고 있습니까? 성모님의 손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손입니까? 혹시 지금 우리가 물질이나 세상의 것, 악이나 죄, 그리고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성모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이 우리에게 은총의 때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은총의 때를 주신다고 해도, 성모님을 따라가면서 그 은총의 때를 주시는 하느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 은총의 때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 지극히 높으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와 기쁨을 원하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성모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자녀가 기도하고, 오직 지극히 높으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와 기쁨을 원하며, 성모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성모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성모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너희의 영혼이 기다림의 기쁨 속에서 하나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11월 25일, 오늘은 화요일입니다. 우리는 이틀 전인 11월 23일에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인 ‘온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주일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너희의 영혼이 기다림의 기쁨 속에서 하나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전례적 시점을 염두에 두신 것으로 보입니다.
‘대림(待臨)’은 기다림을 뜻하는 한자어입니다. 대림절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성탄)을 기억하고, 나아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이루어질 그분의 두 번째 오심(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 대림절 동안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우리를 위해 지상에서 이루셨던 구원을 완성하려 다시 오실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기쁨 속에서 그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다시 오실 그분께 향해야 하며, 오직 그분께 향해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주님과 하나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을 살기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며 애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결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이 지상에서 주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다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영혼은 주님과 늘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참된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축복해 주실 것임을 너희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선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어 있을 때,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을 때만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 4-5)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잊고, 주님 없이 우리의 인간적인 힘과 의지, 그리고 계획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모든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잘되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편 저자의 말씀을 늘 우리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 1, 1-3)
너희가 베푸는 선이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며, 너희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쁨이 너희의 마음을 감싸안을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세상 만물을 먼저 만들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환경과 조건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으로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처럼 선을 베푸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아까워서 마지못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으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베푼 선을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조차 가지지 않을 때, 그 선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선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우리 생애에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하늘에 보화를 쌓았기에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쁨이 너희의 마음을 감싸안을 것이다.” 하신 성모님의 말씀은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인데, 그 기쁨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술, 마약, 육체적 쾌락, 돈, 그 외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결코 기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주는 기쁨은 아주 일시적이며, 오히려 그 이후에 더 깊은 슬픔과 불안을 가져다줍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늘 기뻐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가장 심오한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현재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방향을 가르쳐 주시고 방법도 제시해 주시지만, 결코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부름에 자발적으로 응답했을 때 감사를 표하십니다. 우리의 선택과 응답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데, 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응답했을 때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분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분의 선하심으로, 너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내어 주셨다. 많은 이들이 이에 응답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분의 선하심으로, 너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내어 주셨다. 많은 이들이 이에 응답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오심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기에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의 전반부, 즉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라는 부분에 새롭게 주목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 안의 “외아들을 내 주시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라고 해도 될 법한데, 왜 굳이 ‘내 주시어’라고 표현했을까요? ‘보내 주다’와 ‘내 주다’는 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보내신다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세상에 파견되어 주어진 사명을 완수한 뒤 다시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즉, 그분의 소유권이 여전히 하느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내어 주신다는 것은 그분을 단순히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우리에게 내어 맡기신 분,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진 분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전부를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지만, 그분은 여전히 우리 편이 되시어, 임마누엘 하느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무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28-39).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신 것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 안에서 우리에게 성모님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회개를 위해 보내신 하느님의 예언자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선물, 곧 평화의 모후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온전히 내어 주어진 분이십니다.
메주고리예의 성모님은 단순히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자애로운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를 예수님께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주님 예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이에 응답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성모님께서는 지난 44년 4개월 동안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가 너희의 삶이 될 때까지 마음으로 기도하여라.”
성모님께서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기도의 길로 초대하시는 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참된 평화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분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에 응답한 많은 이들이 기도의 삶 안에서 평화를 체험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모님께서 수없이 부르시며 초대하시는 기도의 길, 평화의 길에 아직도 응답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먼저 응답한 우리가 기도 모임을 이루어 함께 기도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선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기도 모임을 만들어라”는 말씀 안에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라”는 뜻, 그리고 “규칙적으로, 꾸준히 기도하라”는 초대가 담겨 있습니다.
부부든, 가족이든, 교우든—누구라도 두 사람 이상이 모여 매일 혹은 매주, 매달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모임을 이룬다면, 그 기도는 홀로 드리는 기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함께 드리는 기도는 혼자 드릴 때보다 훨씬 더 쉽고, 지치지 않으며,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온 세상이 하나의 큰 기도 모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범적인 모습을, 지금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직접 보여 주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홀로 기도할 때에도, 또 모임을 이루어 함께 기도할 때에도, 성모님은 그 자리에 함께하시며 우리와 더불어 기도하십니다.
이처럼 성모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학교’가 매일 열리고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 성모님은 우리의 스승이 되시어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매일 성모님과 함께 기도의 수업을 들으며,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매일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완전히 변화시켜 새로운 존재, 곧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물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예외적인 회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회개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것도 바로 이 회개입니다.
성모님은 1996년 2월 25일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회개로 초대한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너희에게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이렇듯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회개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회개의 여정에 함께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위해 직접 기도하고 계십니다. 마치 높은 담을 넘으려 애쓰는 이에게 누군가가 밑에서 밀어주어 마침내 담을 넘게 하듯,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로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가 완전한 회개에 이르도록 힘을 주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내어 주신 성모님,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모님, 이렇게 우리 편이 되어 늘 곁에 계신 성모님이 계신데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평화를 누리고 사랑의 하느님을 알아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때가 너희에게 평화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때가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짧고 간단한 메시지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모님께서 왜 지금 이 시대에, 메주고리예를 통해 세상에 오고 계시는지를 보여 주는 근본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평화가 사라진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1981년 6월 24일 메주고리예에서 첫 발현을 시작하신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평화, 평화만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그 후 성모님께서는 수많은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평화를 얻으려면, 평화 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의 핵심 주제들―기도, 회개, 신앙, 보속―은 모두 그 정점에서 평화를 지향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도하고 회개하며 믿고 희생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로레토의 성모 호칭기도 마지막 호칭이 ‘평화의 모후’로 끝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마치 평화의 모후로 오신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발현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칭호를 받으시기 훨씬 전부터 이미 평화의 모후이셨습니다.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천상 군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주시러 오신 평화의 임금이심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이미 그때부터 평화의 모후이셨음은 너무도 당연한 결론입니다.
평화의 임금을 세상에 모셔오셨던 평화의 모후께서는 오늘날 다시 우리에게 평화의 임금을 모셔 오시며,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발현이 시작된 지 44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러하였고, 발현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이를 끊임없이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이라 부르시고, 또 “사도들”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이자 사도로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전부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 외의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으며, 우리가 먼저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다음 우리의 사명은 그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범적인 삶과 언어로 평화를 전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평화가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평화를 간직하고, 진실로 그 평화를 살며 전할 때에만 비로소 그 평화는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범적인 삶과 언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개입으로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에서 “지금 이때가 평화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과 가정, 이웃과 공동체, 모든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와 온 세상에 참된 평화가 깃들도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나의 사랑하는 이들아! 너희가 선택받은 것은 너희가 응답하였고, 내 가르침을 실천하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내 말이 이루어지도록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여라. 단식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너희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여라. 그리고 어린 자녀들아,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위한 나의 펼쳐진 손길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나의 사랑하는 이들아! 너희가 선택받은 것은 너희가 응답하였고, 내 가르침을 실천하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거의 모든 메시지를 “사랑하는 자녀들아”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시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는 여기에 “어린 자녀들아” 혹은 “나의 어린 자녀들아”라는 표현을 덧붙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메시지처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나의 사랑하는 이들아!” 하고 세 차례나 연이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부르셨을까요? 아마도 완전수인3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성모님의 사랑이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지 곳곳에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특별히 2009년 3월 18일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에게 있은 연간 발현 때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이다.”
성모님은 우리 육신의 어머니와 달리 천상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천상적인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한계가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들이 죄 중에 있고 당신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 자신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를 알아듣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끊임없이 사랑으로 부르고 계시는 그 어머니의 부르심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며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실만큼 세상에서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무엇이기에 하느님과 그분의 어머니 성모님의 선택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영예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선택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는 말씀으로 끝맺는 마태오 복음 22장 1-14절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보듯, 하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 계획과 일을 먼저 택하여 그 부르심을 외면합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택받은 이유가,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응답했기 때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나의 사랑하는 이들아!” 하고 끊임없이 부르실 때, 어린 사무엘처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하고 응답하며 마음을 열어 그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서 우리의 선택은 시작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택받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처음에 성모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마음을 활짝 열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였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귀하고 훌륭한 것이라도 다듬고 정리하여 실제로 쓸모 있게 만들어야 비로소 값어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실천에 옮겨 자기 삶의 일부로 삼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은 우리 안에서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성모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그 실천의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선택받았음을 드러내는 참된 표징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두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합니다. 곧 성모님을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마음을 열어 응답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그분 사랑의 무한함을 체험하며, 그 은총의 힘으로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것에도 우리의 마음과 삶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평화와 영원한 생명은 물론 모든 것을 소유한 이들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지난 44년 동안 한결같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삶의 첫자리에 모시고,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라고 거듭 가르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내 말이 이루어지도록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여라. 단식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너희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여라. 그리고 어린 자녀들아,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위한 나의 펼쳐진 손길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모든 것은 기도로 시작되어 기도로 완성됩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아, 내 말이 이루어지도록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여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온 마음을 다해 드리는 기도 앞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하시는 말씀 또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만일 ‘과연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이 든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진정으로 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특히 단식을 통해 사랑 안에서 희생하는 법을 배우며,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존재 전체와 생명의 참된 주인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기 위해, 단식을 통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로써 진정한 사랑을 배우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할 때, 우리는 성모님의 마지막 권고이신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위한 나의 펼쳐진 손길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인류 구원 계획 안에서 우리가 중요한 존재이자 역할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 주시며, 그 구원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 이루기 위해 다시 한번 우리를 초대하시고, 당신의 펼쳐진 손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위한 성모님의 펼쳐진 손길이 될 것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천상과 지상이 하나 되어 펼쳐지는 이 영적 전쟁에 선택되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일지라도 결코 흔하지 않은 이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 기꺼이 성모님의 펼쳐진 손이 되어 세상이 사랑의 하느님을 알도록 돕겠다고 다짐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거룩함의 길로 이끌도록 허락하신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불안과 증오의 사슬로 얽매려 하고 있다. 그가 승리하도록 허용하지 마라. 오히려 어린 자녀들아, 모든 생명의 거룩함을 위해 싸워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거룩함의 길로 이끌도록 허락하신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불안과 증오의 사슬로 얽매려 하고 있다.
제가 사목하고 있는 본당에는 ‘노아’라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있습니다. 노아는 제가 이 본당에 부임한 이후 태어난 아이라, 그 아이의 성장 과정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지켜보아 온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노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하실 만큼 신심 깊은 분들이시며, 어머니 역시 매우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노아는 어린 시절부터 정성 어린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올해 첫영성체를 받은 노아는 최근 미사 복사로도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 주일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 와서, 미사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례하거나 복사로 봉사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인상 깊습니다.
그런 노아의 모습은 언제나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여름 방학이 시작된 요즘에는 평일에도 시간이 될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노아는 어머니 손을 잡고 미사에 참석했는데, 미사 도중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며, 경건하게 참여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깊은 신앙 안에서 아름답게 자라나는 노아의 모습은 제게 큰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자의 모습 안에서 저는 성모님과 우리의 관계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시며, 하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부르시며, 깊은 애정으로 우리를 감싸시고,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메시지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부르시며, 당신의 사랑과 인도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이번 메시지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성모님의 그 모든 사랑과 인도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마치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하러 온 천사 가브리엘 앞에서 “보십시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셨던 그 순간처럼, 지금도 여전히, 아니 영원히, 성모님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거룩함의 길로 이끄시는 성모님의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도 선한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밝히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에 두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거나 자신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과 모든 순간에 모든 공로를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께 돌리며, 그분께만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거룩함의 길로 이끄시며, 마침내 구원과 평화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우리를 끌고 가려 합니다. 그는 우리를 불안과 증오의 사슬로 얽어매어 사랑과 평화, 그리고 구원을 앗아가려 합니다. 또한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하느님과 성모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이웃과의 불화 속에 머물게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가 승리하도록 허용하지 마라. 오히려 어린 자녀들아, 모든 생명의 거룩함을 위해 싸워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탄이 승리하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그에게 우리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그의 존재와 활동을 인식하고, 단호하게 “너는 내 마음과 내 삶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한다면, 사탄은 결코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한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가 승리하도록 허용하지 마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과 성모님만이 우리 안에서 승리하시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들께 “예”라고 응답하며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그 생명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그분 생명의 숨결을 받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안에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본질을 이루는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거룩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파괴되어야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간 안에 깃든 거룩함을 회복시키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에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성모님을 보내시어, 모든 생명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우리를 초대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계십니다.
이번 달 성모님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사명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하고, 모든 생명의 거룩함을 위해 용기 있게 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의 주님이시며 거룩함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편에 서서, 생명과 거룩함을 지키고 실현해 나가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앞에서는 언제나 ‘예’라고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모님, 우리의 어머니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 뒤에 계시기에, 우리는 사탄과 그의 어떤 공격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내가 너희와 함께하며, 너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 인도할 수 있음을 전능하신 분께 감사드린다.
오늘은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44주년 기념일입니다. 44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오신 성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모님께서는 이토록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신 것일까요? 오늘 주신 메시지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 인도하시기 위해 성모님께서는 지난 4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 곁에 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께서는 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 인도하려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더욱이, 성모님의 눈에 우리는 여전히 어린 자녀들이기에, 그만큼 더 많은 보호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며, 기도하고 믿으며 회개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단식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법을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 인도할 수 있음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다시금, 메주고리예 발현의 주체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성모님께서 그러하시듯,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 인도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44년 동안, 성모님을 당신의 예언자요, 우리의 어머니요, 영적인 스승으로 보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그리고 그 발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실 하느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너희와 너희의 영적인 삶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들은 덧없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너희에게 미래와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난 44년 동안,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수많은 메시지 안에서 단 한 번도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사회나 체계의 근간이 되는 사상적 틀을 의미하며, 인간과 사회, 역사, 세계를 해석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체계적이고 집단적인 신념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용어는 종종 정치적 목적이나 지배 논리와 연결되어 사용되곤 합니다. 자본주의,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족주의 등은 모두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으셨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와 너희의 영적인 삶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들은 덧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의 영적인 삶을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하느님 대신 돈이나 재물, 물질, 권력, 힘 등을 거짓된 신처럼 섬기게 만드는 모든 사상과 태도는, 결국 우리와 우리의 영적인 삶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결국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그것들에 빼앗기지 말고, 참된 미래와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오직 한 분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간곡히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관련된 한 가지 일화가 떠오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교황님은 폴란드 출신이셨습니다. 폴란드 크라쿠프 대교구장이자 추기경이었던 카를 보이티와는 공산주의 정권 아래 있던 조국 폴란드의 현실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선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공식적으로 폴란드를 방문하셨고, 이는 공산주의 정권에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을 인간의 삶에서 밀어내려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맞서시며 그 종식을 위해 다방면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1989년, 냉전 시대의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동독과 서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고, 같은 해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의 공산 정권들도 잇따라 붕괴되었습니다. 폴란드 역시 이 역사적인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과 민주 정부의 수립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폴란드 국민 모두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한가운데서, 교황님은 또 다른 근심에 잠기셨습니다. 모든 것이 마치 해결된 듯 보였지만, 이제 민주화된 폴란드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됨에 따라 폴란드인들이 돈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며, 하느님을 뒷전으로 미룬 채 영적으로 나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영적인 눈으로 꿰뚫어보시는 교황님의 예언자적 통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황님의 그 우려는 시간이 지나며 상당 부분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고,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힘, 명예와 이 세상, 그리고 온갖 이데올로기들까지도 모두 덧없고,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만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할 때만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미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로 인도하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간곡히 호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지금은 참으로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 모두를 자녀로 사랑하시는 어머니께서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께서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우리 자신과 세상이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 있는 시기이기에, 분명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가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덕들을 우리 삶 안에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희망하고, 평화를 구하며, 기쁘게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덕들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충만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온전히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불안, 그리고 슬픔에 잠겨 있던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안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평화를 선물로 주셨으며,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먼저 희망과 평화,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참으로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자신이 먼저 변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타인에게 변화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우리 자신을 더욱 완고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로부터 부정적인 인상만을 받게 하여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사람들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 자신의 용기와 의탁의 성령의 힘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희망과 평화, 그리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명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더 큰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오는 힘을 기다리며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모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바로 그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온 교회가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사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비겁함을 모르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용기백배하였고, 박해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제 두 주가 지나면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보듯이,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모님을 중심으로 그분과 함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 모범을 따라, 성모님 곁에 모여 그분과 함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만일 바로 그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워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가 너희에게 선물이 되고, 거룩함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그분께서 반드시 오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령의 오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은 마땅하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와 준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이며, 그것만으로 성령의 강림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에게 자유롭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불화, 이기심, 그리고 죄의 바람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불화와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과 기도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 마음 안에서도, 너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불화와 이기심, 그리고 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관계까지도 단절시킵니다. 그 결과 초래되는 것은 바로 불화와 멸망입니다. 이 참혹한 현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성모님께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 그 진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전해 주실 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은 마치 마음이 녹아내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일 것입니다. 자녀들이 불화와 멸망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통을 느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육신의 부모도 그러하거늘,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느끼시는 고통은 얼마나 더 깊고 애절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슬퍼하시며 경고하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십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과 기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다시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되찾고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단순하지만 깊은 부르심—‘하느님과 기도로 돌아가라’는 초대—를 우리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부르심은 단순하게 들릴 수 있으나, 불화와 멸망에 이르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부터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 자체이시며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평화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그렇습니다. 우리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그분의 계획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도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믿음과 그분을 향한 사랑을 보시고, 모든 것을 친히 안배하시며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그분의 가르침과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땅 위에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짐을 체험한 시편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 1,1-3).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회개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은 피로를 모릅니다.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지난 43년 10개월 동안 단 한순간도 피로하거나 지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치지 않고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성모님의 사랑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깊이 염려하시는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고 있는지—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