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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체험 나눔
 
작성일 : 14-03-10 10:59
나의 첫 번째 메주고리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892  
나의 첫 번째 메주고리예

김민지 소화 데레사
(평화의 모후 음악 선교단 바이올린 주자)

바이올린.jpg



눈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린 11박12일이었다. 몸이 아프기도 했고, 사소한 것들에 의해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시궁창과도 같았던, 멈춰 서서 보듬을 틈도 없이 비참했던 지친 내 영혼이 잠시 오아시스를 만나고 온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의 육신이 아닌 영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바라봐주고 용서해주고 뜨겁게 안아주었다. 내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은총을 주셨다. 사색, 명상, 묵상...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해본 적 없이 30년을 살아왔다는 게 기가 좀 찼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 자신을 똑바로 알게 하시고 용기 내어 용서의 문을 두드릴 수 있게 해주신 성모님께 그저 감사드릴뿐이다. 
     
솔직히 처음엔 아무 기대도 않고 스케줄을 잡고 여행가는 기분으로 짐을 쌌다. 설렘보단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좀더 컸다. 사랑하는 친구 글라라와 사비오 오빠, 재미있으신 회장님, 처음 뵈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은 글라라 어머님, 상기된 표정의 어르신들, 탤런트 이계인을 닮으신 친근한 인상의 신부님,, 공항에 하나 둘 모여든 순례객들과 출발 전 시작기도를 바치고 데레사 단장님의 당부말씀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무엇인가에 의한 작은 이끌림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서 사실 가이드 설명이나 지출 따위를 기록하려고 챙겼던 작은 수첩을 꺼내 비행기 안에서부터 일기를 쓰게 되었다. ‘설레임이 생겼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않겠다. 나를 부르셨다면 그냥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봉헌하겠다..’라며 첫 마음을 기도 드렸다.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온실속 화초처럼 살아온 여린 내게 지금처럼 힘들고 두려웠던 시간은 없었고 더 힘든 시간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고통을 피하지 않고 이런 내 모습도 인정하고 사랑해주고 싶은 것이 내가 순례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평온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정말 편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고요한 내면과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이렇게 기도 드린 후 나는 도착할 때까지 기절한 듯 고요히 숙면했다. 

아마도 벌써부터 기도의 응답에 시동이 걸린 듯 했다. 내게 성모님은 그렇게나 민첩하고 세심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성모님과 나의 어설픈 대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풍성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스스로에게 놀라고 성모님께 놀라는 은총의 시간으로 이어졌고, 지금도 그 따뜻한 온기 속에 하루하루를 웃음지으며 보내고 있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 웃기도 하고 혼잣말하며 성호를 그어대고... 냉소적이고 꽤나 까칠했던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내가 알고 있던 메주고리예는 대략 이런 곳이었다. 성모님 발현지이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어머니께서 전에 이곳에서 많은 성물을 안고 돌아오셨다. 평화의 모후 음악 선교단(평모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태어난 곳이다. 맛있는 파스타와 피자가 많다. 맨발로 오르는 돌산이 있다. 병자들이 치유 받았다. 야고보 성당이 있다....

도착하자마자 본 메주고리예는 일단 생각보다 훨씬 심하게 아름다웠다. 빌딩숲을 싫어하고 전원을 사랑하는 내게 이보다 더 아날로그적일 순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좀 많았다. 도착한 날은 유난했는데, 터키 관광과 긴 비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갔던 첫 미사는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비행기에서 드렸던 기도도 잊을뻔했다. 그러다 그날 밤 성시간 참례 때부터 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별이 총총 빛나는 푸른 밤, 풀밭에 앉아 듣는 익숙한 노래들... 참 촉촉했다. 이제 다시 온전히 내 안에, 그리고 주님께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메주고리예에서의 생활,.. 정성스럽게 조리해주는 처음 보는 요리들도 몽땅 맛있었고, 빡빡한 일정이었던 매 순간순간도 짧은 불평을 상쇄하는 기쁨이 되었다. 왜 그렇게 터질 만큼 기뻤을까? 왜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했을까? 그것은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온 평온이었다. 그렇게도 내게 말 걸고 싶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동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싶었다.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함께 웃었다. 기쁜 마음, 고백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플 정도니, 이것이 기적이고 신비라고 외칠 수 밖에 없겠다. 

가장 많이 기도하며 청했던 것은 겸손이었다. 교만이 부르는 무서운 죄악들을 떨쳐내고 씻어내고 싶었다. 내 자신이 부드럽고 여려 쓴 소리 못하는 것에 대해 겸손하다고 생각해왔던 것 자체가 교만이었다. 가식과 편견, 교만에 싸여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확신을 하게끔 한 것은 바로 체나콜로 공동체에 들르게 해주신 것이었다. 

체나콜로 방문은 순례 기간 중 가장 감동적이고 충격적이고 값진 경험이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그들의 고해성사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이 들었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선 맑은 빛이 흘러나왔고 눈빛은 차분하고 따뜻했다. 그 평온한 얼굴 자체가 내겐 큰 은총이 되었다. 그들의 수호천사들(앞서 들어와 치유된 마약중독자)은 행동으로 보여주어 자신들을 변화시켜준다고 했다. 주님께서도 내게 똑같이 해주고 계셨고, 나도 모든 이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유의지’라는 것...정말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결여된 삶을 살았고 익숙해져 버려 내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았고 속이는 줄도 모른 채 내 자신마저 속여왔다. 또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면 습관들을 떨치지 못할 것임에 두렵지만 이젠 그분의 은총을 믿는다. 나는 이곳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기적이 아님을 알았다.

돌산을 맨발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한국에서 스쳐 들었을 때 난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산에 오르던 날 우리 단장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협박수준의 심각한 적극추천을 하셨다. 망연자실한 나는 처음엔 무척 화가 났다. 왜 화가 치밀까 생각해보니 단장님께 반항심이 들어서가 아니라 나는 아주 편안한 것만 좋아하고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교만’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루 한가지씩 내가 질색하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고, 그날이 결심 셋째 날이었다. 그전에 실행했던 미션은 고작 ‘정말 귀찮은 손빨래’정도의 수준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했으므로 나는 오늘의 미션을 ‘맨발산행’으로 정하고 두 눈 질끈 감고 벌벌 떨면서 산에 올랐다. 예민한 내 불쌍한 발바닥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나니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부드러운 돌이 주는 온기에 발이 행복해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보다 앞서 밟아 매끈하게 만들어준 순례객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혼자 ‘기쁘다, 감사하다!’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십자가산을 오르던 날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라는 말씀이 들려와 가슴 벅차게 기뻤고, 오히려 좋아서 눈물이 맺혔다. 충분히 고통스럽고 힘겨워서 대성통곡을 해도 시원찮을 만큼 힘든 마음으로 왔는데도 순례 내내 나는 기쁨에 차있었다. 어느 날 홀로 눈물을 흘리며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난 결국 벅차 오르는 기쁨을 외쳐댔다, 터질 것 같아서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사 열심히 보고 수많은 피정에 참여하고 성서공부도 하고 나름 올바른 신앙 속에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이 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 또한 나의 교만으로 인한 참으로 얕은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또 다른 은총은 바로 성시간 연주였다. 첫날 풀밭 신자석에서 참여하고 규모에 놀라며 내가 이런 영광스러운 일을 3년 가까이 해오면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한편으론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솔직히 나는 바이올린을 어쩌다 보니 전공하게 되었고, 내가 간절히 원했던 적이 없다. 어머니의 성화에 밀려 대학까지 가고 보니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이 마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게 기대가 크셨던 교수님과 부모님을 실망시키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도 해왔던 것을 포기는 못하고.. 바이올린에게 질질 끌려가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왜 바이올린을 굳이 시키셨을까, 내가 바이올린만 안 했어도 내 성격이 이렇게 예민하진 않았을 텐데, 가족들과도 더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더 안정된 직업도 있고 공부도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바이올린’만 아니었어도...!!’ 이 생각으로 십여 년을 우울해하며 살아왔다. 정말 바보구나 싶었다. 주님의 계획은 정말이지 놀랍고 치밀한 것이었다. ‘나를 도구로 쓰시려고’라는 생각을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바이올린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나의 소리로 사람들을 치유시키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연주를 듣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는 사람, 행복했다는 사람들의 몇 마디 말로, 그리고 연주하며 느껴지는 사랑의 에너지로 내자신도 치유 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번 메주고리예에서의 연주도 내게 치유의 시간이었다. 사실 연주자로서 모든 상황은 어찌 보면 최악이었다. 악기도 내 것이 아니었고 추운날 씨(바이올린은 두꺼운 옷을입고 연주가 불가능하다), 피곤한 일정, 리허설 없는 100% 즉흥 앙상블, 부담될 정도로 많은 관중들... 극도의 긴장감속에서도 그곳에 나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땐 몸도 떨리지 않았고, 손도 차갑지 않았으며, 눈을 감으면 성모님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평생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영적으로 가장 완벽한 무대였다.  

내 자신과의 충분한 시간을 가진 후 많이 망설이다 꼴찌로 본 고해성사는 무척 긴장되었다... 처음으로 주님께 내 상황에 대한 심정을 솔직히 말씀 드렸다. 신부님의 말씀에 내 상처는 위안을 받았다. 최선을 다했고 안했고를 떠나 그냥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계획이고, 또 다른 계획을 향해 준비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도, 힘들어하지도 말고 더 담대하게 설레이는 그분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막연히 안심이 되고 든든해졌다.

나는 최근 2년 동안 될 수 있으면 거울을 보지 않았다. 한심하고 안쓰러운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 자꾸 웃음이 나는 내 얼굴이 거울에 비춰졌을 때 오랜만에 한참을 샅샅이 훑어봤다. 참 예쁘고 소중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넌 보석보다 더 빛나는 귀한 존재니까 용기를 내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 지 2주가 흘렀다. 시간이 흐르니 예상했던 대로 또다시 교만이라는 사탄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횟수가 점점 잦아진다. 그곳에서 가장 큰 의지를 다지고 온 것이 가정 안에서의 메주고리예 실현이었는데 돌아와보니 그게 가장 어렵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가장 교만하고 경솔한 내 모습에 많은 반성을 하면서도 쉽게 사탄을 물리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믿어보려 한다. ‘함께 계시다’라는 것,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이제는 내 자신에게 당당할 만큼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더 확고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믿음에 ‘투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삶으로 살게 되는 그런 믿음, 좀더 진지하고 성숙된 믿음을 갖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더 많이 사랑해야 하고 모난 나 자신이 깎여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평모단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글라라와 함께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곳은 봄방학이 5월이다. 날짜는 매년 다른데 이번에 성지순례 날짜와 완전히 겹쳤기 때문에 우리 둘 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루라도 날짜가 어긋났다면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기회였다. 다시 한 번 성모님의 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용기 내어 순례를 갈 수 있게 도와주신 평모단의 플룻티스트 글라라 아줌마와 고통 중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주신 신경남 스테파노 신부님, 매일 굵은 소금과 같은 강론을 해주시고 발현에 대한 의심을 품었던 제게 믿음을 주신 박기호 신부님, 사랑과 평온이 흘러 넘쳐 우리 모두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시고 빛이 되어주셨던 도로테아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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