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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29 10:24
나의 회개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97  
나의 회개 이야기

린다 롤린스키

저의 남편 스탠이 우리 아들 엘렉스를 가톨릭 신자로 키우자고 했을 때 저는 “절대 안돼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파를 초월한” 그리스도 교회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고 평생을 개신교도들과 어울렸으며 가톨릭에 대한 아주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마추어 역사가였기 때문에 제 자신이 종교 재판을 포함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가톨릭 교회의 직권남용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986년 우리 친구 세실리아가 저에게 메주고리예에 관한 글을 건네주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가톨릭 신자가 된 웨인 와이블이라는 루터교 신자가 쓴 글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바바라 월터즈의 20/20라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프로그램은 복되신 성모님과 메주고리예 발현목격증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흥미롭게 보고 있던 중 바바라 월터즈가 발현목격증인 중 한 명인 비츠카를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보는 순간 저는 소리쳤습니다. “난 저 사람의 친구가 될 거야!” 그녀와 뭔가 통하는 것을 느꼈고, 그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메주고리예에 무척 끌렸습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우리 친구 세실리아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너무나 메주고리예에 가고 싶어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해서 같이 가자고 했지만 사실, 뭔가 새로운 곳이고 호기심 때문에 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가톨릭 광신도들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거기 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성모님이 정말 있는 건 아닐 거고, 저는 어떠한 “광신도들의 군중 심리”에도 휩쓸리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항공 마일리지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 4월에 우리 마일리지로 세실리아도 메주고리예에 데려갔습니다. 그녀의 가족이 독일 수용소에 있던 우리 남편과 시어머니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세실리아는 저에게 묵주를 사서 강복을 받고 가져가자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묵주기도하는 법이 적힌 작은 팜플렛도 가져갔습니다. 저는 “반복적인 기도”에 반대했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우리는 자정에 도착했는데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택시에서 내릴 때 제가 받은 느낌은 형언하기 힘듭니다. 이제는 그것이 완벽한 평화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엔 몰랐기 때문에 일부러 무시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아침을 먹고 영어 미사에 갔습니다. 영어 미사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그 전에 있는 독일어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세실리아는 (수용소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를 완벽하게 알아들었습니다. 저는 미사를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세어보니 37명의 사제가 미사를 공동 집전했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생각이나 개념이 없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참 이상했습니다. 성체를 꼭 모시고 싶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는데, 세실리아가 시키는 데로 손을 모아 성체를 받았습니다. 그 후 그 교회를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습니다… 아침 내내 온갖 언어로 미사가 줄을 이었고 다음 미사를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와서 십자가산에 올라갔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혹시 타고 올라갈 스키 곤돌라라 같은 거 없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숨을 돌리고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슬라브코 신부님 말씀을 들으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말씀이 끝나자 세실리아와 새로 알게 된 몇 사람들은 다시 산에 올라가고 싶어했습니다! 전 힘들어서 도저히 갈 수 없었고 세실리아에게 카메라를 주면서 사진을 몇 장 찍어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이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세실리아는 큰 십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 유해가 있는 곳). 그녀는 “기다리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찍어라”라는 소리가 들려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에 우린 발현산에 올라갔고 그날 밤 크로아티아어 미사에 갔습니다. 오후 6시 40분에 성모님이 여느 때처럼 교회의 성가대석에 발현하셨습니다. 저는 쳐다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기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쳐다보았습니다. 성모님이 오셨을 때 분명히 세 개의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카메라의 플래시도 아니었고 성모님이 떠나셨을 때도 세 개의 빛이 번쩍였습니다. 전 압도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누르면서 “광신도 군중 심리” 일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깼을 때 저의 은색 묵주가 금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메주고리예에 도착한 이래 황홀경에 빠져 있는 듯한 세실리아는 그 때도 행복해하며 울었습니다. 모든 강론이 그녀를 위한 것 같았습니다.  크로아시아어가 그녀의 모국어인 폴란드어와 그렇게 비슷한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일어 미사, 영어 미사. 그리고 크로아시아어 미사도 다 알아들었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가 되자 정말 싫었습니다. 메주고리예를 떠나야 한다는 슬픔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드브로브닉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 아기보다 더 심하게 엉엉 울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사진을 현상했습니다. 모든 게 ‘정상’이었는데 세실리아가 찍은 십자가 중의 하나만은 예외였습니다. 십자가 왼쪽에 짙은 파란 부분이 있었고 위쪽에 빛의 섬광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푸른 빛의 섬광 속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봅니다. 그런데 십자가 자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십자가 오른쪽은 선명한 노란 색이었습니다. 정말 너무나 놀랍고도 설명할 수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1987년 4월에 메주고리예에서 집에 돌아온 후 저는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안 가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10월에 휴가 계획을 세웠고 그렇게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거기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 한 다음 미사에 갔습니다…. 교회 뒤에 새로 만들어진 정자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이제 뭘 하지?” 발현목격증인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냥 기도하고 산에 올라가고 지루하게 보내야 하나?” 아직 전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았을 때였고 십자가의 길이나 다른 기도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자 느닷없이 한 영국인 부부가 “이반이 10분 후에 여기서 강연하는 것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답하면서 우리는 이반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점심을 먹으러 야외 카페로 슬슬 걸어갔습니다. 거기 앉아서 십자가산을 바라보며 다시 “아, 이제 뭘 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오더니 메주고리예에 처음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번째라고 하자 자신은 순례 가이드이며 열 일곱 번째 왔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끈 순례자들이 찍은 기적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길래 저도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제가 사진을 여러 장 가져왔으니 한 장 가져도 되느냐고 물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조 신부님을 보러 갈건 데 따라오겠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분이 누구냐고 묻자 제가 그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에 놀라며 그분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그 가이드를 따라 순례단과 함께 요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다음날, 제가 걷고 있을 때 또 느닷없이 어떤 순례자들이 “비츠카의 얘기를 들으러 가는데 같이 가시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따라갔지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들 같았어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저에게 말을 걸어왔고, 일주일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일주일 내내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요조 신부님을 만난 다음날, ‘순례 가이드 아주머니’가 오더니 제 사진이 그 팀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끄는 순례단에게 저녁 식사 때 저와 제 사진에 대해 얘기했더니 나이든 아주머니 한 분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진을 보여달라고 졸랐다고 합니다. 저녁을 마치고 계획에 따라 보여줄 때까지 기다리질 못했던 거지요. 그래서 가이드는 위층에 사진을 가지러 올라가보니 난로 열 때문에 불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커튼도 타고 있었고 모든 게 타버렸고 가이드가 간신히 불을 껐습니다. 모든 게 탔는데 그 사진만 괜찮았습니다. 불 한가운데 있어서 바로 타버렸어야 하는 건데, 타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마침내 제가 메주고리예에서 얼마나 잘 돌봄을 받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 생각이 충격처럼 다가와서 계속 눈물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성모님이 돌봐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고 아직도 그 모든 것에 압도되어 있습니다. 그 후 메주고리예에 갈 때마다 굉장히 많은 기적이 제게 일어났고 그 얘기를 다 하자면 책 한 권을 써야 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후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신자가 된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우연이 일어나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www.aqop.org, 『평화 MIR』, 2014년 3/4월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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