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 교회 역사는 창립 초기부터 박해의 역사입니다. 전 국토가 피로 축성된 순교자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최양업 신부님을 제외하고 이번 8월에 시복되시는 124위는 모두 순교자들입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고백에는 하느님께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았고, 만났고, 믿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의 여정에는 성모님의 사랑의 보살핌이 함께 하였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해서 미사성제와 성사 집전이 어려운 시기에 선교사들은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조선 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며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정사박해 순교자 이도기 바오로는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797년 이 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에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죽나 매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관장이 배교하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율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6월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주자, 이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 “성모님,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관변 기록에 남아있는 이도기 바오로의 최후 고백이 “성모하례”입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이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용기와 신덕이 성모님과 함께하는 의탁에서 오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모친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는 사형선고를 받고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 이성례 마리아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성모님께 맡겨드리고 모정을 넘어서는 순교로 천상 영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도는 십자가에 일치하는 희생과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간절함으로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천국을 향하는 신망애 삼덕의 기도를 통해 흠숭지례를 올려드렸습니다.
1845년 7월 23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상해에서 스승 리브와 신부님께 보낸 서간을 읽으면 조선에서 뱃길로 상해로 오는 길에 만난 풍랑과 역경을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탄 배는 바다에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작은 배였는데 폭풍우가 점점 심해지고 파도 때문에 몹시 까불리고 무섭게 내팽개쳐서 거의 침몰할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신자들은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탈진하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보고 절망하여 “이제는 다 끝났다.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다.”하고 서글피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다음으로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거센 물결에 키가 부러져 떠내려갔고, 배는 폭풍과 파도에 까불리며 대양으로 떠밀려 갔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의탁하고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비도 그치고 폭풍도 약해져 있었습니다. 지극히 영화로우신 우리 동정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배에 남아있던 나무를 있는 대로 다 거둬서 돛대와 키를 만들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절망의 죽음 앞에서 성모님께 간구하며 “여기 성모님이 계십니다.”라고 외치면서 어머니의 보호하심에 완전히 의탁하였습니다. 작은 배를 끌고 가던 큰 배들도 파선하여 모두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김대건 신부님 일행은 무사히 상해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45년 8월 17일 사제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 안에 뿌리 깊이 녹아 내린 화살기도는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는 기도였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위험하거나 힘든 상황에서 언제나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요셉 성인께 도움을 청하고 감사 드리며 기도를 생활화했습니다.
이도기 바오로 순교자의 마지막 말이 “성모님, 하례하나이다.”라고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성모님께 끊임없이 바쳐드린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기도가 하느님께 드리는 온전한 신뢰와 성모님께 자신을 맡겨드리는 “성모하례”라는 아름다운 말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거센 파도와 풍랑 앞에서도 용감하게 “여기 성모님이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역경 중에도 성모님께 의탁하는 오롯한 믿음의 신뢰가 필요합니다.
또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자녀들에게 남긴 영적 유산의 거룩한 당부는 이 시대의 부모님들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를 기다리라.”는 말씀은 많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의 길, 실천할 것은 형제애, 희망할 것은 복음적 기쁨임을 새겨 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으면서도 불렀던 예수, 마리아, 요셉을 신앙으로 새롭게 희망하며 사랑으로 부르고 싶은 축복의 8월입니다. 1968년 10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품에 오른 지 46년만의 시복식입니다. 이번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 땅에 오셔서 복자품에 올리실 하느님의 종 125위는 신해박해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입니다. 마지막 125위는 1888년의 순교자 윤봉문 요셉, 거제도의 회장 입니다. 거의 백 년의 박해 역사 안에 신앙을 이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의 증거를 온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시복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향해 나아가야 할 그 길을 걸어가신 순교자들을 기리며 성모님과 함께 지상의 나그네 여정을 성실하게 걸어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www.aqop.org, 『평화 MIR』, 2014년 7/8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