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가에서
이순종 안드레아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11월이 되면 떠남을 묵상하게 됩니다. 한 여름의 푸른 나무들이 낙엽이 되어 바람에 휘날리는 초겨울의 풍경은 떠남을 준비하게 하는 자연의 초대장과 같습니다. 수도생활은 떠남의 연속입니다. 소임지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다가 일정 기간이 되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믿음이 안주하는 것이 아닌 생명의 길을 따라 거듭 떠나야 하는 것처럼 떠남은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에제키엘 47장의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물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생명의 강가에 이르러 맛있는 열매를 맺고 모든 것을 생명으로 살려내는 생명의 강은 우리 모두가 희망하며 그리워하는 목적지라고 생각합니다. 에제키엘 47장은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점점 물이 깊어져서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되어 있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강에서 흐르는 생명수는 예수 성심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영원한 생명수입니다.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에제 47,12)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합니다. 자신의 사욕에 갇힌 마음은 탁해져서 영혼이 병드는 것과는 달리 흐르는 물은 생명이 됩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예수 성심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희생의 물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고집에 멈추어 서 있는 상황은 물이 고여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자신에게 떠남이 비움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어주는 마음으로 생명의 강가에 서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면서 낮은 곳으로 흘러 왔기 때문입니다. 내려가는 길은 만남의 길이기도 합니다. 여유 있게 작은 생명의 손짓에도 멈추어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한마디 말과 작은 나눔도 생명을 살리는 작은 잎이 되어, 약이 되어 줍니다.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마음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감사하며 두 손 모으는 겸손의 마음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생명의 강을 따라가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격려하고 지지하며 용기를 주며 ‘당신이 최고입니다’하며 엄지를 들어 올려 보이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생명의 강에 이르는 길은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서 12장의 구원받은 이들의 감사의 노래처럼 언제나 감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생명의 강가에 다다릅니다.
11월 떠남을 준비하며 기도합니다. 물리적 공간의 떠남만이 아니라 무섭게 고집하며 붙잡고 있는 자아에서의 떠남입니다. 내 마음의 샘에 있는 불평불만을 없애는 방법은 십자가를 마음의 샘에 담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갈대 바다를 떠나 물을 찾지 못하고 마라에서 물을 찾았지만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자 단 샘이 되었습니다. 쓴 물은 불평불만의 물입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따르지 않는 길은 쓴 맛을 내는 삶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은 희생과 침묵의 어머니이십니다. 십자가 아래 서 계신 어머니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았습니다. 성모님은 세상 끝날 때까지 예수 성심의 늑방에서 흘러내리는 은총의 샘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단 샘이 되어 바다이신 주님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깊이 내려가는 길은 겸손과 수용과 경청입니다. 그리고 단순함입니다.
오래 전 메주고리예 순례길에 만난 어린 요한이와 엄마가 생각납니다. 5월의 메주고리예는 작은 들꽃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요한이는 들꽃을 한 다발 들고 환한 웃음으로 “마마”, “마마”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요한이는 열두 살이었지만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어서 어린 아기와 같았습니다. 요한이 엄마는 숨어서 요한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요한이는 야고보 성당 앞에 있는 성모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마마하고 부르면서 성모님 발아래 들꽃을 바쳤습니다. 요한이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성모님이 이곳까지 요한이를 불러 주셨어요. 요한이가 성모님이 부르신 것을 알고 감사 드리는 것을 보니 한없이 눈물이 나네요.” 그 때 요한이 엄마는 생명의 강가에 서있는 아름다운 기도의 여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모습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우리의 여정은 어머니께로 향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요한이를 숨어서 지켜보며 뒤따라가던 모습에서 성모님의 마음을 만났습니다. 떠남의 시간을 준비하며 성모님의 사랑에 평화와 위안을 얻습니다.
올 해를 돌아봅니다. 내 마음의 샘이 쓴 물이 되어 이웃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다면 기도하며 단 샘이 되도록 십자가를 마음의 샘에 담그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생명의 강가에 머물기 위한 아름다운 떠남을 준비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www.aqop.org, 『평화 MIR』, 2014년 11/12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