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어메이징 그레이스 포 가톨릭 하트 (Amazing Grace for the Catholic Heart)’ (어센션 출판사)에서 발췌한 것이며 하느님 자비의 힘의 예를 보여줍니다.]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허름한 차림으로 걸어 다니며 타코를 먹으면서.. 웃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궁금했습니다. 1991년 멕시코시티에서 의학회의에 참석했다가 시간을 내서 과달루페 성모님 성지를 찾았습니다. 500년 된 선인장 섬유로 만든 농부의 망또에 있는 복되신 성모님 그림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제 주의를 끈 것은 성당 바깥에 몰려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플로리다에 권위 있는 병원을 가진 성공한 의사인 저는 행복해지는 게 이토록 어려운데 어떻게 저런 가난한 농부들은 기쁨이 넘치는 걸까?
전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돈, 지위, 물질의 소유, 소중한 가족이 있었지만 개인적인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멋진 아내와 세 아이가 있고 모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제 인생의 등대 불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사실 저는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 물질주의, 죽도록 일만 하는 생활 습관에 젖어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네 죄가 너를 찾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감사하게도 저의 죄로 인해 제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그걸 몰랐지만, 외도를 했다가 인생의 마지막 끈마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과 하느님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우선 꼬인 제 인생부터 풀어야 했습니다.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을 때 불안하고 우울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엉망인 과거를 가진 제가 아내와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 이 때 친구가 하느님 자비의 신심에 관한 책자를 주었습니다. 그 팜플렛에는 2000년에 새 천년 들어 처음 성인이 된 폴란드 수녀 파우스티나 성녀가 일기에 쓴 신비로운 경험이 있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그분의 헤아릴 수 없이 큰 자비를 받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죄가 큰 자일수록 나의 자비를 받을 권리가 더 크다.” (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723).” 후회와 감사가 압도해왔습니다. 괴로움의 눈물이 마치 죄의 상처에서 고름이 빠지듯 흘러나왔습니다. 그 말을 읽고 또 읽으며 깊은 죄의 늪에, 심지어 나에게마저도 도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느님 자비는 구명조끼처럼 저를 구해주었고, 비참한 바다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었습니다. 그 해1992년 말에 아내와 저는 상담을 받으며 서서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하느님 자비’를 전하는 일을. 우리 이야기를 전하며 사람들에게 ‘하느님 자비’와 성체 안에 정말 살아계시는 예수님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처음엔 병원 일과 사도직 봉사를 겸하다가 병원을 떠나라는 부름을 5년간 느꼈습니다. 의사 면허증을 반환한다고 의사협회에 편지를 쓰는 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이 저를 신체 치유의 사도직에서 또 다른 치유, 즉, 영혼 치유의 사도직으로 옮아가라고 부르심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을 뒤집어 놓을 일이었지만 아내와 저는 그 동안 저축해 놓은 것으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든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믿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95년 9월 9일 치유된 우리 결혼생활의 결실인 존 폴이 태어났습니다. 처음부터 좀 남달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새파래지면서 숨을 못 쉬고 목숨이 위태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고 존 폴은 곧 안정을 되찾더니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성체를 분배하는 친구가 우리 방에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어이, 어떻게 된 거야? 정말 하느님이 계시는 게 느껴지는데.”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축복하심을 느꼈습니다. 세 명의 우리 큰 아이들, 13살 안드레아, 11살 브라이언, 8살 패트리샤는 늘 의사의 자식에서 하느님께 봉사하는 단순한 삶에 몸바친 사람의 자식으로 변한 것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애들은 우리 부부의 새로워진 결혼생활, 제가 아버지의 임무를 성스러운 소명으로 받아들이며 의지를 가지고 임하게 되어 덕을 보았습니다.
그로부터 14 개월이 지난 11월 초에 컨퍼런스에 갔다가 새벽 일찍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 미사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거의 잠을 못 잤지만 일찍 일어나 바깥 일을 했습니다. 뒷마당 현관으로 나가 수영장 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어린 브라이언이 갑자기 앞마당에서 잔디 깎는 기계 시동 거는 걸 도와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걸 도와준 다음 안드레아를 수영연습에 데려다 줄 시간이라는 게 생각났습니다. 패트리샤와 함께 우린 차를 타고 급히 출발했습니다.
가고 있는데 브라이언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빠,” 아이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존 폴이 죽었어요. 누가 수영장 문을 열어놨어요.”
아내는 축 쳐진 존 폴을 발견했습니다. 숨도 멈췄고 심장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훈련된 간호사인 아내는 작은 14 개월짜리 존 폴의 몸에 생명력을 되돌리기 위해 이미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습니다.
저는 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했고 우리는 바로 성모송을 함께 바쳤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기도하면서 운전하여 돌아왔습니다.
“예수님, 존 폴과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소리쳤습니다. 제가 수영장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몸이 수영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죄책감이 엄습했습니다. 존 폴은 제 치유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아내와 저에게 희망의 아이였습니다. “예수님, 왜 그 애를 지금 우리에게서 데려가십니까?” 저는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 때 마음은 급한데 빨간색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창세기의 성경구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요청을 받은 게 생각났습니다. 저는 “하느님, 저더러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으며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바로 그것은 진실의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4년간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 한다고 외쳐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정신이 든 것이지요. ‘하느님이 나를 더 강한 믿음으로 부르시는구나.’ 전 우리 애가 살기를 원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애였습니다. 존 폴을 다시는 이 세상에서 안을 수 없는데 내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수님,” 저는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믿습니다. 당신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하느님께 왜 지금 존 폴을 우리에게서 데려가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내 아들을 그분께 바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존 폴과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을 허락해주신 것에 감사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당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의 뜻대로만 이뤄지기를 바랬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강한 믿음을 가진 것을 되새겨보았습니다. 그러자 깊은 평화의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집에 다다르자 응급차가 막 도착해 있었습니다. 존 폴은 부풀어져 있었고 반응이 없었지만 아내는 심폐소생술을 한 후 약하게 맥박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칠 듯이 기뻤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저녁 기도 모임에서 존 폴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후 서른 여섯 시간 동안 존 폴의 정신은 시간 시간이 다르게 또렷해졌습니다. 이틀이 채 안되어 그 애는 완전히 정상이 되어 퇴원했습니다!
한 2주일이 지나서 여동생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가족을 만나러 차를 몰고 왔습니다. 여동생은 말하기를, “이 얘기는 오빠에게 안 했는데, 우리 기도 모임이 있은 다음 날 아침 내 친구 일마가 전화하더니 존 폴이 회복될 걸 알았다고 했어. 아침에 기도할 때 아브라함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삭을 바치는 모습을 보았대. 그러자 하느님의 자비이신 예수님께서 중간에 나서서 아들을 돌려 주시더래.” 제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여동생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 이야기 나머지 부분은 내가 해주지…”
우리의 희망 존 폴은 이제 전형적인 건강한 일곱 살짜리 남자애가 되었다고 말씀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 이야기의 남은 부분은 예수님을 믿어야겠다는 그 교훈을 얻은 후 정말 저는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활 방식으로서의 하느님의 자비”가 아들을 잃을 뻔한1996년에 제가 만든 평신도 사도직인 <하느님 자비의 성체 사도회>의 임무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