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에 대한 설명 (2)
구르트너 신부
그리고나서 이제 (어떤 사제가 말했듯이) 미사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 헌금입니다 [웃음]. 헌금을 걷는 것은, 2세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미사를 어떻게 드렸는지, 그리고 미사 드리는 순서 등에 대해, 1900년에서 2천 년 전에 적힌 문서가 있는데 요즘 우리가 하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헌금을 언제 걷는지 등 자세한 내용까지 같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 미사의 구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걸까요? 미사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그냥 사람들이 탁자에 앉아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경배할 지 알아봅시다"라고 정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행전, 엠마오 이야기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이야기를 알고 있지요? 두 제자가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났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결국 그분은 그들과 함께 앉으셔서 말씀을 하셨고 (말씀 전례), 그 다음에 빵을 나누십니다 (성찬 전례).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신 거지요.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님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미사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미사는 하늘에서 옵니다.
지금은 물론 교황 성하가 미사 순서를 변경시킬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런 권한을 주신 덕택에 교황에게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러나 미사 그 자체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우리는 그것을 구상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미사의 선물을 주십니다.
헌금을 걷고 나서, 사실 헌금은 여러분 삶의 정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중에는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세상에서 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나중에 세상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본당에 내는 헌금은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의 일에서, 하느님께로 되돌리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업이 본당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말이지요.
저는 '헌금'이 미사 중에 세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된 지 5년이 되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여러분의 예물 없이는 본당에서 하느님 사업을 할 수 없습니다. 헌금에서 나오는 돈은 본당, 학교, 청소년 교육 등을 운영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성 안토니오 본당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본당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본당 학교가 복음화를 위한 우리 본당의 촉매제임을 알았습니다. 부모님들이 우리 학교를 통해 교회에 옵니다.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지요. 어제 저는 중2학생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여학생은 "가톨릭 학교를 8년 동안 비신자로서, 세례도 받지 않고 다녔는데, 신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부활절 성야에 우리 학생 세 명에게 세례를 주었지요.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할까요? 본당을 통해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여러분 삶의 예물 때문입니다. 헌금에 대한 농담도 하지만, 여러분이 주는 그 예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바로 다음 단계로 갈까요? 예물을 제단에 올리는 매우 상징적인 단계입니 다. 그리고 이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빵과 포도주를 제단에 올리는 데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그냥 빠르게 쉽게 넘어 가려면, 그냥 예물을 옆에 놓았다가 봉사자들이 저에게 가져오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 예물(빵과 포도주)을 일어나서 앞으로 가져오게 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 모두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희망을 나타내고, 여러분 의 꿈을 나타내고, 여러분의 일을 나타내고, 여러분 존재의 모든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제단으로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가톨릭 라디오에서 사제가 이런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어느 사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아시면 나중에 말씀해 주세요. 그 사제의 이름을 얘기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서요.) 라디오에서 그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갖고 있습니다. 그건 꽤 간단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 빵을 만드는데 무엇이 들어갔는지 생각해 보세요. 어떤 농부가 땅에 씨앗을 뿌려야 했고, 트랙터를 사용해야 했고 그러면 연료도 필요했겠지요. 그리고 씨앗에 물을 주었고요. 햇볕이 그것을 자라게 하면, 농부는 수확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곡식을 트럭에 싣고 곡물 창고로 가져가겠지요. 거기서 또 일을 하겠지요. 나중에 제분소로 가져가고 그 다음은 밀가루를 빵을 굽는 곳으로 가져가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요? 빵을 만들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 합니다. 포도주를 만드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 다. 포도는 까다롭습니다. 땅 속에 저장하여 숙성시킵니다. 사람의 손이 많이 갑니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나올 때면 그것은 정말 상징적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 상징입니다. 그 예물들을 앞으로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 예물은 미사에서 주 예수를 나타내는 사제에게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끔 봉사자들이 그걸 받겠다고 손을 내밀기도 합 니다. 그러면 안되니 저는 그 손을 탁 치지요 (웃음). (제가 정말 때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예물들은 사제에게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사제에게 그것을 넘겨주지요. 그러면 어디다 놓지요? 우리는 예물을 제단 위에 놓습니다
미사에서 어떤 것들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 예물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변할 것입니다. 그렇죠? 주 예수님으로 바뀔 것입니다. 자, 만약 우리가 제단에 올려놓은 예물이 "우리"라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시려는 걸까요? 만약 그분이 빵과 포도주 예물을 예수님 자신으로 바꾸신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요? 우리를 그분처럼 예수님으로 변하게 합니다. 잠시 후에 이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 예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제 성찬기도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제단에 있는 사제는, 성찬기도를 누구에게 하는지 보신 적이 있나요? 성령에게 하는 건가요? 그건 예수님께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께 보내는 겁니다. 아버지께! 누가 아버지께 기도를 드릴까요? 예수님이지요. 성찬기도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하시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 그 대화는 영원한 대화입니다. 하지만 그 때, 성찬기도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그 영원한 대화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나 요? 그분은 빵과 포도주 예물 위에 성령이 내려오도록 간청합니다. 사제가 그 예물 위에 손을 얹을 때 성령이 내려오도록 부릅니다. 그것을 성령청원기도, 에피클레스 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내려오도록 부른다"는 뜻의 그리스어입니다. 그분은 그 예물 위에 성령이 내려오도록 부릅니다. 그리고 다시, 신학교의 어떤 교수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처럼, 그것은 사제가 그 위에서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으로 바꾸는 마법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줍니다. 이것은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입 니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바꾸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예물 위에 성령이 내려오도록 부르고,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며, 바로 그 순간 빵과 포도주가 정말 예수님의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으로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제의 영혼이 바뀌었기 때문입 니다. 사제는 서품을 받는 날, 예수님이 그를 통해 일을 할 수 있도록 사제의 영혼이 바뀝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 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예물로 바치라는 부름을 받고,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인성”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와 주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되 머리"로 행동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되 몸의 역할을 하는 반면,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성이되 머리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그 머리는 무엇을 하나요?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먹이고, 양떼들에게 풀을 먹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서품을 받으면서 예수님 인성이 양떼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 하고, 고해성사에서 죄를 용서하는 등 사제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알겠습니까? 그래서 사제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정말 예수님이 사제를 통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제의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사제가 되는 게 정말 멋지지 않나요?! 그분은 사제의 음성과 입과 몸을 이용하여 빵과 포도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시간 이 없어서 여기서 조금 건너뛰겠습니다.)
우리는 남은 기도를 진행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지요? 교황을 위하여, 주교를 위하여,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나서 이것에 대한 여러분의 화답의 순간에 도달합니다. 사제는 물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청중이 "아멘"이라고 답함.] 그리고 그 "아멘"을 전례에서는 "대아멘"이라고 합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여러분의 응답이 “대아멘”입니다. "아멘"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렇게 되십시오.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멘이라고 말할 때, 이런 뜻으로 말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너무도 깊이 믿기에, 이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아멘입니다. 그리 고 그 순간, 성찬 전례는 끝납니다.
지금까지 미사의 세번째 부분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입당 예식, 말씀 전례, 성찬 전례입니다. 이제 영성체 예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영성체 예식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하느님께서 미사를 통해 우리 마음 속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미사 중에 우리의 마음을 아티초크처럼 살펴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나요?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이탈리아인)는 저를 위해 아티초크 요리를 해 주셨지요. 아티초크의 가장 좋은 부분은 어디일까요? 속대인데, 속대를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잎들을 다 벗겨내야 하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그것이 하느님이 미사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미사가 시작되어 바로 성당문으로 걸어 들어가자 마자 영성체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영성체를 할 준비를 시키십니다. 우리가 아티초크 속대까지 들어가기 위해 잎을 벗겨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우리가 영성체를 할 때는 하느님께서 미사에서 모든 것을 준비시킨 후입니다. 처음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화답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다음, 우리는 영성체 예식에서 우리 구세주 주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체 예식을 시작할 때 주님의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 기도를 합니다. 미사의 이 시점에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성체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마음을 열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 영혼이 영양분이 필요하므로 영혼의 양식을 의미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하느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인데(이것도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기 전에 있어야 할 평화 인사, 즉 서로 주고받는 평화 인사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구의 어느 사제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예전 일이라 누군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교구 본당에서 사제(그는 보좌신부였음)가 주일 미사하기 전에 주임신부와 크게 싸움을 했습니다. 사제들이 싸운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요? [웃음] 가끔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지요. 어쨌든 사제가 미사 직전에 주임신부와 크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제는 미사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평화의 인사 를 하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되는 것 같긴 한데요. 왜냐하면 미사를 중단해서는 안되는데 중단했던 겁니다. 미사를 멈추고 주임 신부와 화해한 다음 돌아와서 미사를 끝냈습니다. 그 평화의 인사는 다시 말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지낸다는 상징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그래서 우리는 서로 평화롭게 지낸다는 상징으로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사제는 제단에서 성체를 부숩니다. 아주 빠르게 부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잘못 봤을지도 모릅니 다. 우리가 함께 나누기 위해 한 분이신 예수님 밀떡을 부순다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부서졌다는 뜻이지요. 또한 그분은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분 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희생된 한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처럼 과월절에 죽음의 천사가 그들을 지나치도록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영원한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성체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영성체"란 그 분과 하나가 되고, 영성체에서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변합니다. 그것이 예수 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처럼 변하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아까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가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식 때 “다른 그리스도”가 된다면 우리가 성체를 받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른 그리스도”로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이탈리아인들은 여기에 맞는 멋진 표현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 이탈리아 사람이 있나요? 그것은 "이미 그러나 아직"이란 표현인데요. 우리는 이미 “다른 그리스도”이지만 우리 죄, 우리 약점을 알고 있기에 아직 “다른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영성체는 우리를 세상에서 주 예수처럼 점점 더 변화시킵니다.
성체를 모신 후 기도로 마무리하고, 그렇게 하여 영성체가 마무리되는데 그게 미사의 네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미사의 다섯 번째 부분은 “마침 예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 예식 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커피와 도넛 드시고 가라’는 안내입니다. [웃음] 그것도 중요하니까요. 물론 사제가 강복을 하고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그다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기억하시겠지만 미사가 끝날 때 사제가 라틴어로 "이타 미사 에스트 (Ita missa est.)"라고 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 "미사 (missa)"라는 단어에서 “Mass(미사)” 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바로 그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영어 단어 "미션 (mission)"과 "미사일 (missile)"의 라틴어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미사가 끝날 때, 이제 우리가 성체로 강해졌으니 말하자면 미사일처럼 세상에 쏘아져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 우리의 일, 우리의 말을 통해서 좋은 소식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적어도 이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나가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거룩하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어로 "미사가 끝났으니 평화로이 가십시오 (The Mass is ended, go in peace)"가 왜 그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우리를 위해 이것도 고쳐 주실 것 같은데, 미사 끝날 때 이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타 미사 에스트" 진리와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에 나아가세요. 이것이 바로 미사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영원한 고향, 주님과 함께하는 천상의 고향, 영원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것입 니다.
원편집자 주: 구르트너 신부는 10대에 메주고리예에 다녀와서 얼마 후 사제 소명을 느꼈습니다. 인디애나 주 사우스 벤드의 파두아의 안토니오 본당의 사제입니다.
〈 『평화 MIR』, 2021년 11/12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