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에 대한 설명 ( 1 )
다음은 교회법 석사 마크 구르트너 신부가 2010년 5월 22일 노트르담 대학 메주 고리예 회의에서 한 발표를 받아 적은 글입니다.
몇 달 전에 저는 그리스도교 성인 입교 예식 (RCIA) 프로그램에 미사에 대한 일종 의 교리교육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인 입교자뿐만 아니라 본당 신자 전체에게 참여기회를 제공했더니 놀랍고도 기쁘게도 350명 정도나 참석했습니다. 정말 흐뭇했습니다. 우리는 큰 본당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느낀 것은 사람들이 미사에 대한 배움에 엄청나게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사에 대해 처음 순서부터 배우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바로 제의실, 즉, 사제가 입는 옷부터 설명하지요. 자, 그럼 아주 간단하게 미사를 준비할 때 사제가 입는 옷을 설명하겠습니다.
사제가 제일 먼저 입는 것은 장백의입니다.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볼 수 있게 여기 제 장백의를 가져왔습니다. 긴 흰 옷이고, 매우 신학적이고 기술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제가 길거리 다닐 때 입는 옷을 가리기 위한 것입니다. (웃음) 그게 정말 장백의의 목적입니다. 길거리 다닐 때 입는 옷을 덮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사제의 길거리 옷을 덮어서, 우리가 곧 거행할 미사에 갈 때 실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미사 중에 하늘과 땅이 만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장백의를 입는 것은 매우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다른 영역, 즉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 다.
다음으로, 사제는 영대를 걸칩니다. 영대는 권위의 상징이며, 하느님께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사제에게 주신 권위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영대를 걸치는 여러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요. 고해성사 (죄를 용서할 권위), 세례식 (세례를 줄 권위) 등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아름다운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멍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멍에가 무엇인지 모두 아십니까? 멍에란 밭을 갈 소들을 함께 묶는 것입니다. 그리고 멍에가 항상 어떤 경우에 쓰이는지 주목하세요. 소 한 마리만 묶지 않습니다. 그렇죠? 항상 소 두 마리를 멍에로 묶습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누구와 묶여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제는 주님께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함께 하느님 나라의 밭을 갈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예전 예식에서 사제는 영대에 입을 맞추고, 요즘 사제도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주님과 멍에로 묶인 것에 감사하다는 표시로 여전히 입을 맞춥니다. 미사를 아주 많이 하기 때문에 영대에 입을 자주 맞춥니다. 때때로 추울 때 목도리를 두를 때, 어떤 때는, 아, 잠깐만요. 그건 영대가 아니네요! (웃음) 우리는 제의를 입습니다!
때때로 사제는 여러 가지를 묶어주는 띠를 두르고, 마지막으로 소매 없는 제의를 걸칩니다. 제가 가져오진 않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구약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대사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매년 제물을 바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겠지만 구약성경 시대에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피를 흘렸습니다. 알다시피 칼로 동물들을 희생시키고 목을 베었습 니다. 끔찍한 장면을 떠오르게 해서 죄송한데, 그런 일이 벌어졌고, 여기저기 피가 많이 흘렀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제의의 목적은 대사제가 안에 입고 있는 옷에 피가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피는 제의에 묻히게 되는 것이지요. 피를 받는 옷이었지요. 그런데 신약시대의 사제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들도 제의를 계속 입습니다. 희생의 옷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사에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예수님 앞에 옵니다. 그래서 제의는 희생의 옷입니다. 우리는 미사가 피 흘리는 제물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희생된 한 분이신 예수님은 피를 흘리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의는 희생의 제의입니다.
여러분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모든 제의 색상들을 아시지요? 우리가 각 시기에 더 충실히 임하도록 도움이 되는 색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만히 보시면, 제가 지적해드리죠. 사제가 제의를 입는 경우는 단 한 번인데, 그것은 미사를 거행할 때입니다. 제의는 고해성사에서는 절대 입지 않고, 세례식에도 절대 입지 않고, 축복식에도 입지 않습니다. 미사 때에만 입는데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 예외가 무엇인지 아는 분 있나요? 성금요일입니다. 성금요일에 사제는 제의를 입는데, 성삼일은 모두 한 번의 미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 다음 우리는 교회 뒤쪽으로 가서 미사를 시작할 준비를 하죠. 대부분의 본당은 거의 주일마다 입당 성가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가를 부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미사가 시작할 때 우리가 부르는 성가는 우리를 하나로 모으는 무엇인가 있기에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우리가 함께 하나가 되게 하는 뭔가의 힘이 성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에 올 때 각양각색의 장소에서 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집에서 올 텐데, 아이들과 씨름을 하며 성당 갈 준비를 시키고 차에 태웁니다. 아이들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사제라면 혼자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양한 상황에 있다가 미사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미사에 와서 성가를 시작하면, 우리는 그 노래를 통해 모두 함께 모이기 시작합니다.
사제와 전례봉사자들은 입장 행렬하듯이 가운데 통로로 입장하는데, 이것도 미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으로 순례 가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그 행렬에 참가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실 미사가 그런 순례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천국으로 계속 걸어가고, 천국으로 순례를 가고 있으며, 이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에 나오는 시대에 하던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여러분 중 몇 명이나 예루살렘에 가 보셨습니까? 몇 분 계시네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위를 쳐다보면, 언덕 위에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가에 나오듯이 "예루살렘, 예루살렘, 나의 행복한 집"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천국의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며, 사제가 전례봉사자들과 함께 통로로 걸어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그런 순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제단 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제는 제단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성호를 긋고 미사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호를 매우 정기적으로 긋기 때문에 조금씩 건너 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하느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거나 교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주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저에게 당신의 신앙을 설명해주세요." 정말 여러분이 꼭 하나를 설명해야 한다면, 적어도 십자가 성호부터 설명해야 되겠지요. 성호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들어있으니까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삼위일체는 우리 믿음의 한 가운데 있으며 세 위격 안에 한 분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즉 아들에게 자신을 쏟아 부어 주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선물을 받고 자신의 선물을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는 아들입니다.그리고 그들이 주고받는 사랑은 너무도 생생해서, 그 주고받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위격인 성령입니다. 그리고 성호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셔서 우리가 그 생명을 하느님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신비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간단한 성호를 긋는 것은 우리 믿음의 핵심이 들어있으며, 그래서 미사는 항상 성호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사제는 이렇게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그리고 세 번째는 모두 성 바오로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사제가 신자들에게 그리고 다시 신자들이 응답하는 형식의 인사가 있습니다. 한 1 년 후면 이게 바뀔 텐데요. 그 얘기 들으셨나요? 베네딕토 교황 성하께서 번역을 좀 바꾸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는 식으로 말하라는 것인데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오래 전의 아주 예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는 사제 안에 예수님이 존재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사람인 사제에게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 안에 계시는 예수님에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모두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 식으로 이제 답하게 됩니다.“사제의 영과 함께." 이것은 제단 위에 서있는 사제가 단지 "마크 구르트너"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순간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지요.
그런데 마침 생각나는 게 있네요. 모든 가톨릭 교회에는 예수님이 실제 현존하시는 감실이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미사와 관련해서 가톨릭 교회는 정말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 가지 초점은 제대, 독서대, 그리고 집전자의 의자, 미사 집전자의 의자입니다. 이 세 가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제를 통해 존재하는지를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사제이자 예언자이자 왕이라는 것을 봅니다.
사제는 무엇을 하나요? 사제는 제물을 바치므로 제대는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언자는 무엇을 하나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독서대는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왕은 무엇을 합니까?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그리고 집전자 의자는 예수님이 사제인 그분의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저는 미사를 집전할 때 집전자 의자에 앉아 있는 저의 상징적인 모습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저, 마크 구르트너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를 비롯한 모든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 안에 계신 그리고 사제를 통해 임하시는 예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상징적인 순간이며,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백성과 함께 하시고, 굽어보시며, 다스리시고, 가까이 계십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사제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시지요? 그래서 사제가 된 것은 대단한거지요. (박수)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에 우리는 미사에 올 자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하느님은 너무도 사랑과 자비가 넘치심을 기억하며, 그래서 미사가 바로 시작될 때 그분께 자비를 구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미사에 들어갈 때 참으로 회개하면, 그 순간에 모든 가벼운 죄가 우리에게서 깨끗하게 씻겨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대죄는 고해성사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말씀 안에서 그분을 듣고 성체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가벼운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
그런 다음 대영광송을 부릅니다. 대영광송은 사실 언젠가부터 미사에 추가되었 습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교황 성하가 너무 좋아하셔서 모든 교회가 부르도록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에 [사순절과 대림절을 제외 한] 모든 미사에서 대영광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본기도 시간입니다. 그리고 본기도는 사실‘모으다(the collect)’ 라고도 하는데요. 그것은 말그대로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모은다는 뜻으로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기도를 모아 바친다는 거지요. 초기 교회에서 사실 미사가 시작되는 시점이 본기도, 즉 기도를 모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전 순서는 사람들이 아직 입당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지요. 오늘도 실제 사람들이 좀 늦게 오면서 그렇지 않았습니까? [웃음] 그래서 우리는 본기도를 함께 모아서 바칩니다. 그런 다음 모두 자리에 앉습니다.
이제 미사의 첫 번째 부분을 마쳤습니다. 미사는 다섯 부분으로 되어있다는 건 알고 계셨나요? 이게 첫 번째 부분이고, 입당 예식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미사의 두 번째 부분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는 말씀 전례라고 합니다. 제1독서를 봉독하지요. 일반적으로 구약성경 구절입니다. 부활절 부근에는 지금처럼 사도행전의 구절을 봉독합니다.
미사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느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순간에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은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이며, 하느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때로는 성 바오로를 통해, 때로는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를 알리기 위해 여러 번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성 바오로는 오늘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나요? 성 바오로는 오늘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말씀을 통해 그 순간에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가 2000년 전에 한 말이 아닙니다. 그가 말을 하긴 했지만, 미사에서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1 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화답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화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이 있습니다. 혹시 화답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편의 말씀을 통해 화답합니다. 시편은 "성경의 노래책"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노래로 화답합니다.
주일 미사에서 우리는 제2 독서를 봉독하는데, 이것도 일반적으로 성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듣게 될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기 위해 우리는 알렐루야를 노래하고 일어섭니다. 예수님은 복음 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사제(사제, 부제, 주교)만 봉독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그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예언자의 역할을 하시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나서 강론인데 이는 사제, 강론자의 몫이며, 하느님 말씀을 우리 삶에,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가 말하기를, 강론자의 임무는 "고통받은 자를 편안하게 해 주고, 편안한 자에게 자극을 주는 것” [웃음]이라고 했습니다. 고통받는 자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게 편안한 자에게 자극을 주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강론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이 지금 이 곳에서 그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이 강론하심에 여러 번 놀랐으며, 다른 사제들도 그렇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 강론은 하느님이 하시는 거라고 여러 번 느낍니다. 어떤 주는 강론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정말 잘될 것 같아. 사람들이 이번에 많은 것을 얻어갈 거야." 그런데 미사가 끝나고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주는 강론을 적으며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 다.“이건 별로 좋지 않은데… 나 자신도 이런 강론을 들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미사가 끝난 후에 "신부님, 제가 들어 본 강론 중에 최고였어요!" 그러니 이건 모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제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낍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시며,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강론이 끝나면 미사에서 응답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그것은 사도 신경이지요. 알다시피 우리는 그 말씀을 아주 자주, 매주 입에 올립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 저는 믿나이다.”이렇게 하면 상투적으로 할 위험이 있습니다. 제 일생에서 느낀 정말 영적인 순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신학교에서 부제 서품을 받을 준비를 하기 전이었습니다. 부제 서품을 받기 전에 교회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을 신학교에서 저녁 기도를 드릴 때 했습니다. 신학생과 교수들이 모두 모인 신학교 공동체 전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혼자 일어나 천천히, 엄숙하게 그 말을 해 야 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님… 성령을 믿으며…”한 중간쯤에서,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일렀던 것 같은데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문득 깨닫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저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습 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죄의 용서와… 믿나이다."
그 신앙의 고백은 저에게 너무나 심오해서 2~3일 동안 그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 다. 얼마나 강렬한 순간이었는지요! 그리고 정말 우리 모두가 모든 미사에서 그렇게 강렬한 순간을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미사 때마다 사도 신경을 소리내어 바칠 때 우리 가슴은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처럼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이것도 교황 성하께서 바꿀 거라고 들었습니다. 미사 중에 "저는 믿나이다."로 돌아갈 거라고요. 이것은 개인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개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저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면,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라고 말할 때 우리 모두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거지요. "저"는 사실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한다는 걸 아시겠 습니까? 우리를 각자로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사실 약간 각자 다른 사람들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을 교황 성하께서 지적하시는 거지요. 즉“저는 믿 나이다.”에서 "저"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모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미사에 가면 이걸 생각하면서 사도 신경 기도를 하십시오. 마음 속으로 열정적으로 그것을 믿으며 말하십시오.
사도 신경이 끝난 후 우리는 보편 지향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전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공개적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필요한 것들을 간구합니다. 이로써 미사의 두 번째 부분, 즉 제1독서 에서 보편 지향 기도까지 말씀 전례가 끝납니다.
〈 『평화 MIR』, 2021년 9/10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