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이란 무엇인가?
[편집자주: 다음은 2021년 2월 24일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 사순절 묵상 중 본당 주임 마린코 사코타 신부가 행한 사순절 특별 강론이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이 가장 먼저 하신 초대, 가장 중요한 초대 중의 하나가 단식입니다.
단식으로의 초대는 이미 성경 시작 부분인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창세 2, 16)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식하셨고,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단식했습니다. 단식의 실천은 그리스도교 전 역사에 걸쳐 나타나지만 20세기에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어느 사제가 이에 대해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신부와 얘기했습니다. “저는 여기(메주고리예)에서 30년 동안 강론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단식을 왜, 어떻게 하는지 전혀 얘기하지 않았고, 단식의 위험과 이점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순절 단식만 언급하곤 했지요. 지금은 성경을 읽으면서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나와 있는 이 메시지를 왜 못 보고 지나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어떻게 그랬을까 생각이 들고, 이처럼 제가 회개하고 나서야 깨닫게 될 많은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두렵습니다.“
단식이란 무엇일까요?
단식은 식이요법이 아닙니다. 식이요법은 신체에만 목적을 두지만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는 내면과 마음의 변화에 더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단식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형제, 자매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앞에 겸손함을 드러내는 행동이자 우리가 죄와 이기심을 버리고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잠재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식의 목적은 우리 존재의 전체인 몸, 영혼, 영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단식은 기도와 자비로운 행동을 동반합니다.
단식은 내 자신이 무엇을 먹고 살지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단식은 어떻게 하나요?
성모님 메시지에 단식하라는 초대가 있습니다. 언젠가 발현목격증인들이 성모님께 어떻게 단식하는 게 가장 좋은지 물었습니다. 성모님은 "가장 좋은 단식법은 빵과 물로 하는 것이다."(1981년 7월 21일) 또 한 번은 성모님이 우리에게 "엄격하게 단식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1984년 8월 14일).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부른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더 확실하게 기도하고 단식하거라.» (1991년 8월 25일)
그리고 성모님은 단식을 늘려가고, 우리 안에서 단식을 일상적으로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성모님은 겉으로만 단식하는 게 아니라 단식이 내면의 행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마음을 다해 단식하여라 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마음을 다해 단식을 시작하라고 부른다. 남들이 다 단식하고 있기 때문에 단식하는 사람도 많다. 아무도 멈추고 싶어하지 않는 풍습이 되었다. 하느님이 내가 이 본당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단식하라고 이 본당에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마음을 다해 단식하고 기도하여라! (1984년 9월 20일)
단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전통을 지키기 위해
2) 마음에서 우러나서
단식은 전통에서 마음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겉에서 우리 안으로. 겉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요엘 2, 12-13)
단식은 하느님 앞에서 공덕을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 번 성전에서 기도하고 단식하던 바리사이를 떠올려봅시다. 예수님은 그의 기도와 단식이 하느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하느님 앞에서 공덕을 받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식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더 나아지거나 더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단식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단식을 강조해서 말합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는 단식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에 반대할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라고 단식하는 게 아닙니다. 단식은 우리 자아를 키우고 높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와는 반대로 자아를 약화시키고 자아에서 해방되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언제 단식해야 할까요?
평화의 모후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빵과 물로 사는 것.
단식은 단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단식은 빵과 물로 사는 것입니다. 단식일에는 빵과 물로 생활합니다. 그 음식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규칙 – 빵을 마시고 물을 먹는다.
빵을 먹을 때는 쪼개서 천천히 먹어야 합니다. 물을 마실 때는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빵과 물을 음미하는 게 중요합니다. 빵과 물을 먹는 이 행위를 기도 중에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생명의 빵이십니다…
단식의 신체적 차원
그리스도교에서 이해하는 단식은 인간의 몸, 영혼, 영성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그 과정은 우리 겉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어지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신체적인 단식은 잘못된 영양과 식단을 고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이들이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3분의 1을 더 먹기 때문에 단식으로 우리 몸에 부담을 주는 잉여 몸무게를 찾아냅니다. 여분의 체중 때문에 우리 심장과 다른 장기들도 고통받고, 면역 체계도 낮아집니다. "이것은 빨리 먹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자신의 몸이 얼마만큼의 음식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이로 인해 우리 안의 연결 고리가 끊겨 몸은 더 이상 식음료가 필요하지 않을 때 신호를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 뇌의 의식적인 반응이 고장이 난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유기체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작은 형제회,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신부)
먹는 속도 등 여러 이유로 인해, 몸이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몸을 망치고 있습니다. 슬라브코 신부가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가 과식할 때 몸의 신호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겠습니까?
그렇다고 비만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날씬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뜻은 아니고, 비만이 성스러움에 방해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반대로 비만인 성인들도 많았습니다. 한 뚱뚱한 수사가 앉을 수 있도록 수사들이 탁자를 도려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그 위대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얘기입니다.
하지만 뚱뚱한 사람들이 성격이 좋다는 얘기를 떠나, 창조주께서 주신 우리 몸에 신경을 써야 하며, 단식이 그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단식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없애는 것 외에도, 몸에 쌓인 모든 독소를 청소해주기 때문에 몸 위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중국 속담에 '신체를 위한 음식에 25전, 의사에게 75전!'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음식이 약이 되어야지, 약이 음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몸과 영혼은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음식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영성 상태도 무척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코회 한 수도자의 106살 생일에 누군가가 그에게 무얼 먹고 장수하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당신을 갉아먹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식의 목적은 식음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포기는 시작일 뿐 그 목적은 우리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추잡하고 해로운 말로부터 혀를 단식하자. 우리가 닭이나 생선을 피하면서 형제들을 험담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요제프 라칭거(나중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됨)도 이기적인 이유로 하는 단식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요즘 단식은 다른 게 사실이다. 의학, 미용 등 다양한 이유로 단식하는데, 그것도 좋다. 그러나 그런 단식만으론 사람에게 충분하지 않고, 그런 단식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런 단식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단식을 하면서 겉모습만 신경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건 잘못된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루카 18, 11-12)
"요즘 단식은 무언가 영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문화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는 치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단식은 몸에 분명 이롭지만, 신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뜻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의 치유 '요법'이 되어야 한다."(교황 베네딕토 16세)
다가오는 사순절은 우리의 시선을 부활하신 주님께 돌리고, 그분 사랑에 더 가까이 가고, 순응하게 하는 치료법으로서 단식을 일상적으로 할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