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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Stephen Shin’s Reflections on the Mess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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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내 품에 그분을 안고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인간의 평화가 아니라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굳건하게 자리잡도록 기도하고 증거하여라. 그 평화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화이다. 너희가 세례를 통하여 특별하게 불리움 받았고 사랑받고 있으니, 하느님과 평화를 갈망하는 이 세상을 향해 펼쳐진 나의 손이 될 수 있도록 증거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내 품에 그분을 안고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오늘은 천사 가브리엘의 예수님 탄생 예고가 실제 현실로 이루어진 날, 즉 예수님의 성탄절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을 통해 마리아께 하신 약속의 말씀이 정말 이루어졌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 인류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중심에는 마리아께서 계십니다. 성모님 역시 당신이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 즉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던 그 약속을 지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태중에 잉태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그분은 낳아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은 참으로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당신들이 행한 약속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의 아비(요한 8, 44 참조)이기 때문에 진리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약속을 절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로 인간을 유혹하지만, 그 결과는 실제 속삭인 말과는 전연 다르게 나타납니다. 혹시 우리가 하는 말에 거짓이 있다거나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입히기 위한 거짓 약속을 하고 있다면, 사탄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우리를 휘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진리이시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계속 그분을 모셔오시면서 그분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번 성탄절에도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내 팔에 그분을 안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전연 거짓이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계속 예수님을 우리에게 모셔오고 계십니다. 아니, 예수님이 이미 우리들 가운데 와 계시니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공경하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경을 읽으라고 계속해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모셔오고 계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계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인간의 평화가 아니라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굳건하게 자리잡도록 기도하고 증거하여라. 

그 평화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화이다.인간은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 평화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 있었던 아랍의 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민 혁명으로 튀니지, 이집트, 그리고 리비아의 철권 통치자들이 권좌에서 물러나거나 명을 달리함으로써 마치 그 나라들에 즉시 평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 이집트는 여전히 또 다른 시위와 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권력을 탐하는 군부가 시민들이 누려야 하는 평화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평화는 절대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참된 평화를 자신에게 가져다 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인간의 평화가 아니라,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굳건하게 자리잡도록 기도하고 증거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그분의 평화를 얻기 위해 기도하고, 또 그 평화가 모든 이들 마음 안에 굳건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길 또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셨는데 그를 성취하는 길은 기도이고, 기도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평화를 증거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그를 위해 평화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어느 장소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평화가 임하시도록 기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길을 가면서 그저 지나치는 사람을 위해서도 “평화를 빕니다.”라고 속으로 기도를 올려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족, 친구, 동료, 교우, 이웃, 심지어 원수가 된 사람에게마저도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하도록 기도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를 통하여 특별하게 불리움 받았고 사랑받고 있으니, 하느님과 평화를 갈망하는 이 세상을 향해 펼쳐진 나의 손이 될 수 있도록 증거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됩니다. 거기에 덧붙여 더 중요하게는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되고,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하는 세례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그분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만큼 더 크고 귀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받은 세례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아직 당신을 아버지로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고자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 평화를 갈망하는 이 세상을 향해 펼쳐진 내 손이 되어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는 초대하십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들이고, 그들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에 응답하는 것처럼 위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평화의 왕으로 탄생하시어 저희를 찾아오시는 당신을 기쁘게 맞이하오니 언제나 제 마음과 저희 가정, 교회 그리고 세상 안에 머물러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저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사오니 다른 그 무엇에서도 헛되이 인간적인 평화를 찾지 않을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소서. 저희의 모든 발걸음을 오직 참된 평화의 원천이신 당신께로만 향하게 하소서. 

성모님, 제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제가 당신을 도와 아직까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평화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증거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모님, 저의 어머니이신 당신의 계획에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오니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2011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너희를 세상적인 것으로 이끌지만, 나는 너희를 은총의 시간으로 인도하고 싶다. 그러면 이 시간을 통해 너희는 더욱더 내 아들 가까이에 있게 되고, 그분께서 모든 이가 마음으로 갈망하는 그분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으로 너희를 인도하실 수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그러면 이 시간이 너희 영혼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다. 

예수님의 탄생과 그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이때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성모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어 하실까요? 너무 단순할는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슬퍼하는 정도와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절망과 슬픔이 없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지닐 수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대림 시기이지만 사순절 성주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성 목요일 전까지는 예수님 때문에 희망과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 목요일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고 성 금요일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셨을 때, 극심한 절망과 슬픔에 빠져 들었습니다. 성모님 역시 외면적으로 보면 극복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에 빠지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한 십자가의 길을 홀로 걸으며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사흘 날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으면서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싹 틔우고, 슬픔 가운데서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새로운 시작, 즉 부활을 위한 관문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셨습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으셨던 그 성모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고 슬픔에 빠져 들게 만드는 것이 그 무엇이든 성모님께 모두 말씀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 제 가족 가운데 누구 때문에, 어떤 상황 때문에 저는 절망에 빠졌고,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성모님께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절망적이고 슬픈 상황을 다 말씀 드리며 “제게 희망과 기쁨을 주십시오.” 라고 청한다면,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시는 어머니 마리아께서 희망과 기쁨을 주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너희를 세상적인 것으로 이끌지만, 나는 너희를 은총의 시간으로 인도하고 싶다. 그러면 이 시간을 통해 너희는 더욱더 내 아들 가까이에 있게 되고, 그분께서 모든 이가 마음으로 갈망하는 그분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으로 너희를 인도하실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대림 시기를 시작했지만, 세상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성탄을 이용하고 연말연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인터넷, 잡지, 거리의 온갖 광고들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고, 우리의 관심을 세상적인 것에 이끌리게 만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 자리가 없습니다. 다만 쇼핑과 선물 교환, 유흥과 흥청거림으로 우리의 시간과 돈 그리고 관심을 쏟게 만듭니다. 성모님 메시지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세상적인 것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은총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세상적인 것과 은총의 시간 사이에서 어떤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은총의 시간으로 인도해 주고 싶어하시는 성모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면, 이번 대림 시기와 성탄절은 우리에게 정말 은총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적인 것을 멀리하면서 우리의 구원자로 오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우리에게 낳아 주시는 성모님께 우리의 모든 관심을 둔다면, 이번 대림 시기와 성탄절에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은총이 쏟아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그러면 이 시간이 너희 영혼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 협력은 곧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이 대림 시기가 우리 영혼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 되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여라’ 라는 이 짧은 한 마디 권고에 하느님 은총의 보물 창고를 여는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지만, 세상은 당신의 성탄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때를 상업적인 목적과 인간적인 즐거움과 휴식을 누리는 때로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 그러나, 저는 이 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거룩하고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당신과 당신의 성탄에만 저의 관심을 쏟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말씀처럼 기도를 통해 이 시간이 제 영혼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 되게 하겠습니다.

성모님,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가득 받으신 분이시기에 제 영혼의 상태를 꿰뚫어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눈에 저의 절망과 슬픔이 보이기에 당신은 제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자 하십니다. 어머니, 제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언제나 제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자 하는 당신이 제 옆에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하소서. 어머니, 당신의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2011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지만, 너희 마음 안에서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오늘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 그러면 그분께서 그분의 사랑과 다정함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품어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지만, 너희 마음 안에서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늘 사랑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행동과 마음을 감시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도와주고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하는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 마음 안에서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까? 참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고, 그분에게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서 기쁨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세상적인 기쁨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만드는데도 말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에 대한 온갖 걱정과 시름을 싸 안고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해보려고 하다 보니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께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께서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없는 까닭은 우리가 죄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과 갈라놓고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당연히 기쁨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6-47)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이 마니피캇이 우리에게 오직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에게서만 오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 4)라고 말하고, 심지어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 12)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 그러면 그분께서 그분의 사랑과 다정함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품어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난 직전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16.20.22) 그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그들은 그분을 배반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가득했고, 그 두려움은 그들의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그 다락방에 모여 유다인들이 그들을 죽일까봐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 20)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반전입니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은 하느님 사랑과 선 그리고 정의의 승리에서 오는 기쁨입니다.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예수님의 성실하신 사랑 덕분에 제자들은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배신했지만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시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즉, 회개하고 다시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우리는 번번히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보면서 다시 회개합니다. 따라서 자신은 회개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시는 만큼 우리도 그분 전구의 은총에 힘입어 매일 매일, 아니 매 순간 회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배반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제 마음 안에 드리워진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 주소서. 제 스스로는 그 두려움을 몰아낼 수 없사오니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 부활의 은총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기쁨으로 채워 주소서. 

성모님,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저를 바라보시는 당신의 눈길에 감사 드립니다. 어머니, 제가 언제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제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도록 죄를 끊어 버리고 다시 회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전구하여 주소서.
   
 
 
2011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 모두를 위한 때, 너희가 증거하는 때가 되게 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른다.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 그분의 선물을 체험하고 있다. 그 선물이 신앙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격려가 될 수 있도록 너희의 말과 삶을 통해 증거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믿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살아 있고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 모두를 위한 때, 너희가 증거하는 때가 되게 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른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인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 즉 구원의 때를 가리키는 낱말을 달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신 맥락은 일반적인 시간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때, 즉 구원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때’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일반적인 때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때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때’는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회개와 구원으로 부르시는 때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바로 지금 받아 들인다면, 지금 ‘이 때’는 구원과 평화의 때가 됩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우리는 예리고의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여느 일반적인 시간 중에 어느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그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의 구원을 맛보는 거룩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예수님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그분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고,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혹시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는 말로 회개의 증거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자캐오의 회개와 예수님의 은총으로 그 ‘오늘’은 ‘구원의 오늘, 거룩한 때’가 되었습니다.(루카 19, 1-10 참조)     
     지금 ‘이 때가 우리 모두를 위한 때’가 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캐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야 하고, 그분을 직접 만나고 그분을 우리 삶 안에 모셔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삶과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으면, 회개의 은총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 그분의 선물을 체험하고 있다. 그 선물이 신앙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격려가 될 수 있도록 너희의 말과 삶을 통해 증거하여라. 

성모님께서는 메시지 곳곳에서 거룩한 미사에 대해 언급하시며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한 한 자주 매일 미사에 참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성체성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매일 겸손하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에서 성체성사보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더 잘 보여주는 표징은 없습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준비하고, 신앙으로 그분을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으면, 하느님은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한없이 부어주십니다.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일상에서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미사가 끝났을 때,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하며 우리를 세상 안으로, 이웃에게로 파견합니다.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하느님처럼 살라고 우리에게 명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코린 5,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절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체험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우리가 행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그분의 향기가 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실제로 사는 그리스도인, 행동하는 신앙에 기반한 말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믿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살아 있고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설치된 한 강제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믿노라. 구름에 가리워져 햇빛이 비치지 않을 때도 태양이 존재하는 것을… 나는 믿노라. 내가 느낄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그 침묵 뒤에 여전히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가장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을 전적으로 믿었던 한 신앙인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을 아주 오래 전에 먼저 사셨던 분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십자가 밑에 서서 직접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었고,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특별히 우리가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처해 있을 때 그 빛을 더욱 발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성모님께서 그 순간에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느님 대전에서 끊임없어 전구하고 계시는 성모님께 의탁합시다. 

예수님, 당신은 제 마음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시고, 제 이름을 부르시며 저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초대에 응하고 싶사오니 제 마음에 당신께 대한 사랑과 열망을 불러 일으켜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살고 있는 오늘 이 때가 구원의 때가 될 수 있게 해주소서. 

성모님, 저의 믿음이 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있도록 저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성모님의 전구에 힘입어 제 믿음을 더욱 굳세게 키워나가도록 노력하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과 저의 믿음을 말과 삶을 통해 증거하고자 하오니 늘 저와 함께하여 주소서.
   
 
 
2011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이 내 계획을 망가뜨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내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른다. 나는 여기에서 이 본당과 함께 시작했고 온 세계를 초대했다. 많은 이들이 응답했지만, 내 부름을 듣거나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므로, ‘예’ 하고 응답한 너희가 강인하고 결연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탄이 내 계획을 망가뜨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내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른다. 

사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육체가 없는 타락한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 점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탄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의 이름은 복음서 곳곳에서 등장하고, 묵시록 12장에서는 ‘붉은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즉 성모님과 붉은 용으로 불리우는 사탄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시기입니다. 즉 묵시록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성모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신 예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천상으로부터 매일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분의 계획은 온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만을 참된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러한 성모님의 계획을 망가뜨리고 싶어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 되려는 교만을 부리다가 타락한 천사 루치펠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은밀하게 침투하여 우리가 참 사람이시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끔 만듭니다. 온갖 유혹을 통해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쾌락에 집착하게 만들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는 또한 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 국가, 세상 전체를 하느님 없는 장소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사탄이 무너지고 패하도록 성모님을 도와드려야 하는 때입니다. 무엇으로 그분을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기도와 단식입니다. 그래서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당신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기도하고 단식하는 것 자체가 사탄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해주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지향들을 위해 그렇게 할 때,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성모님과 사탄과의 전투에서 우리는 기도와 단식을 통해 성모님께 물자와 무기를 공급하고, 성모님의 군대에서 그분의 지휘에 따라 싸우는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우주의 여왕이신 그분의 군대에 속해 그분을 도와드리고, 그분과 함께 사탄과 대적하여 싸우는 전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일입니까? 성모님께서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그렇게 되라고 우리는 부르십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 본당과 함께 시작했고 온 세계를 초대했다. 많은 이들이 응답했지만, 내 부름을 듣거나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므로, ‘예’ 하고 응답한 너희가 강인하고 결연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시는 ‘여기 이 본당’은 당연히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성당을 지칭합니다. 발현 초기 발현목격증인들이 “성모님, 당신은 왜 이곳에 오셨나요?” 라고 물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이곳에는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깊고 굳건한 신앙이 있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1981년 이래 지금까지 4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초대되어 회개하고 더욱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열매를 통해 많은 이들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살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성모님 말씀처럼 많은 이들이 응답했지만 그분의 부름을 듣거나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수가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 하고 응답한 너희가 강인하고 결연해야 한다.” 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리를 지목하십니다. 메주고리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고, 그 주민들은 가난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메주고리예가 되고, 그 주민이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들처럼 하느님을 믿는데 있어서 강인하고 결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강인하고 결연한 신앙이 과연 얼마나 힘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면, 그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십시오. 마더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대양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지만, 그 물 한 방울이 없다면 대양은 그만큼 모자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광야에서 40 주야를 기도하고 단식하신 후 사탄의 유혹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 사탄이 지금 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기도와 단식을 통해 영적으로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성모님, 사탄의 힘은 저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그의 머리를 부수고, 그를 패배시키실 것을 믿습니다.또한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이 승리하실 것도 믿습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의 부름을 받아 사탄과 싸우시는 당신을 돕고자 합니다. 당신 말씀처럼 강인하고 결연한 자세로, 기도와 단식을 통해 더욱 굳건해진 믿음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오니 저를 당신 군대의 군사로 받아 주소서.
   
 
 
2011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와 침묵의 시간이 되게 하여라. 너희의 몸과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쉬게 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이끌게 해 주어라. 성령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희 안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이 활짝 피어나고,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쳐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와 침묵의 시간이 되게 하여라. 너희의 몸과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쉬게 하여라. 

어린 자녀의 필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우리의 영신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인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와 침묵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뒤집어서 보자면, 현재 우리에게 기도와 침묵의 시간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충전될 수 있는 도구와 조건, 즉 기도와 침묵의 시간이 어느 정도 우리 일상에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없다면, 그 시간을 마련하고, 만일 턱없이 부족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세상 일로 바쁘기 때문에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거짓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유 있는 시간이 생기면, 육신 생활 유지와 분주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침묵 속에서 기도하기 보다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과 더욱 친해지기 위해서 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엇을 깨닫거나 얻겠다는 마음조차 없이 그저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5분, 15분, 아니 30분 이상 침묵 중에 앉아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몸과 영혼에 쌓인 긴장이 풀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장소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당이나 경당은 침묵 중에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곳이고,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만일 여건상 성당을 자주 갈 수 없다면, 침묵 중에 기도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이끌게 해 주어라.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인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겸손입니다. 동시에 우리에 대한 대단한 존경의 표현입니다. 그저 어린 자녀들에 불과한 우리를 강제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면서 우리의 동의를 요구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성모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바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당신이 우리를 이끌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우리가 평화와 구원을 누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전적인 신뢰와 의탁입니다. 성모님의 선하신 지향을 믿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시도록 우리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편 1장이 우리 삶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 1-3) 

성령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희 안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이 활짝 피어나고,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 4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실제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사도 1, 14 참조) 계속 그렇게 기도하면서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사도 2, 1-4 참조)     
     성령의 정배이신 성모님,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기도하면서 실제 그 성령 강림을 체험하신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께 마음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선하게 또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온 마음을 하느님께 연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 곧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 강림의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나약함을 극복하게 만드시고,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모든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선한 모든 것들이 만발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만 행하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은사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 열매를 백배, 아니 그 이상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새로운 인간, 영적인 인간, 구원받은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며 하느님 자신이신 성령의 힘으로써만 모든 악을 물리치고 선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쳐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시작하는 하루는 하느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기도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하루 전체를 기도하는 마음과 분위기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루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하루이고, 하느님께 봉헌된 하루이며,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자 노력하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기도로 마치는 하루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 그분이 이루어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 지어지는 하루입니다. 또한 기도로 하루를 마치면서 우리는 그분의 뜻에 어긋나게 살았던 부분에 대한 반성과 참회를 하면서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시작하고 마치는 우리의 하루는 모든 면에서 하느님과 전적으로 함께 하는 거룩한 삶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것처럼 저희에게도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소서. 어머니 말씀대로 마음을 열고 그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아버지께서 저희 안에 심어놓으신 선한 모든 것들이 활짝 피어나고, 성령의 힘으로 백배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모님, 당신은 사도들의 모후이며 저희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활짝 열리기를 간구하셨던 것처럼 저희의 마음이 성령께 활짝 열릴 수 있도록 저희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소서. 어머니, 당신께 모든 것을 의탁하오니 저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소서.
   
 
 
2011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를 너희와 함께 있게 해 주신 지극히 높으신 분께 나와 함께 감사드려라. 내 메시지를 살고 있는 이들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기쁘다. 너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응답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잠자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찾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 모두를 영원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내 티 없는 성심에 좀 더 가까이 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를 너희와 함께 있게 해 주신 지극히 높으신 분께 나와 함께 감사드려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는 성모님께서는 오늘날 바로 그 똑같으신 하느님에 의해 이 땅에 보내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단 한 번이 아니라 무려 30년간이나 매일 같이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있게 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이고 우리에 대한 엄청난 배려입니까?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저절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이사 49, 15-16) 우리는 결코 홀로 내버려진 고아들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립시다. 

내 메시지를 살고 있는 이들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기쁘기만 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도록 보내신 성모님은 그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만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모님의 입을 통해 들려 오는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성모님의 현존에 대해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한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메시지를 살면, 우리 마음 안에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 사랑과 기쁨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마음 역시 기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행복에 덩달아 행복을 느끼는 부모의 심정처럼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응답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잠자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찾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불신앙의 잠을 자고 있는 이들을 꾸짖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심정에서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나 신앙의 새날을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마르 14, 34) 하고 당부하시고,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르 14, 37-38)      
     이제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몸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뜻에서 멀어져 있는 불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 잠에서 우리를 깨우는 알람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고, 성모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 모두를 영원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내 티 없는 성심에 좀 더 가까이 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의 성심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정원입니다. 곧 그 성심 안에서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성심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면,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성심으로 우리의 전 존재를 품어주시고, 우리를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또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인도해주십시다. 매일 성모 성심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기도를 바치며 하루를 시작합시다. 다음은 메주고리예 내적 담화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옐레나에게 1983년 4월 19일 성모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선함과 사랑, 자비의 어머니께 드리는 봉헌 기도 

오, 나의 어머니,선함과 사랑, 자비의 어머니,
끝없이 당신을 사랑하오며 당신께 저를 봉헌하나이다.
당신의 선함,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통해 저를 구원하소서.
저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소서.
저는 당신을 끝없이 사랑하고,
당신께서 저를 보호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을 다해 기도하오니,
오 선하신 어머니, 당신의 선함을 제게 주소서.
그 선함을 통해 천국을 얻게 해주소서.
영원한 당신의 사랑,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모든 이들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제게 허락하소서,
청하오니, 당신을 위해 자비로운 제가 될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당신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오니 저를 당신께 온전히 봉헌하며,
저의 모든 발걸음마다 함께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은총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행여 제가 이 은총을 잃어버릴지라도 
청하오니 그 은총을 다시 허락하소서. 아멘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께서 저희와 함께 있으면서 저희를 당신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성모님의 현존을 느끼며 유순한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의 메시지에 제 온 마음을 열고, 그 메시지를 살고자 하오니 저의 마음 안에 있는 불신앙의 어두움을 모두 몰아내소서.
   
 
 
2011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회개의 은총을 구하고 있는 너희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는 죄 속에서 희망과 기도도 없이, 또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고해성사도 보지 않은 채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여라. 너희가 오직 그렇게 해야만 내가 너희를 도와주고 너희 기도를 들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할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회개의 은총을 구하고 있는 너희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였던 베드로와 훗날 이스가리웃 유다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한 이후 두 사람의 행동은 사뭇 달랐습니다. 유다는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자신의 잘못을 인지했으나 스스로 그 자책감에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주어진 계시를 적어놓은 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에 근거하여 제작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그의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처럼 영화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 대사제의 관저까지 따라가서 상황을 지켜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그의 신분이 발각되었을 때, 그는 황급히 관저를 빠져나옵니다. 그때 그는 대사제의 관저에 들어서는 성모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성모님을 쳐다보며 울면서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을 통해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모님이 함께 하시는 다락방에 모여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회개의 은총을 구하고 있다면,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어머니, 제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가운데서 하느님의 은총이 시작됩니다. 회개의 은총을 갈구하는 베드로를 위해 성모님께서는 틀림없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지은 죄를 뉘우치는 당신의 새로운 맏아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은총을 청할 때, 반드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너희는 죄 속에서 희망과 기도도 없이, 또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고해성사도 보지 않은 채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위에서 쓴 것처럼 회개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에서 처럼 하느님께 용서받고 의로움을 인정받게 되는 것은 겸손한 죄 고백에서 비롯합니다.     
     죄는 그 본성상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죄를 짓고 하느님 눈을 피해 숨었던 아담과 하와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죄는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느님과 우리를 영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끈인 기도로부터도 멀어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를 죄로 인도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끈을 놓게 만듭니다. 이 모든 고리를 끓어버리는 작업이 바로 회개이고, 그 출발은 죄 인지와 고백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고해성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월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이는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달리 말해, 적어도 매월 한 번이라는 뜻이지, 꼭 한 달에 한 번 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손이 더러워졌는데 한 달씩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손이 더러워지면 바로 손을 씻기 위해 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졌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의 영혼의 때를 씻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여라. 너희가 오직 그렇게 해야만 내가 너희를 도와주고, 너희 기도를 들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할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세례 때 받은 은총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고해성사를 자주 보면 볼수록 우리의 영혼은 죄에 대해 민감해지기 때문에 죄를 더욱 잘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인은 어제의 죄인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모님 말씀처럼 우리는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죄를 짓는 나약한 인간이겠지만, 매 순간 죄를 끊어버리고 성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면, 성모님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전구하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제 죄인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결심과 실천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 당신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사제직과 고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당신은 사제의 인격을 통해 죄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사제를 통하여 죄를 사해주십니다. 예수님, 오늘이 바로 제가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당신의 사제를 찾아가야 하는 시간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회개의 은총을 구하고 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 은총을 허락하소서. 

성모님, 오늘 이 순간 저는 당신의 요청대로,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교회로 발길을 돌리려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희망과 기도 속에서 살며 예수님의 평화와 구원을 맛볼 것입니다. 어머니 회개의 은총을 구하고 있는 저를 위해 기도해주소서.
   
 
 
2011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이 연중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내고 있기에, 나 역시 다른 이들이 내 티 없는 성심에 좀 더 가까이 올 수 있도록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고, 그들을 도와주라고 너희를 부른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불꽃이 그들 마음 안에서 피어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삶이 여기 지상에서 이미 천국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너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이 연중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내고 있기에, 나 역시 다른 이들이 내 티 없는 성심에 좀 더 가까이 올 수 있도록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고, 그들을 도와주라고 너희를 부른다. 

힌두교 신자였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럼 왜 그가 이러한 말을 했겠습니까?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행동으로 그분을 따르지 않는 유명무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꼬집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야고보께서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4. 17. 26)          
     이렇듯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 8)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주변에 퍼뜨리게 되고,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하는 믿음, 열매 맺는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다른 이들이 당신의 티 없는 성심에 좀 더 가까이 올 수 있도록 우리의 삶으로 증거하고 그들을 도와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음은 인간 존재의 중심입니다. 성모님의 중심은 바로 그분의 티 없는 성심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겠다고 예고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그 티 없으신 성심으로 응답하시고, 오실 예수님을 이미 당신의 성심 안에 받아 들이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바로 이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은 이 성심,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구하고, 하느님만을 모시고자 했던 그 성심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우리가 먼저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선택하고, 하느님만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며 그분만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불꽃이 그들 마음 안에서 피어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 16) 성모님의 그 티 없으신 성심은 하느님 사랑의 용광로이십니다. 아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삶의 증거를 통해 다른 이들을 성모님의 그 티 없으신 성심에 좀 더 가까이 데려가면, 그들 역시 당연히 하느님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 사랑의 불꽃에 완전히 노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불꽃이 그들 마음 안에서 피어날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삶이 여기 지상에서 이미 천국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너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난 달 메시지 묵상에서도 인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지상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된 행복과 평화 그리고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만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고, 그것이 바로 영원한 구원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지상의 삶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즉 천국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기차역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우리 영원한 삶의 질과 종착점이 결정됩니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분을 진정한 주님으로 모시지 않은 사람에게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요원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과 죽음, 저주와 축복, 지옥과 천국을 우리 앞에 내놓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메주고리예를 통해 30년 간 매일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바로 지금이, 바로 오늘이, 그 응답의 시간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이 세상에 오실 자리로서 어머니 마리아를 택하셨고, 그분의 티 없으신 성심을 당신의 감실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 제가 어머니 마리아의 성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그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당신과 하나되게 해주십시오. 

성모님, 예수님의 명에 따라 저의 어머니가 되어주신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십자가 밑에서 저와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그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당신은 저를 염려하시고, 저를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이끌어주셨습니다. 어머니, 제 마음과 온 삶을 당신의 티 없으신 성심에 봉헌하오니 제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2011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회개하라고 특별히 너희를 부르고 싶다. 오늘부터 너희 마음 안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자녀들아, 나는 너희가 ‘예’하고 응답하는 것을 보고 싶고, 너희의 삶이 생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나는 특별한 방법으로 평화, 사랑 그리고 내 마음과 내 아들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를 가져다주는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회개하라고 특별히 너희를 부르고 싶다. 오늘부터 너희 마음 안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말로 공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셨을 텐데 왜 굳이 이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답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무엇을 하실 것인지, 또 인류는 어떠한 응답을 해야 하는지 핵심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구체적인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임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인류는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특별한 방법으로, 회개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성모님의 음성을 통해 오늘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전해져 옵니다.      
     회개는 어찌 보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삶, 사고, 행동 방식,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올바르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 사고 및 행동 방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과정에서 안전에 대한 위협이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아라.”(마태 6, 31-33a) 비록 이 말씀에서 ‘회개’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거나 안전에 대한 걱정만 하지 말고, 그보다 하느님을 먼저 섬기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회개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삶의 무게 중심을 자기 자신과 인간적인 안녕 추구에서 하느님께로 옮겨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기에 불안해지고 위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시요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 생각, 행동 방식을 받아 들일 때,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마태 6, 33b)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 수반되는 고통을 피하지 맙시다. 아픈 만큼 성숙하는 법입니다. 회개의 궁극적 열매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 너희 마음 안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자녀들아, 나는 너희가 ‘예’하고 응답하는 것을 보고 싶고, 너희의 삶이 생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인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낮출 수 있는 사람,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출 줄 아는 사람만이 모든 일, 심지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쁘게 ‘예’라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을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자기들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 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 스스로 늘 바치시던 기도임에 틀림 없고, 제자들에게도 늘 이 기도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마음으로 깊이 묵상해봐야 하는 내용이지만 특별히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대목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아버지의 뜻을 항상 우선하셨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마저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으며 아버지께 순명 하셨습니다.    
     “너희의 삶이 생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과 고통이 있더라도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에 순명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희생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순명하는 자세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서 드러나야 하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생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특별한 방법으로 평화, 사랑 그리고 내 마음과 내 아들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를 가져다주는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모성적 축복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려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국의 어느 청년이 군에 입대하여 탱크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훈련 중 탱크 한 쪽 바퀴가 구덩이에 빠져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달려 들어 그를 꺼내려고 해도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탱크를 빼내줄 장비가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홀로 그 탱크를 들어 올려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사실입니다. 이 청년은 한국의 어느 수녀님의 동생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청년의 어머니의 축복이었습니다. 청년이 어렸을 적, 그 어머니는 청년이 학교를 가기 전에 그의 등에 실제로 손을 얹어 등에 매일 십자가를 그으며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사제의 축복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축복은 그 청년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청년의 삶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고, 위 군대에서의 일처럼 초자연적 능력까지 발휘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당신의 모성적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어머니의 축복도 힘이 있는데,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신 그분의 축복이야말로 얼마나 큰 힘이 있겠습니까? 그 축복의 힘은 우리에게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사거나 구할 수 없는 평화와 사랑, 그리고 성모 예수 성심과의 일치를 가져다 줍니다. 성모님의 성상이나 상본 앞에, 혹시 그런 것들이 없는 장소와 상황에 있을 때라도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어머니의 축복을 청하도록 합시다. 

예수님, 당신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양떼가 된 저에게 생명을 주시는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의 생명이 제 안에서 늘 살아 쉼 쉬고 더욱 풍성하게 넘치게 해 주소서. 그러기 위해 저는 오늘 이 순간, 아니 제 삶의 모든 순간 회개하고자 결심합니다.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당신과 당신의 뜻만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예수님,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넘치게 하소서. 

성모님, 당신처럼 저도 제 생의 모든 순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그 뜻을 기쁘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때로 모진 희생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 들이겠습니다. 성모님, 당신의 사랑과 축복 그리고 함께 하심을 청원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저와 함께 하신다는 당신의 그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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