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자비의 때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기도와 사랑 그리고 천국의 표상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시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너희의 마음이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서 너희가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기 위해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고, 너희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자비의 때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기도와 사랑 그리고 천국의 표상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시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너희의 마음이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기를 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을 ‘자비의 때’로 규정하십니다. ‘이 자비의 때’라는 표현에서 큰 기쁨과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치 언젠가 이 때가 지나가고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를 찾을 수 없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때가 진정 하느님 자비의 때임을 느끼고 있다면 그 자비가 주어진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비의 때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더욱 굳은 믿음을 키우라고 촉구합니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기도를 바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라고 촉구합니다.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시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 이 때는 분명 자비의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지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이 지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그 시간은 다가올 것이고, 그 때까지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의 한정된 시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기도와 사랑과 천국의 표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기도와 사랑 그 자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이 지상에 있지만 천국을 그리워하고 그곳에서 사는 것처럼 언제나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평화를 이루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마음은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서 너희가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기 위해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고, 너희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구원과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 그리고 천국의 표상이 되고,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가운데 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계속해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일 후면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희망의 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보내 주셨음을 기억하고,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느님 안에서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대림절에는 우리에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더욱 큰 희망을 둡니다.
성모님은 대림절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지만 구세주의 오심을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택하셔서 그분을 통하여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같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금은 성모님을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보내시면서 우리가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구세주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두고 그 안에서 희망을 가지도록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그 천사 곁에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왜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노래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평화 그 자체이시고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그분의 평화는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온전히 모시고 있으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고정시키고 예수님께만 우리의 모든 희망을 두고 살아가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에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한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느끼고 그의 형제인 사람의 선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한다. 그러니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보통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불안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도 모으고 각종 보험도 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선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손에 놓여 있고 그분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자신의 힘이나 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뜻에 따라 만들어지고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마음을 열기 때문에 생명에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에게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즉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단순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시는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분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한껏 자유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저 나와 다른 사람 혹은 이방인이 아니라 나의 형제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형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가족에게 하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사제, 수도자, 신자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어떤 범주의 사람들만 꼭집어서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자녀들인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은 사랑이고 자유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너희를 얽어매고 너희를 이용하기를 원할 때,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일반적으로 앞에 나오는 ‘그의 형제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명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뜻하는 복수적인 의미의 사람 말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형제로 여기고 그를 존중하고 섬기고 도우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거나 혹은 착취와 억압 그리고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귀한 인간이기는 커녕 그저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되는 비인격적 대상, 더 심하게 말하면 그저 하나의 물건처럼 인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함부로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사기를 치고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하느님을 모르고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여 지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입니다.(마태 23, 1-33 참조)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자유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그런 사람들은 사랑과 자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모릅니다. 대신 그와 정 반대로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사람들을 얽어매고 이용하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이것은 선을 가장하거나 영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 중에 그를 잘 식별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유이시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식별의 기준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없는 관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기 때문에, 너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 주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의 주인공은 성모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의지나 계획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명을 받고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라고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바라시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조력자로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거룩함 속에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조력자로 성모님을 보내 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성모님께 우리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즉 그분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그분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성모님께 청하고, 그를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는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게 되며 매일매일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계속해서 나를 보내고 계시니 기도하고 증거하며 나와 함께 기뻐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고 영원은 너희 존재와 모든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천국이 너희의 목표가 되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계속해서 나를 보내고 계시니 기도하고 증거하며 나와 함께 기뻐하여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 1-2) 이 말씀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저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거룩하니 당신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거룩함의 길을 가는 것은 하느님을 닮고, 그분처럼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의 길을 계속해서 가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물 위로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바라보고 두려움을 느껴 물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 가면서 다양하고 수많은 거센 인생의 바람들을 대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바다에서 거센 바람들을 맞으며 살아 가는 우리를 오직 당신께로만, 또 당신의 거룩하심만을 따라 살도록 인도해 주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특사로 우리에게 파견되고 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거룩하게 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거센 인생의 바람들 속에서도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께 속해 있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하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시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늘 기쁨 속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고 영원은 너희 존재와 모든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라.
어렸을 적에는 언제 어른이 되나 하면서 시간이 아주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어른이 되어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면서 시간이 무척 빨리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긴 것같지만 성모님 말씀대로 짧습니다. 우리 인생의 짧음에 대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 10) 성모님께서는 “눈깜빡할 사이”라는 표현도 쓰신 적도 있을 정도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짧지만 우리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 내세에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원한 삶 혹은 영원입니다. 영원한 삶이기에 그때에는 굳이 나이를 셀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시간의 제한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를 앞서 가신 모든 성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함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성모님은 이 사실을 의식하라고, 이를 유념하라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이를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성모님이 말씀하시는 그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없이 어떻게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 지상에서의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을 늘 영원에 두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는 삶을 여기에서부터 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와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영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든 성인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천국이 너희의 목표가 되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아주 오래 전 부제품 준비 한 달 피정을 할 때 어느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우리 마음은 걱정의 공장이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참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이런 저런 걱정거리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하느라 우리의 마음은 늘 부산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모님은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걱정거리들은 이 지상의 것들과 관련이 있고,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기 위해 대부분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성모님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대신 천국을 그리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 지상의 것들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자문해 보면 답은 ‘살 수 있다.’ 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지상의 것들을 걱정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다 되었고, 또 되어 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믿는 우리가 이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대신 더 기도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천국으로 들어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 27)
우리가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지상의 것들에 매이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그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지상의 것들을 걱정하게 될 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성모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짧기만 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의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최종적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칠십 년, 팔십 년이 아니라 그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아니 햇수 자체가 없는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는 천국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이 지상에서의 모든 것이 그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방향지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돈, 아이디어, 마음, 그외 모든 것 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선하게 쓰여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야말로 참된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기쁨과 평화가 되라고, 내 부름에 응답한 어린 자녀들인 너희 모두를 기쁘게 부르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천국을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가 내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도록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기쁨과 평화가 되라고, 내 부름에 응답한 어린 자녀들인 너희 모두를 기쁘게 부르고 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성실, 온유 그리고 절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갈라 5, 22-23) 즉 이 덕목들은 우리의 힘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은사, 곧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 살아갑시다.”(갈라 5, 25) 라고 권고하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기쁨과 평화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의 위 권고 말씀과 연관지어서 본다면 기쁨과 평화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령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신, 우리의 힘이 이나라 하느님의 힘, 우리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성령께서 임하시어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우리 자신이 기쁨과 평화 그 자체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당신의 메시지 모읍집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에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를 통해 직접 가르쳐 주시고 늘 바치도록 권고하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성령 강림 청원기도로 바치면 좋을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정배 마리아의 힘있는 전구를 들으시어 오소서!”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천국을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여라.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참사람이요 참사람이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이 존재하신다고, 예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그 자리에 바로 천국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현존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모님께서는 기도와 단식, 믿음과 회개를 통해 어떻게 이 천국의 시민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부터 이 천국의 삶을 살게 될 수 있는지 당신의 발현과 메시지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발을 땅에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이고 사는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삶은 천국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들을 낮추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어 그들도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맛보고 천국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를 강력히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천국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그 증거가 가능합니다. 셋째로,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천국을 우리 삶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영적인 삶, 끊임없이 마음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천국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가 내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도록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의 삶을 사실 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마음속에는 오직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을 뿐 그들을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그런 당신의 어머니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세워 주셨습니다.(요한 19, 26 참조)
바로 이 성모님께서 지금 우리를 찾아 오시며 매번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하시며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인종, 종교, 언어, 성, 나이, 문화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이 세상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만이 온 세상 인류를 향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나의 어린 자녀들아!” 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가 내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 그들은 우리의 미움, 단죄나 배척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야 하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두 팔을 벌려 포용해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에게 성모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함께 해 주시고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평화를 얻도록 당신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전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전구를 받아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말고 늘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너희 삶으로 증거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교만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관대해야 하고 내 사랑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티 없는 내 성심에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고,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열리도록 만들어 주는 도구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할 수 없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으며,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해야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기도는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이고, 생사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살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성모님은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데 있어 지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깊이 염려하시면서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염려와 초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있는지, 기도를 자신들 삶의 맨 첫자리에 놓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더욱더 기도에 전념하고, 이번 달 성모님 말씀처럼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정도가 아니라 기도 그 자체가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 사랑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되고 우리에게 큰 은총을 가져다줄 것이며 우리를 더욱더 거룩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너희 삶으로 증거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교만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고,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과 우리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 즉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이 어머니이신 가정에 속해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이처럼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기쁨에 넘쳐 춤을 춰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처럼 사랑, 겸손, 믿음, 기도 그리고 희생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외적인 표지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성모님의 손을 잡듯이 묵주를 우리 손에 들고 그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가 하지 않는가, 혹은 누가 그분의 사람임을 기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려면 그가 묵주기도를 마음을 다해 열심히 바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모님을 성령의 정배로 삼으시고 당신의 아들 성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기쁨으로 알고 그 사실을 삶으로 증거한다면 성부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바치는 기도를 매우 기쁘게 들으시고, 그 지향들을 선으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셨고, 자기를 온전히 내놓으셨습니다. 성모님께는 교만과 이기심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과 이타심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성모님께 속한 사람들, 그분의 자녀들 역시 성모님처럼 겸손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관대해야 하고 내 사랑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티 없는 내 성심에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관대한 사람은 자선을 잘 베풀고 용서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연민할 줄 알고 자신의 것을 사랑으로 나누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줍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당신 사랑의 사랑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부터 이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마태 5, 45 참조)을 온전히 닮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성모님은 우리에게 그 길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되면 그 결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즉 이방인들이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에로 마음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백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의 실천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모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따라 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까지의 세월동안 내 부름에 대한 너희의 사랑과 응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은 기쁘다.
오늘은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40주년 기념일입니다. 40년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성모님께서는 매일 발현하시면서 우리를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까지의 세월동안 내 부름에 대한 너희의 사랑과 응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은 기쁘다.” 성모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응답이 여전히 부족할텐데도 성모님은 그것들을 보고 마음이 기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의 부족함은 기꺼이 참아주시고, 그들의 작은 성과와 노력에는 격려를 보내시며, 앞으로 더욱 분발하도록 어깨를 두드려 주시는 인자하신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앞으로 더욱더 그분의 부르심을 사랑하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그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성모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랑의 경고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주님, 참사람이요 참하느님이신 예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발현 40주년은 큰 분수령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성모님 발현이 어느 순간에든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모님의 부르심과 메시지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강하고 속임수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 어머니의 마음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와 함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성모님과 사탄 사이에 마지막 대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분명 성모님께서 이 전투에서 승리하실 것이지만 아직은 사탄의 기세가 여전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다시 한 번 “사탄은 강하고 속임수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 어머니의 마음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와 함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한 존재들이기에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사탄을 이길 수 없고 그의 속임수들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이 경고하시는 대로 사탄의 존재와 그의 초자연적 힘을 늘 인식하고 그의 속임수들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탄을 이겨낼 수 없지만 하느님의 힘으로는 그를 물리칠 수 있고 그의 속임수들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려면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기도를 바칠 때마다 성모님과 함께 기도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성모님을 부르면서 그분과 함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사탄을 꽁꽁 묶어 그를 꼼짝 못하도록 만드는 무기이고, 우리의 마음을 성모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게 만들고 종국에는 그분의 마음과 하나가 되게 만들어 주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당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평화와 자유를 빼앗아가려고 온갖 속임수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항해야 하고 하느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손에 묵주를 들고 성모님의 손을 잡고 사탄이 아니라 하느님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보호를 받고 그분이 선물로 주신 평화와 자유를 지킬 수 있고, 더 큰 평화와 자유의 선물을 끊임없이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에게 주신 이 세상에서 너희에게 선이 되도록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먼저 창조하신 후 맨마지막에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미리 준비하는 부모들처럼 말입니다. 즉 이 세상과 만물들은 인간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기본 생활 환경들입니다. 당신의 모습을 닮아 창조된 인간을 위해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이 세상은 하느님의 크신 배려이고 큰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를 당신의 모습을 따라 만드시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인 이 세상을 만들어 주신 하느님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고,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언제나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의 체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8)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고 계시니,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성모님의 눈은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저 자녀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한 세상의 부모님들처럼 성모님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행복해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성모님의 눈에 우리도 우리의 눈을 맞추면서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아 듣고 사랑으로 응답한다면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더 기쁘시겠습니까?
성모님의 눈에는 판단과 심판이 없습니다. 성모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더 나은 사람, 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격려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염려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회개의 길로 부르십니다. 회개의 길로 가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입니다. 즉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그분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성서적인 의미의 앎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자신이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우리의 회개는 시작됩니다. 자신이 죄인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회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이렇게 너무나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던 하느님께서 이제는 그 외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고 계십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접으셨다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인류의 반역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고 있는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에 감사하면서 교회와 온 인류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의 참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 15장의 작은 아들처럼 정신을 다시 차리고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 바로 그것 밖에는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죄와 악을 뒤로 하고, 거룩함을 선택하여라. 그러면 기쁨이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고, 너희는 길을 잃어버린 이 세상 안에서 나의 펼쳐진 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세례 예식 집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 버립니까?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하여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죄의 근원이요 지배자인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해서 “예, 끊어 버립니다.” 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부활 성야와 부활절 당일 미사에서 우리는 세례때의 약속을 갱신하며 해마다 같은 질문과 대답을 반복합니다. 이처럼 죄와 악과 그 근원인 마귀를 끊어 버리는 예식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 그리고 하느님께 공적인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죄와 악을 뒤고 하고 마귀을 완전히 멀리하겠다고 다짐하고 그를 실천하게 됩니다. 이 서약과 다짐을 우리 일상에서 생활화하기 위해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이 질문들을 소리내어 스스로에게 던지고 소리내어 대답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위 질문들 첫머리에 나오는 ‘여러분’ 대신 자신의 이름과 본명을 넣고 질문을 소리내어 읽고 소리내어 답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홍길동 베드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 버립니까?” “네, 끊어 버립니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죄와 악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멸망으로 이끌 뿐입니다. 그러니 죄와 악을 가까이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데 절대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죄와 악을 뒤로 하고 거룩함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선택하면 기쁨이 다스리기 시작하고,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이 세상 안에서 성모님의 펼쳐진 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성모님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성모님께서 길을 잃는 세상 사람들에게 들어가실 수 있는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모님을 돕는 길입니다. 기쁨도 얻을 수 있고, 성모님의 사도로서 그분을 도와 드릴 수 있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도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도와 희망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 바람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 ‘나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가?’ 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도와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또 이미 알고 있다면 그 깊이를 더 심화시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온 마음과 몸과 영혼으로 그분을 알게 됩니다. 또 희망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기에 그분께만 모든 희망을 두게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만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를 위해 우리가 당신의 펼쳐진 손,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 대한 성모님의 부르심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마음에 새깁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봄의 색깔들 속에서 너희의 믿음을 증거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제가 사목하고 있는 미국 본당 뒤쪽 산 위에 대단히 긴 자전거길이 있습니다. 자전거길이기는 하지만 저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도 날씨가 괜찮으면 앙상한 겨울 나무들과 누렇게 죽어 있는 풀들을 보면서 그 길을 걷곤 했습니다. 날이 풀리고 서서히 봄이 찾아오면서 그 길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죽은 듯이 보이던 나무들에서 새싹이 트고 잎이 나오고, 풀들은 푸른색을 띄며 이름모를 작은 들꽃들이 하나 둘씩 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시금 깨어나게 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기운을 한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봄의 색깔들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봄의 색깔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쉽지 않지만 대표적인 색깔들을 꼭집어 보자면 연두색, 녹색, 노란색, 흰색 그리고 분홍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색깔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활력 혹은 생기, 온기, 깨끗함 그리고 사랑입니다. 생명이 피어나는 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느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느낌들을 주는 봄의 색깔들 속에서 증거하는 우리의 믿음 역시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하고 따뜻하며 순수한 그런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색깔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야 합니다. (시편 1, 3 참조) 즉,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께 온전히 뿌리박고 그분께 기초를 두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활력와 생기, 따뜻함, 순수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한 그런 믿음이 될 것이고, 우리 영혼과 정신 그리고 마음을 가득 채운 그 믿음은 우리의 얼굴, 눈, 목소리, 자세 등 우리의 몸 전체를 통해 밖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이 희망과 용기의 믿음이 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지금의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셨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으로서는 당연히 그들에게 사전에 알려 주셔야 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의 전도 활동을 도우셨던 성모님은 예수님으로부터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들으셨을까요? 당연히 들으셨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를 알려주는 다른 책이 있습니다. 19 세기 독일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앤 캐써린 에메릭(Anne Catherine Emerich) 수녀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해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들을 적어놓은 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이 바로 그 책입니다. 이 책을 바탕으로 2003년 멜 깁슨 감독에 의해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제작된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한국 가톨릭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월절을 지내는 날 붙잡히고 그 다음날인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며 다시 살아나시어 성토요일 밤 11시에 골고타 언덕에서 성모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금요일 저녁과 성토요일에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홀로 다시 걸으시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예고하셨던 그대로 그날 밤 11시에 골고타 언덕 정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당신을 가장 잘 믿고 따르신 성모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감동입니다.
성모님이 지니셨던 믿음은 희망과 용기의 믿음이었습니다. 당신 눈 앞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펼쳐지는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하셨으면서도 성모님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반에서 오는 회한과 낙담 그리고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용기 있게 다시금 예수님 수난과 죽음의 현장을 걸으시고 그곳에서 기도하고 묵상하시면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시련을 겪으셨지만 그 시련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성모님은 우리도 당신이 지니셨던 그 믿음,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을 지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희망과 용기의 믿음이 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지금의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의 목적지인 천국을 향해 용감하게 가거라. 나는 이 거룩함의 길에서 너희와 동행하고 있고, 티 없는 내 성심 안에 너희 모두를 자리잡게 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 믿기 어려운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라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은 그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 완전히 낙담한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길을 떠났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절망을 서로 토로하던 그들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 함께 걸으셨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주고 받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최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고, 자신들은 그분을 큰 예언자와 해방자로 여기며 기대를 걸었었다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율법서와 예언서에 나와 있는 당신에 관한 말씀들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저녁 시간이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 가시라고 예수님을 초대했으며 예수님은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그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은 다시 발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체험한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루카 24, 13-35 참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처음에는 절망 속에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걸어가시면서 그들과 말씀을 나누시고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속에 희망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는 자신들 앞에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없이 걷는 길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길을 너무도 달랐습니다.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간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그분의 현존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가는 길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의 입을 통해 성경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설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 성경 읽기 그리고 미사 참례를 통해 우리는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참례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시작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이 거룩함의 길에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을 향해 용감하게 걸어가는 그 길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한 손은 예수님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은 성모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행복은 오직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를 포함한 우리 존재 전체의 온전한 의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성모님께서 우리를 티 없으신 당신 성심 안에 자리잡게 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린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해 주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는 내 사람이기 때문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도록 선택받았다. 악마는 평화가 없는 상태와 전쟁을 원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너희 마음을 가득 채우기를 원하지만 미래는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평화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너희를 창조하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 하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린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해 주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린 자녀들아,” 라고 당신 자녀들을 두 번 연속해서 부르십니다. 당신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안타까움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더욱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메시지에 충실하게 응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오늘도 나는,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해 주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당신 자녀들인 우리의 미래를 염려하시고 우리가 늘 희망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강하게 전해져 옵니다. 성모님은 현재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희망의 결핍 혹은 부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다만 우리의 처지를 염려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되고, 거기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게 되기 때문에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주님을 찬양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장)
성모님은 또한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든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그를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서든지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에게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내 도움과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으며 내 견고한 바위와 피신처가 하느님 안에 있네. 백성아, 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 쏟아 놓아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이시다.”(시편 62, 6-9)
너희는 내 사람이기 때문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도록 선택받았다.
‘너희는 내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모님은 우리가 당신께 온전히 속한 사람들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 선택을 받아 그분께 온전히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직접 선택하시어 당신의 사람들이 되게 하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감히 우리가 무엇인데 성모님께서 아무런 주저함없이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뽑으셨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모님과 늘 함께 있어야 하고 그분을 사랑해야 하며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이 원하시는 일만 해야 합니다. 어떠한 순간에서든지 우리는 언제나 성모님 편에 서 있어야 하고 성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으로 성모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도록 선택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으로서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 주변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기쁨과 평화는 주님의 선물이고, 이 선물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항상 성모님 편에 서서 그분의 손을 잡고 그분의 사람으로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악마는 평화가 없는 상태와 전쟁을 원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너희 마음을 가득 채우기를 원하지만 미래는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평화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너희를 창조하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 하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선택하시어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원하시지만, 악마 곧 사탄은 그 정반대의 길로 우리를 끌어당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는 우리에게서 평화를 앗아가고 전쟁을 불러 일으키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불안과 증오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 속에 빠져 하느님을 외면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그분에게서 멀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는 결코 우리의 평화와 구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우리의 멸망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초자연적인 존재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에게 ‘아니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거부의 말을 하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습니다. 약간의 외형적 위협이 있을 수는 있으나 결코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메시지 초반에 성모님은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다시 한 번 다른 각도에서 미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악마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기를 원하지만 미래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기를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던 악마는 거짓말장이였습니다.(마태 4, 8-9 참조)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아니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악마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그분께만 모든 것을 바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 ‘평화의 모후’로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성모님은 오직 우리 미래의 주인이신 하느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사랑으로 주시는 하느님만을 흠숭하고 그분만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잘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성모님 말씀대로 겸손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다음 시편 말씀이 애뜻하고 간절한 기도로 늘 우리 마음 안에서 울려퍼지면 좋겠습니다.
"보소서, 종들의 눈이 제 상전의 손을 향하듯 몸종의 눈이 제 여주인의 손을 향하듯 그렇게 저희의 눈이 주 저희 하느님을 우러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시편 123, 2)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오늘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기도와 단식에로 너희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 어린 자녀들아, 또한 기도와 단식으로 전쟁들도 억제될 수 있다고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하고 있으니 이 은총의 시기을 살고 희망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어린 자녀들아, 믿고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을 가지고 이 은총의 시기를 살아라. 그리고 너희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면 내 티 없는 성심은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평화 없는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고, 너희 마음의 평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오늘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기도와 단식에로 너희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 어린 자녀들아, 또한 기도와 단식으로 전쟁들도 억제될 수 있다고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하고 있으니 이 은총의 시기을 살고 희망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성모님께서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지만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서, 또 오직 그분의 뜻만 따르면서 행하십니다. 겸손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 메시지의 전달자로 우리에게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오늘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기도와 단식에로 너희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메주고리예 당신 발현이 철저히 하느님 계획에 따른 것이고, 그 발현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통해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분의 메시지를 황공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도와 단식에로 부르도록 허락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도 우리가 기도하고 단식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보다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고 단식하기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자신의 회개와 평화 그리고 구원과 직접 관련있는 일들이기에 오히려 그 초대에 감사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려고 애써야 정상일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기도와 단식으로 전쟁들도 억제될 수 있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992년 4월 25일, 2001년 1월 25일과 2003년 2월 25일에도 기도와 단식으로 전쟁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모든 전쟁의 뿌리는 인간 마음속에 있는 미움에서 출발합니다. 사탄은 그것을 더욱 조장하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미움을 증폭시켜 마침내 전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씻어내고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악을 몰아내고 선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불화를 없애고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단식을 해야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기도하고 단식할 수 있는 시간와 여건이 충분하게 주어진 은총의 시기입니다. 지금은 외적으로 코로나 19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때이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전보다 더 많이 집에 머물면서 더 많은 시간 기도하고 단식할 수 있는 최적의 때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기도 그리고 단식과 그외 영적인 활동들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텔레비젼,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과의 거리두기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다음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 7)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 31)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지나간 메시지들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은 지나가고 있다고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희망을 둘 곳은 이 지상이나 이 지상의 물질 혹은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천국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그것을 주실 수 있는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희망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믿고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을 가지고 이 은총의 시기를 살아라.
성모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 은총의 시기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믿고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을 가지고 이 은총의 시기를 살라고 하십니다. 믿음, 신앙 같은 말입니다. 믿음은 유한한 인간의 힘이 아닌 무한하신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섭리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힘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고, 늘 안심할 수 있습니다. 또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도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신기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 20)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21, 21)
그리고 너희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면 내 티 없는 성심은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평화 없는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고, 너희 마음의 평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아기들은 배가 고프고 어딘가 불편하고 몸이 아프면 아주 칭얼거리거나 웁니다. 본능적으로 엄마나 자기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며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아기의 요청에 즉각적인 반응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도움을 청하면 성모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 성모님은 “너희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면 내 티 없는 성심은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평화 없는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평화가 없는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거룩한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이십니다.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인종, 종교, 언어, 국적, 신분 그 어느 것도 제한이 없습니다. 그 성심을 움직이게 하는 단 한가지 조건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성모님은 당신 성심으로 응답하시고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인간이 당신의 도움을 청하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이를 위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전구해 주십니다. 또 그들의 마음 안에 평화가 넘치고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이 우리의 참 어머니임을 알고 그분을 우리 마음, 가정, 교회, 세상 안에 모시고 산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 성모님을 모든 인류의 어머니로 세워주셨고,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도 요한은 그때부터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19, 25-27 참조)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의 어머니로 세워주신 바로 그 성모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품으시고 우리의 현재를 염려하시며 우리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런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분의 부름에 응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