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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Stephen Shin’s Reflections on the Mess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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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와 어우러지게 하여라. 그러면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기쁨이 너희 마음, 가정 그리고 희망이 없는 세상 안에서 느껴지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와 어우러지게 하여라.

지난 10월 메시지에서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성모님께서 이번 달에는 “이 때가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와 어우러지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메시지의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와 선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평화와 선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에게서만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평화와 모든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선물들을 내려 주시도록 겸손하고 간절하게 바치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면서 그들에게 선행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때,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 위해 평화와 선의 선물을 내려 주십니다. 
   날이 춥습니다. 이 추운 날씨를 견디며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옷을 두텁게 입고 장갑을 비롯한 여러 장비로 우리의 몸을 단단히 감싸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는 지금 이 때’를 견디어 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모님께서 그 답을 주셨습니다. 바로 평화와 선행을 위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두텁고 단단하게 무장하여 지금 이 때와 어우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우리 몸을 영적인 갑옷으로 두르고 손에 영적인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기쁨이 너희 마음, 가정 그리고 희망이 없는 세상 안에서 느껴지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현재 세 명의 발현목격증인 마리야, 비츠카 그리고 이반에게 매일 발현하고 계십니다. 이 세 사람의 발현목격증인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이 있는 지역 시간에 맞추어 하절기인 6월에서 9월말까지는 오후 6시 40분경, 동절기인 10월부터 5월말까지는 오후 5시 40분경에 매일 성모님 발현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마리야가 매월 25일 성모님 메시지를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데 이번 달 역시 11월 25일에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메시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마리야가 이번 달 메시지를 받았던 11월 25일 오후 5시 40분경은 이미 세상 곳곳에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특전미사가 봉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미국 시간으로 11월 25일 토요일 오후 4시에 대축일 특전미사를 봉헌하고 제 사무실로 돌아와 이번 달 메시지를 확인하고 바로 우리말로 번역했고, 우리 평화의 모후 사도회는 그를 홈페이지에 올리고 이메일과 카톡으로 많은 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11월 26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지만 그 전날인 11월 25일 저녁부터 이미 이 대축일은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이 대축일에 성모님은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 누리, 즉 우주의 왕이십니다. 이날 미사의 감사송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이렇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그리고 정의와 사랑의 왕이시지만 무엇보다도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평화의 왕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분명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다시 오심을 굳게 믿고 우리의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안에 그분을 기다리는 기쁨이 생깁니다. 아무런 기도 없이 막연히 그분을 기다리거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안에 그분을 기다리는 기쁨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으로 기도하고, 모든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가정 기도를 바치며, 사랑하는 당신 자녀들인 세상 모든 사람들 역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3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 그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이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 그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이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고통을 당했고, 그 피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또 하나의 큰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입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준군사 조직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수천발의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를 응징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며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며 기본적인 생필품도 없는 가운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 역시 하마스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여파는 이웃 중동 나라들과 온 세계 곳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넘실대며 이곳 저곳으로 불어가듯이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전쟁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마인 그는 악과 증오를 퍼뜨리고 평화와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집단들, 가정 그리고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조차도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에 덧붙여 사탄은 각종 대중매체들과 인터넷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 등을 통해서 사람들 정신과 마음속에 악과 증오를 증폭시키고 평화를 깨뜨리며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구의 어느 한 두 곳이 아니라 지구 전역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생명들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서 불고 있는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을 바라다보고 계시는 성모님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수많은 인명 피해 상황 뉴스를 아무런 감흥 없이 남의 일처럼 바라다보고 있는 시청자와 같은 입장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고 부상당하고 극한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비탄 속에서 통곡하시며 그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는 어머니이시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실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이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악과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을 막아내고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특사로 세상에 파견되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회개하게 되며, 그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참평화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가까이 가고, 그분과 하나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한 정치인들의 대화와 타협, 외교적 노력 등을 절대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로는 진정한 평화를 이 땅에서 구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 평화는 절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말 ‘사탄’은 ‘디아볼로’라는 그리스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사탄의 그리스말인 ‘디아볼로’는 그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 ‘디아볼로’는 ‘분열시키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처럼 사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분열시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하나가 되고, 서로 일치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전역에서 불고 있는 이 지구로 보내시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 5)라고 말하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과 달리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앞에 자신을 한껏 낮추셨습니다. 성모님께서 호칭하시는 대로 우리가 그분의 ‘어린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과 같은 겸손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겸손을 바탕으로 성모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모두 행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우리를 단순한 도구나 종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분신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펼쳐진 손인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그 어떤 재능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성모님의 분신으로서 어머니를 도와 세상 구원과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마음과 실천할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2023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근대주의는 너희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너희에게서 기도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정 안에서 기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밤낮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며, 하늘이 침묵하지 않고 이 은총의 장소에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렸던 초창기 그날들에 그랬던 것처럼, 이 어머니의 마음이 기쁨에 넘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근대주의는 너희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너희에게서 기도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대충 대충해서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땀 흘리고 노력해야 그 결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부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도를 잘 하게 되거나 믿음이 깊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높은 성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힘을 다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하던 기도의 자세나 양보다 더 특별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기도에 더 큰 관심과 노력 그리고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에 힘을 다한다는 것은 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에 전념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까? 근대주의의 위협 때문입니다. 근대주의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전통이나 권위 등에 반대하여, 근대의 과학이나 문화에 의해서 자유 평등한 근대인으로서 살아가려는 개인주의의 입장입니다. 왜 성모님은 이 근대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그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간의 이성만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근대주의는 너희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너희에게서 기도의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 위에서 말한 근대주의가 우리 생각 속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기에 하느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과 신비는 이 세상과 인간의 삶 속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자신만의 문명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근대주의는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으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과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의 중심인데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 근대주의에 따르면 기도는 낡은 구태이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신비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인간은 참 인간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 그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늘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이성, 즉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 생명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대주의는 탈신화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 아니라 그저 높은 경지의 도덕 교사나 예언자 정도로만 인식됩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아니라 그 옛날에 왔다가 가버린 한 사람의 현인으로 인식되기에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근대주의가 우리에게서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빼앗아 가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정 안에서 기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밤낮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며, 하늘이 침묵하지 않고 이 은총의 장소에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렸던 초창기 그날들에 그랬던 것처럼, 이 어머니의 마음이 기쁨에 넘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1981년 메주고리예 발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가정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린아이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가 가정의 첫 자리를 차지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사탄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인간 사회의 기초이고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인 가정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가족들이 함께 기도를 해야 그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게 되고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이 기도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분명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초창기부터 끊임없이 가족이 함께 모여 가정 안에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정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가정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가정 기도를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우리 가정 안에서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적어도 매주 한 번씩 모여 함께 기도하고, 매주 한 번씩 하고 있다면 그 횟수를 더욱 늘려 매일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 기도가 하나의 형식적인 습관이 되어 있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열성과 진지함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가정 안에서 기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발현 초창기에 성모님께서 가족이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하라고 했을 때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 신자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성 야고보 본당과 마을에서는 밤낮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은총의 장소에 평화와 축복이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를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정도 그렇게 함께 기도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은총의 장소가 되고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기를 바라십니다. 세상과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인 우리 가정이 새롭게 기도함으로써 근대주의와 그 뒤에 있는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가정과 세상 그리고 교회를 지켜 내기를 원하십니다. 기도의 힘, 특별히 가정 기도의 힘을 믿고 그를 실천에 옮기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함께 기도합시다.

   
 
 
2023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 중에 너희의 마음을 천상으로 들어올려라. 그러면 너희를 치유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너희 마음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로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 중에 너희의 마음을 천상으로 들어올려라.

성모님께서는 그동안의 메시지들을 통해 수없이 ‘은총의 시기’에 대해 언급하셨고,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다시 한 번  지금 이 시기를 ‘은총의 시기’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이에 대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 그 은총을 전달해 주시는 성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맙기만 합니다. 다음 시편 말씀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 5)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라고 이 시기를 ‘은총의 시기’로 특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번 달 메시지를 읽으면서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시기가 끝나는 때, 그 이후를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성모님께서 “이제 이 은총의 시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으니 그 이후를 대비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지금의 이 은총의 시기를 끝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시간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시간이 끝날 때를 염두에 두고 그때를 미리 잘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은총의 시간을 잘 살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 41-45)
   1981년 6월 24일 메주고리예에 처음 발현하셨던 성모님은 발현 3일째 되는 6월 26일 여섯 명의 발현목격증인들에게 공동으로 발현하신 후 홀로 발현산을 내려 가던 마리야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성모님 뒤로 십자가가 있었고 성모님께서는 슬픈 표정으로 마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평화, 평화, 평화, 오직 평화만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성모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 평화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셨고, 지난 42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에게 평화에 도달하는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고, 이웃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해야 회개하게 되고 강한 믿음을 지닐 수 있고,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며 그때 비로소 평화를 선물로 얻게 되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그러하시지만 이번 달 메시지에서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십니다. 바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우리의 입과 귀와 눈을 다 사용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우리를 자칫 위선자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매일미사를 다니고 무척 열심히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대단히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하며 그 얼굴에서 전혀 평화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습관적으로, 입으로만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 중에 너희의 마음을 천상으로 들어올려라.” 하신 성모님의 말씀은 자연스럽게 미사 감사송 도입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감사송 직전에 사제와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받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립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미사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 지상에 있으나 우리의 마음은 늘 천상에 계신 주님께로 들어올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천국과 주님을 향해 있어야 우리는 이 지상에서 살면서도 거룩함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천상으로, 주님께 들어올려드릴 때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봉헌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기에 우리 존재 전체를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매순간 끊임없이 천상 주님께 맡겨 드리게 만들고, 주님께서는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어 당신의 마음과 같이 거룩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어 우리에게 다시 내려 주십니다. 그렇게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거룩하고 새롭게 만드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를 치유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너희 마음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로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가 기도 중에 우리 마음을 천상으로 들어올리면 그 마음은 우리의 천상 아버지 하느님 손에 도달하게 됩니다. 당신 손에 봉헌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그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우리 존재의 중심인 그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다면 그를 치유해 주실 것이고, 더러워져 있다면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입니다. 만일 그 마음이 굳어져 있다면 다시 부드럽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주 심한 경우 도저히 우리의 마음이 치유 불가능한 상태라면 새로운 마음을 넣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 25-26)
   우리가 기도 중에 우리의 마음을 천상으로 들어올렸을 때 천상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당신의 마음에 넣고 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마음속에 가득 찬 그분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 그 사랑을 저절로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극히 우리 중심적이고 너무도 쉽게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는 우리를 끊임없이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는 분이 필요합니다.  메주고리예에서 지난 42년 동안 매일 같이 발현하고 계시는 우리의 어머니, 평화의 모후 성모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문에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로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은총의 시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의 부름에 온 마음을 다해 응답합시다.

   
 
 
2023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고 계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의 기도와 희생을 봉헌하여라.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평화가 없는 모든 마음을 위해 사랑과 평화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고 계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의 기도와 희생을 봉헌하여라.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를 통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의 주인공은 성모님 자신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은 스스로의 원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명에 의해 우리를 사랑하러 오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곧 신적이고 천상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게 하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는 성모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주신 두번째 사명은 바로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 성모님은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너무도 잘 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멸망하고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원되어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메시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 그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나 힘만으로는 회개의 길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이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도록 우리에게 그분을 보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인도를 받아 회개의 길로 가려면 우리는 전적으로 성모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모두 뒤로 하고 오직 성모님의 메시지에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성모님께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모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요? 먼저 매일 그분의 메시지를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평화의 모후 사도회에서 발간한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책 『사랑하는 자녀들아』를 읽거나 아니면 사도회 홈페이지 www.aqop.org에 접속하여 하나, 둘 혹은 그 이상의 메시지들을 매일같이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나간 메시지일지라도 그 메시지를 읽는 그 순간 성모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의 시작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부분에서 자녀들 대신 자신의 이름과 본명을 넣어 메시지를 읽으면 성모님께서 그 메시지를 바로 자신에게 주시는 것으로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면 좋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어 저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이 메시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와 함께하시면서 제가 이 메시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머니의 전구를 통해 제가 주님께 구원과 평화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도 저를 잊지 않고 저를 찾아주시어 함께 동행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고 한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창조주이시고 그들의 아버지이시기에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하느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종교, 인종, 언어, 국적, 피부색, 나이, 성별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봉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희생 봉헌이 하느님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을 그 사랑 가까이 데려오고,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그 사랑을 알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 값진 이웃 사랑 실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평화가 없는 모든 마음을 위해 사랑과 평화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도 바오로는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 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어야 이것이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 마음에 사랑과 평화가 있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할 때 그 기쁨은 배가 되고, 우리가 우는 이들과 함께 울 때 그 슬픔은 반으로 적어집니다.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누군가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평화를 우리 안에 간직하고 살면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그 평화가 임하도록 기원해 주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하여 나는 이르네.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시편 122, 6-8) 이렇게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평화를 빌어주는 시편저자처럼,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평화가 없는 모든 마음을 위해 평화를 빌어주고 그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2023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 가운데 머물면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너희의 어머니가 되며 너희의 피난처가 되게 해 주신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를 많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 가운데 머물면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너희의 어머니가 되며 너희의 피난처가 되게 해 주신다.

성모님께서 이 지상에 사실 때 그분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수님 잉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여기시며 모든 순간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성모님에게서 태어나고 그분에 의해 길러지고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그분의 아들로 사셨던 예수님은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모범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의해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고, 성모님의 모범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가장 먼저라는 것을 배우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히브 10, 7)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 42) 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 10)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원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고 영원한 생명의 문이 닫혔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름으로써 원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죄와 세상의 죄까지도 사해지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 바로 구원의 길임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4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42년전 성모님이 메주고리예에 처음 발현하신 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모님께서 매일같이 계속 발현하고 계시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과 허락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늘 메시지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를 분명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 가운데 머물면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너희의 어머니가 되며 너희의 피난처가 되게 해 주신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 우리 가운데 머물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머물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며 우리의 피난처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성모님께서 머무르신다는 사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우리를 염려하고 사랑하시며 극진히 돌보신다는 표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이 우리들 가운데 머물면서 우리를 위해 일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며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성모님은 순전히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일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힘이 나지 않습니까? 언제나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무한히 사랑해 주시는 성모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가장 어렵고 힘겨운 순간에 도움을 청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 드릴 수 있는 우리의 피난처 성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로와 용기가 샘솟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성모님께서 우리 가운데 머물고 계십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만일 우리가 성모님처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어머니처럼 그를 한없이 사랑하고 품어 주며, 도움과 보호를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를 많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성모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무려 42년의 세월이 지나갔는데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왜 성모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부르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분께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부름에 응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모님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어린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성모님은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를 염려하기 때문에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밖에서 열심히 뛰어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녁을 먹으라고 큰 소리로 저를 불러도 그 소리가 제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놀이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겨 있었기 떼문입니다. 이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놀이기구들을 접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살게 하는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의 집이신 하느님께로 가서 기도를 통해 그분이 주시는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많이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는 성모님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합시다.

   
 
 
2023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으로 나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기도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가지고 계시는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의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으로 나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기도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자연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말씀과 손길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꽃이든 그저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듯이 보이는 들꽃이나 별볼일없어 보이는 잡초든 다 그분의 작품이기에 귀하기만 합니다. 인간의 머리, 과학기술, 손으로는 그 흔하디 흔한 잡초, 들꽃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자연에 나가면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업적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가르쳐 주고, 우리 인간의 미소함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아주 훌륭한 교과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자연으로 나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세상의 소리와 우리의 생각을 접고 오직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의 모든 것들과 함께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높이 올려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 말씀처럼 자연으로 나가 우리의 마음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열어 드리고 그분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기도한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 마음에 들려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이 시작되는 곳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열리고 움직여야 사랑이 시작되고 자라납니다. 자연으로 나가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성모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열어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우리는 기도하게 되고 그 가운데 우리 마음과 귀가 열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산책하는 성당 뒤쪽 산 중에 있는 자전거 길가에는 수많은 이름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오늘도 성모님 메시지를 번역하고 그곳엘 갔는데 그 꽃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주 작은 들꽃 하나를 들여다 봤습니다.  ‘어느 인간이 이처럼 작지만 아름다운 꽃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감탄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 작고 아름다운 들꽃을 만드실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6, 28-30)
   하늘의 새들도 다 먹여 주시는 하느님(마태 6, 26 참조), 가축에게도, 우짖는 까마귀 새끼들에게도 먹이를 주시는 하느님(시편 147, 9 참조)은 그것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시편 104, 27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 29) 그런 하느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예수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0-31)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말씀입니까? 자연에 나가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지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가지고 계시는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의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열한 사도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 4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들은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때까지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습니다.(사도 1, 14 참조) 그리고 예수님 승천 후 열흘째가 되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그들 위에 내려오셨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룩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예수승천대축일은 5월 18일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5월 21일 주일에 이 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를 5월 25일에 주셨고, 성령강림대축일은 5월 28일입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 사도들이 성모님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던 그 시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이때에 우리는 성령의 힘을 느낄 수 있기 위해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모님 그리고 온 교회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면서 성령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은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9-13)

   
 
 
2023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희의 삶을 통해 회개와 거룩함의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을 때 비로소 바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심지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정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그에 목마르고 늘 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사랑과 마음과 존재 전체를 드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도구 삼아 그분과 대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은 사람의 언어이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거나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적이 있어도 이제는 그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입니다.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 아닌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 재물이나 쾌락 그리고 오락 등에 모든 시간과 마음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리는 없고, 당연히 기도 역시 그 자리가 없습니다.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도가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뒤에 있거나 아예 아주 순위 자체를 두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기도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아니 최고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기도를 우리 삶의 맨 첫자리에 두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죄 중에 있거나 늘 죄와 유혹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우리를 유혹하고 죄짓게 합니다. 죄 지은 사람은 원죄를 짓고 하느님의 눈을 피해 자신의 몸을 숨겼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에게서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죄의 속성과 결과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끊어버리게 만듭니다. 죄 짓게 되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 역시 어렵게 됩니다. 심지어 기도에서 손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사람, 기도를 우리 삶의 맨 첫자리에 두는 사람 그리고 죄를 피하고 매일같이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부활시기에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과 몸짓 그리고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희의 삶을 통해 회개와 거룩함의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기도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을 회개와 거룩함의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위해 가장 우선하는 전제조건은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야 우리가 내외적으로 회개하고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기도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통로가 되고, 그 사랑이 그들에게 전해 주는 전도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 흘러들어가는 예수님의 그 사랑이 그들을 회개하게 만들고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면 그들 역시 여전히 기도에서 멀어져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랑이 흘러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연결 통로, 전도체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도로 불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명을 받고 매일매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파견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 거울로 매일매일 파견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3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달 성모님 메시지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메주고리예 야고보 본당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위와 같은 이번 달 메시지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왜 이렇게 메시지가 짧지? 혹시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나머지 부분들이 누락되어 홈페이지에 올라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주고리예 메시지 관련 다른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봤습니다. 역시 같은 짧은 메시지였습니다. 요즘 들어 이처럼 짧은 메시지는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짧은 메시지를 대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87년 1월부터는 매월 25일에 메시지를 주고 계시지만, 발현 초기인 1984년 3월 1일부터 1987년 1월 8일까지 성모님께서는 매주 목요일에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1984년 4월 26일, 5월 31일, 6월 14일, 6월 28일, 1985년 9월 19일, 이렇게 다섯 번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짧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와 한마음이 되어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1984년 4월 19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1984년 6월 21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1984년 8월 23일) 
   흥미롭게도 이 세 개의 짧은 메시지들 모두 기도에 관한 메시지들입니다. 지난 42년 동안 성모님께서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 바로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발현 초기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시는 성모님께서는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결코 지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회개할 수 없고, 믿음도 성장하지 않으며, 하느님 가까이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그 무엇보다도 기도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에 매일같이 물을 주고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고, 살아 있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메말라 죽고 맙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숨을 쉬어야 우리 몸이 살 수 있듯이 기도해야 우리 영혼이 숨을 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전히 기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발현 초기의 메시지처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그에 응답하여 매일같이,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다면 성모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 당신과 한 마음이 되어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라는 이번 달 메시지를 접하면서 언젠가 이와 거의 같은 메시지를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2009년 7월 25일이었습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번 달 메시지와 비교하여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 외에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2009년 7월 18일 저는 수련기를 마치고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기 위한 첫서약을 했습니다. 2주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한국에 가는 대신 메주고리예 순례를 갔습니다. 이제 겨우 첫서약을 한 유기서원자 신분이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갈색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복을 입고 메주고리예 순례를 했기 때문에 기분이 아주 남달랐습니다. 수련기 동안에는 메주고리예를 갈 수 없었고, 이제 한 고비를 넘었으니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꼭 메주고리예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제 개인적으로 뜻깊은 메주고리예 순례 중 7월 25일에 오늘과 거의 비슷한 성모님 메시지를 받았고, 짧지만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성모님은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모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변함 없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충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기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성모님은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이 귀한 시기를 보다 더 귀한 시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또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죽음입니다. 멸망입니다. 이것을 막는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고, 그분과 하나가 되며 그분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우리가 하느님의 전 인류 구원 계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 뜻도 알게 됩니다. 기도해야 생명과 구원의 길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이제 구원의 때가 찼습니다. 지금 이 시기가 구원의 때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성모님 말씀처럼 이 시기를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의 때가 되게 한다면 우리는 그 구원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당신의 부름에 응답할 것이라고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2023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회개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의 회개만 필요하다면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로부터 회개해야 하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느님을 잊고 살기 때문에 거듭거듭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눈을 감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서야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고 짓지 않아야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해서 거기에서 실망하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첫번째 교황이었던 베드로 사도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성목요일 밤 예수님께서 곧 붙잡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사도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성전 경비병들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을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저 가야파의 관저로 끌려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대사저의 관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의 두 여종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세 차례나 물었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심지어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 때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나옵니다.(마태 26, 31-35;69-75 참조)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하늘로부터 환시를 받아 쓰여진 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대사저의 관저를 나오다가 그 안에서 그는 사도 요한이 모시고 온 성모님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 그를 안타까우면서도 여전히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성모님의 그 눈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속 참회하고 회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그의 배반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요한 21, 15-17 참조)

   베드로처럼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한 사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유다 이스카리웃 입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와 함께 게세마니 동산으로 와서 예수님의 체포를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뉘우치고는 은전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에게 돌려 주고 나가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마태26, 14-16, 47-50; 27, 3-5 참조)

   베드로와 유다가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잠시 뉘우치기는 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막아 버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히 죄를 피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다는 외적인 표징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한 달에 여러 번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주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우리는 계속 회개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대신하는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받을 때 우리에게 엄청난 하느님의 자비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입는 자루옷을 속죄할 때에도 입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재나 흙을 얹고 자루옷을 입고 단식하며 속죄했습니다.(느헤 9, 1 참조) 그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데 그 옷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의 자루옷과 같은 그 어떤 외형적인 옷이 아니라 속죄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우리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고 그 죄를 기워 갚기 위해 기도, 단식, 그외 자선 활동 등을 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속죄의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를 오르시고 거기에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속죄의 옷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옷을 입을 차례입니다. 우리 죄와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십자가 속죄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저는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이기 때문에 긴꼬깔 모자가 달려 있는 갈색 수도복을 입습니다. 이 수도복은 제가 누구인지를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징입니다. 저는 수도복을 입음으로써 제 자신이 수도자임을 더욱 자각하게 됩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동네에서 마트에 갈 때도, 다른 볼 일들을 볼 때도 수도복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우리 신자인 필리핀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 이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남자이기에 늘 눈에 띄지만 제 수도복 착용 때문에 더욱 도드라집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도복 착용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 증거라고 생각되기에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게다가 제가 처음 수도복 착복을 할 때 ‘프란치스칸 수도복은 십자가의 형상이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수도복을 입고 다니려고 노력합니다. 어찌보면 수도복은 제게 속죄의 옷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 6)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원죄를 짓게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우리의 첫 선조를 유혹한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다른 피조물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그들을 유혹했고, 그들은 그 거짓말을 참으로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고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거짓말장이인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 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던 그분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사탄의 거짓말 유혹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마태 4, 1-11 참조)

   예수님까지도 유혹했던 그 사탄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영혼들을 파괴하기 위해 그의 졸개 마귀들과 함께 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모님 메시지처럼 그는 우리를 포함한 온 인류를 유혹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의 거짓말은 무척 달콤하고 근사하고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는 우리의 행복이나 생명, 구원과 평화에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그는 우리를 거짓말로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사탄의 거짓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눈 앞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선악과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생명 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우리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쳐다보고 살아났던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민수 21, 9 참조)

사탄은 심지어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더 많이 가지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온갖 것을 소유하고 갖은 욕망에 우리 자신을 맡기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고 물질과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며 그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택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죄를 속죄하고 원죄로 닫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모님 말씀처럼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갈바리아를 향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예수님 잉태를 예고하기 위해 성모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최초 만민의 어머니 하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을 듣고 죄를 지어 인류에게 죽음을 불러 들였지지만 새로운 만민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낮추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심으로써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그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 명령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라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그런 자세 자체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 모범을 따르면서 그분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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