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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내 아들과 나는, 너희 각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기쁘게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그를 증거할 수 있도록, 너희에게 풍성한 기쁨과 평화를 주고자 한다. 어린 자녀들아, 축복과 평화가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내 아들과 나는, 너희 각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기쁘게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그를 증거할 수 있도록, 너희에게 풍성한 기쁨과 평화를 주고자 한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현장에서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자리는 어디 입니까? 먼저 가정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가정 안에서 우선적으로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첫 번째로, 가족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고 용서입니다.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 존경심 그리고 용서가 없다면, 그 가정에는 절대로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예수님 평화와 기쁨의 사도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우리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존경심 그리고 참된 용서가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과 평화로 늘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선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집니다. 물론 그를 얻기 위한 우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세 번째 요소인데 우리의 개인 기도와 공동으로 바치는 가족 기도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개인 기도를 바칠 때,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매일, 아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가족들이 모여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예수님과 성모님께 자신들의 가정을 봉헌한다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그 가정에 평화와 기쁨을 풍성하게 내려주지 않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학교, 직장, 이웃, 성당 그리고 세상 전체입니다. 비록 우리가 우선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사도적 열성은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가정 밖의 인간 관계, 예컨대 친구, 직장 동료, 성당 교우, 이웃, 심지어 업무상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사명 이전에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경쟁심 그리고 미움이 아니라 환대와 협력 그리고 사랑입니다. 항상 그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다른 이들과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축복과 평화가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제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으로, 예수님 평화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과 평화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늘 안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명을 구체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사제를 통하여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고 당신의 평화를 나누어주시듯이 우리도 말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볼 때마다 먼저 마음 속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 이 사람을 축복해주십시오. 이 사람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실제로 만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축복과 평화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축복과 평화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성모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과 평화가 되어 준다면, 누군가 역시 우리에게 축복과 평화가 되어 줄 것이고,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그 축복과 평화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평화와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제 삶에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제 마음을 활짝 열고 청하오니 당신의 평화와 기쁨으로 제 마음을 가득 채워 주소서. 그리하여 저를 통해 제 가족과 친구, 동료, 이웃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평화와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주소서. 

성모님, 제가 어느 곳에 있든지, 또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당신이 요청하시는 것처럼 늘 축복과 평화가 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당신의 어린 자녀로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행함으로써 기뻐하게 하소서.
   
 
 
2010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며 희망과 쉼도 없이 허기진 너희의 마음에서 죽음을 목격한다. 너희가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에게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열어라. 너희의 마음을 하느님의 자비에 열어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고, 그분께서 평화이고 너희의 희망이시기에, 너희 마음은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며 희망과 쉼도 없이 허기진 너희의 마음에서 죽음을 목격한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대단히 심각한 톤으로 우리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말씀하고 계시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불신앙과 죄로 인해 우리 마음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거두어 내고, 우리 마음에 생기를 불어놓고자 하시는 어머니의 자비로운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불안한 가운데 텅 빈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까? 먼저, 하느님 아닌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쾌락, 그리고 사람이나 일 혹은 성공에 대한 집착 등으로 우리의 온 관심이 세상적인 것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닌 세상적인 것을 쫓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참된 희망도 잃어버리며, 영적으로 피폐해지기 마련입니다. 비록 겉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 놓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근사해 보여도, 천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 모든 것이 빈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 영혼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의 눈과 성모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단편적인 것 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천상 어머니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에까지 이르는 중한 병에 걸려 있는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 그와 같은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사목하던 본당에서 개최된 알코올 중독자들의 단주 모임인 AA(Alcoholic Anonymous)를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12단계로 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첫 단계인 자기 소개 시간이 아주 단순해 보였지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냥 자신의 이름을 대지 않고, 반드시 ‘알코올 중독자 ooo’ 라고 말하며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치유의 첫 걸음이 바로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가 시작되듯이, 또 우리의 회개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통회와 죄 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치유는 성모님께서 진단하신 바대로 우리의 마음이 현재 그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에게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정화할 능력을 우리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자신이나 어떤 조직이 자정능력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처럼 현재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인류는 영적 자정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스스로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음으로써 영적으로 죽음의 길을 가고 있기에,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천상에서 개입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모님을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입니다.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주고 계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하느님의 자비인지 모릅니다. 성모님 자신이, 또 그분이 우리에게 오고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큰 표징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성모님을 통하여 희망과 기쁨을 얻도록 허락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너희 자신을 열어라. 너희의 마음을 하느님의 자비에 열어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고, 그분께서 평화이고 너희의 희망이시기에, 너희 마음은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 자신을 누군가에게 연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삶에 함께 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때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도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열라는 성모님의 초대는 하느님을 우리 삶에 모셔 들이고, 그분께 우리 삶의 통제권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외부의 상쾌한 공기를 받아들이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문이나 창문을 열어야 가능합니다. 또 힘차게 떠오른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밤새 닫혀 있는 커튼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마음에 들어올 수 있기 위해서는 기도와 의탁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30)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까?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은 그분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의탁하면 그분은 우리 마음과 삶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즉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단 한가지는 평화와 희망 그 자체이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에게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 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제가 빛으로 착각하고 있는 제 마음의 어둠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저의 인간적인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면서도 선을 가장하는 일이 없도록 제 마음을 밝혀 주소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참된 겸손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바쳤던 세리처럼, 저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루카 18, 13 참조)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성모님, 당신은 저희를 평화와 희망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인도해주시는 희망의 별이십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저 자신과 제 마음을 하느님의 자비에 열고자 하오니, 제가 진정으로 기도하고 의탁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해 주님께 전구하여 주소서. 2011년 새해 저의 모든 시간과 발걸음을 어머니 손에 맡겨드리오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하여 주소서.
   
 
 
2010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회개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싶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여라. 그들이 너희에게 모범과 자극이 되고 너희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기쁨이 되기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회개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싶다. 

지난 8월 성모님께서는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개인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두 달이 지난 10월 25일, 성모님께서는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라고 말씀하시며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한 달 걸러 다시금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은 그만큼 그 메시지가 중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여전히 그 메시지를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고 말씀하실 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눈길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의 삶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 위험에 처해 있는 자녀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그분의 자비로운 눈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기를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의 때가 되게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열게 만들어주는 열쇠이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나는 회개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싶다.” 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이 시기에 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셨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월 25일 메시지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회개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싶다.”고 말씀하신 성모님께서는 11월 2일 미리야나를 통해 주신 메시지에서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어머니의 끈기와 사랑으로, 너희 안에 있는 죽음의 어둠을 없애기 위해 너희에게 생명의 빛을 가져다 주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나를 거부하지 마라. 멈추어 너희 자신을 들여다 보고, 너희가 얼마나 죄스러운지 깨달아라. 너희의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바쳐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는 자신이 나약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강하고 위대하게 될 수 있다. 깨끗해진 너희 마음을 내게 주면, 나는 생명의 빛이신 내 아드님이 그 마음을 밝혀 주시도록 할 것이다. 고맙다.”     
     성모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스러운지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멈추어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멈추어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즉 기도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 드리워진 죽음의 어둠을 없애기 위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가져다 주시는 성모님께 협력하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의 죄스러움을 깨닫고, 그 죄를 진심으로 통회하며,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다시 깨끗하게 됩니다. 기도는 회개의 전제 조건이고, 고해성사는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여라. 그들이 너희에게 모범과 자극이 되고 너희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기쁨이 되기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와 같이 이 세상을 살다 지금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기도에 열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항상 일치를 이루고 싶어 했기 때문에, 기도가 그들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늘 기도했고,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우리와 같이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죄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참회와 기도를 통해 회개의 길을 걸었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모든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강하고 위대하게 되었던 그들은 이제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천상 교회의 구성원이 된 성인들은 순례 중에 있는 지상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우리의 영적 형제자매로 존재하며,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바로 이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를 위한 중재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매일 모든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치면서 그들의 전구를 청하면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자신의 수호 성인과 그 외 자신에게 친근한 혹은 알고 있는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를 위해 빌어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혹은 마음으로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전구를 하느님께 바쳐줄 것입니다. 또한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족, 친구, 그 외 다른 협력자들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 천상의 성인들을 우리의 영적 가족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시다. 

하느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해야 하는 때임을 가르쳐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기도하는 가운데 제 마음과 영혼을 들여보며 제가 얼마나 죄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빛이신 당신 아드님의 성령을 보내주소서. 하느님, 저의 모든 죄를 당신께 고백하며 당신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오니, 죄로 인해 제 안에 드리워진 죽음의 어둠을 없애 주소서. 

성모님, 당신의 메시지대로 저 자신의 회개와 성화를 위해 기도하며,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겠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모후이신 성모님,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모범을 본받고, 저 또한 이 지상 삶을 사는 동안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과 또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저를 계속 이끌어 주소서.
   
 
 
2010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어머니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평화의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너희가 여전히 나약하고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믿음의 삶을 살라고 너희를 재촉한다. 어린 자녀들아, 말은 적게 하고 너희 개인의 회개를 위해 더욱 힘쓰라고 너희에게 촉구한다. 그러면 너희의 증언이 열매를 맺게 되고, 너희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가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어머니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평화의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제 사무실 책상 앞쪽에 성모님께서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껴안고 계시는 액자 그림이 놓여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모님의 품에 자신의 온 몸을 내맡겨 안기신 모습이고, 성모님께서는 두 팔로 교황님을 감싸 안고 계신 모습입니다. 물론 이 모습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상상의 그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 자녀들에 대한 성모님 사랑이 어쩌면 저렇게 잘 표현되어 있을까!’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모님 발현목격증인들처럼 그분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뵈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뵙지 못한다고 해서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아니 그분은 세상의 어머니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면서 그분의 이름을 계속 부를 수 있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그분의 사랑과 현존을 느끼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성모님 상본이나 성모상이 있다면, 가슴에 안고, “당신의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오늘 이 자리에 저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시고, 오늘 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더욱 더 굳게 믿을 수 있도록 저의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다면, 분명 그분의 사랑과 현존을 더욱 강력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1981년 6월 24일 이래 지금까지 메주고리예를 통해 계속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분은 진정 평화의 모후, 평화의 여왕이십니다. 이사야서 7장부터 9장의 말씀은 동정녀를 통해 태어날 임마누엘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9장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이사 9: 5-6) 이처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 예언과 함께 성모님도 성부 하느님께로부터 이미 평화의 모후로 불리움 받으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바로 그 평화의 모후께서 이번 달 메시지에서 우리에게 어머니로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평화의 축복으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평화의 축복은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삶과 마음에 늘 함께 하시도록 만들어주는 축복입니다. 평화의 모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바로 평화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주고자 하십니다. 너희가 여전히 나약하고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믿음의 삶을 살라고, 너희를 재촉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을 때,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5. 37)고 답했고,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라고 응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에 자신의 약함을 겸손하게 맡겨드리신 성모님의 믿음에 찬 응답이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으며 겸손하게 그 힘을 청하는 사람에게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이 함께 합니다.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서 힘을 얻고 겸손해지려면,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말은 적게 하고 너희 개인의 회개를 위해 더욱 힘쓰라고 너희에게 촉구한다. 그러면 너희의 증언이 열매를 맺게 되고, 너희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가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말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필요한 말들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데없는 말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컨대, 잡담, 험담, 자기자랑 등을 과장, 왜곡, 혹은 심지어 거짓까지 보태 가면서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말 때문에 많은 실수를 범합니다. 그렇기에 야고보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야고 3, 2-3. 8)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혀를 다스리고 길들여야 하겠습니까? 아주 간단하지만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으로 표현해보면.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우리를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하느님과의 대화를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환경입니다. 침묵이 있는 곳에서 우리 개인의 회개도 손쉽게 이루어집니다. 회개는 마음과 삶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꾸고, 그분께로 마음을 온전히 향하는 것이기에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하느님께 깊숙이 잠길 수 있는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그 조건이 바로 침묵입니다. 침묵으로 가득한 기도와 개인적인 회개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말을 적게 하고, 너희 개인의 회개를 위해 더욱 힘쓰라고 너희에게 촉구한다.”     
     말을 적게 하고, 그 대신 침묵 가운데서 기도하며 자신의 회개를 위해 애쓴 사람이 자신의 모범과 말을 통해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고, 또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변화됨으로써 그 주위에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다 보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기도가 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2010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크게 기뻐하며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너희를 다시 부르고 싶다.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개인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하루를 지내는 동안 차분하면서도 기쁘게 기도할 장소를 찾아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크게 기뻐하며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너희를 다시 부르고 싶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에서 “나는 하느님 대전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모님께서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모든 이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도 기도를 통해서 언제나 하느님과 하나 되어 계시고,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늘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십니다.     
     기도의 여인이신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에서 다시 한 번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비록 숫자로는 세 번이지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최고 강조입니다. 왜 성모님은 여전히 또 그처럼 간절하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며, 그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개인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하루를 지내는 동안 차분하면서도 기쁘게 기도할 장소를 찾아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시편 139장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이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개인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또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만일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0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다시 한 번 나는, 기쁘게 나를 따르라고 너희를 부른다. 나는 너희 모두를 너희의 구원자이신 내 아들에게로 이끌어 주고 싶다. 너희는 그분 없이 기쁨과 평화, 미래 혹은 영원한 생명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쁘게 기도하고 의탁해야 하는 이 시기를 잘 활용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다시 한 번 나는, 기쁘게 나를 따르라고 너희를 부른다. 나는 너희 모두를 너희의 구원자이신 내 아들에게로 이끌어 주고 싶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기쁘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과연 우리가 얼마나 성모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묵상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따라간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따름과 신뢰의 상관관계는 세 가지 양상으로 표출됩니다. 먼저 아무런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는 사람을 절대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완전한 신뢰가 없다면, 주저와 의심 속에서 마지 못해 겨우 따라가면서 여차하면 자신이 원하는 길로 되돌아가려고 기회를 엿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한다면, 그가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든지 그 선함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걸고 그를 따라가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 범주에 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기쁘게 당신을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기쁘게 성모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자발성과 감사를 드러냅니다. 타의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모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따라 나서기에 기쁜 것이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시기에 고마운 것이고, 당연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쁘게 성모님을 따라가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종착지는 예수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 기쁘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 모두를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지난 과거의 모든 성모님 발현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의 목표는 모든 인류를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너무 따르거나 공경하게 되면, 예수님께 가는 영광이 가리워진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중에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모님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인도되고 싶다면, 우리의 선택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기쁘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분 없이 기쁨과 평화, 미래 혹은 영원한 생명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쁘게 기도하고 의탁해야 하는 이 시기를 잘 활용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두 주 전의 일입니다. 제가 사목하고 있는 미국 본당에서 주일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에 엄마와 어린 여동생과 함께 온 남자 꼬마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꼬마는 “신부님, 지난 주에도 물어봤고, 그 전에도 몇 번씩 물어봤는데 여전히 제 이름을 모르세요?” 하고 제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신부님이 머리가 나빠서 그러니 다시 가르쳐 주라.” 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제 이름은 루카예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그 아이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면서 지내다가 이번 주일 미사가 끝나고 나서 다시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제가 웃으면서 “너 이름이 루카지?” 하고 말했더니 그 아이도 웃으면서 “스테파노 신부님!” 하고 답했습니다. 어찌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이 일을 통해 정말 무엇인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든지 시간을 가지고 마음으로 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없이 기쁨과 평화, 미래 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 가장 본질적인 이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하면서 예수님의 현존을 가까이 느꼈다가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분의 현존과 존재를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늘 함께 하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미래와 영원한 생명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실을 마음으로 새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기쁘게 기도하고 의탁해야 하는 이 시기를 잘 활용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저희의 구원자로 세상에 보내주신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만이 저희에게 참된 기쁨과 평화, 미래와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굳게 믿게 해주십시오. 

성모님, 계속되는 당신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너무도 자주 예수님을 잊어 버리고, 다른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성모님, 다시금 당신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저희에게 주어진 기도와 의탁의 시간을 잘 활용하고자 결심하오니 하느님 대전에서 계속 저희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소서.
   
 
 
2010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쁘게 내 메시지대로 살라고, 나는 기꺼이 너희 모두를 부른다. 어린 자녀들아,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너희가 내 아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나는 너희 모두를 오직 그분께로 이끌어 주고 싶고, 너희는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발견하며 마음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모두를 축복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쁘게 내 메시지대로 살라고, 나는 기꺼이 너희 모두를 부른다. 

메주고리예 발현 29주년인 오늘,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쓰셨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이 첫 문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성모님께서는 기꺼이(기쁘게) 우리 모두를 부른다고 말씀하실 때, 그 단어를 쓰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당신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들을 부르시는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성모님은 우리의 죄나 부족함 때문에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며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고 목청을 높이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연민하고 품어 주시면서 영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초대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만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으시면서 ‘너희 모두’를 부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성모님께서는 ‘기쁘게 내 메시지대로 살라고’ 말씀하실 때,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곧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는 우리를 구속하여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예수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한 귀한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늘에서 주어지는 메시지대로 사는 것을 의무감에서 마지 못해, 혹은 짐스럽게 생각하면서 찡그린 얼굴로 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너희가 내 아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도로 위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종종 ‘우회도로’ 라는 간판을 보게 됩니다. 길이 막힐 경우 대안 도로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가까이 가는데도 우회도로가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분명 성모님 말씀처럼 우리가 기쁘게 그분의 메시지대로 살아가야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 기도하기 보다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고, 성경을 읽기 보다는 신문이나 잡지, 책 혹은 인터넷에 먼저 손이 가기 십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사는 것은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 외에 우리가 예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나는 너희 모두를 오직 그분께로 이끌어 주고 싶고, 너희는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발견하며 마음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1981년 6월 24일 이래 지난 29년 동안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매일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고, 온 세상을 상대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단 한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대단한 집념을 지니신 어머니이십니다. 직접 표현하신 것처럼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기 위해서 결코 지칠 줄 모르시고, 피로를 느끼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를 오직 예수님께로만 이끌어 주고 싶어하시는 그분의 열망이 우리 마음 깊숙이 전해지고, 그분의 열망대로 우리가 예수님께로만 가려고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참된 평화를 발견하고, 한없는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 모두를 축복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 45) 분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분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 8) 성부의 딸이시고, 성자의 어머니이시며, 성령의 정배이신 성모님께서는 이 사랑의 하느님과 늘 하나되어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사랑 역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기쁘게 그분의 메시지대로 살면서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합시다. 

하느님,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 또 사람들 서로 간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신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당신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성모님을 통해 들려오는 당신의 메시지와 말씀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성모님, 구원자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쁨에 넘치셨던 당신처럼 저도 저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쁨에 넘치고 싶습니다. 성모님, 당신의 메시지를 마음 깊이 묵상하고, 기쁜 마음으로 실천에 옮기고자 결심하오니 계속해서 저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소서.
   
 
 
2010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내부와 너희 주변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살고 지키며, 다른 이들이 더 선하고 더 거룩하게 되도록 고무시키라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주셨다. 그러나 사탄 역시 잠자지 않고, 근대주의를 통해 너희를 빗나가게 만들며 그의 길로 너희를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티 없는 내 성심에 대한 사랑 안에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야 너희 삶이 의미있게 될 것이고, 평화가 온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내부와 너희 주변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살고 지키며, 다른 이들이 더 선하고 더 거룩하게 되도록 고무시키라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주셨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은총은 “높은 이로부터 받는 은혜와 사랑”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이는 은총에 대한 성경의 사상과 일치합니다. 즉 그냥 높은 분이 아니라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호의와 자비, 은혜와 사랑 그리고 심지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그 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내부와 너희 주변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살고 지키며, 다른 이들이 더 선하고 더 거룩하게 되도록 고무시키라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주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시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살고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것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먼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다음으로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즉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갈라 5, 22-23) 마지막으로는 기도와 거룩함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 안에 선한 것으로 살아 있어야 하고, 실제 삶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그 어떤 것에 의해 파괴되어서도 안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 선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살고 지킬 수 있도록 우리 주변에 선한 것들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또 그 교회 안에 당신의 말씀이 담긴 성경과 칠성사 그리고 각종 준성사와 여러 신심을 불러 일으켜 주시어 우리가 우리 안에 주어진 선한 모든 것들을 계속 살고 지켜 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다른 이들이 더 선하고 더 거룩하게 되도록 고무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절대 우리가 이기적으로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지극히 높으신 분께로부터 낮은 곳에 있는 우리에게로 흘러 왔듯이, 그 은총은 반드시 우리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 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은총의 힘으로 선하고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이들도 더욱 더 선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고무시켜주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평화가 없다면, 평화에 대해 설교하지 마십시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설교하십시오.” 

그러나 사탄 역시 잠자지 않고, 근대주의를 통해 너희를 빗나가게 만들며 그의 길로 너희를 이끌고 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묵시록의 ‘붉은 용’인 사탄과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이고 계시는 태양을 입은 여인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 베드 5, 8-9) 라고 베드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탄은 잠자지 않고, 그의 모든 수하 마귀들을 데리고 교회와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교회와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사탄이 쓰는 도구는 여러 가지이지만,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모더니즘, 즉 근대주의를 통해 사탄이 우리를 빗나가게 만들며 그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모더니즘, 즉 근대주의는 14세기에 시작된 인본주의에 의해 준비되고,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18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그 위용을 떨치고 있습니다. 근대주의는 하느님, 인간, 세계 그리고 이 지상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인간 사고의 급진적인 변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하지만 근대주의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을 최고로 삼고, 그 의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거부합니다. 따라서 믿을 교리, 계시 진리,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신앙 그리고 기적과 하느님 말씀의 표징인 예언을 거부합니다. 또한 근대주의는 오직 자신의 정신과 양심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선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따라서 교회 교도권과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근대주의는 1907년 “근대주의는 모든 이단을 포용하고 있다.” 고 선포한 교황 비오 10세의 회칙 『Pascendi』에 의해 단죄를 받았고, 여러 교황님께서 그 위험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근대주의는 인간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그 중심에 놓고 진행되는 진보, 자유주의 그리고 세속화와 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 3, 5) 라고 이브를 유혹하여 죄를 짓고 빗나가게 했던 사탄의 공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하느님, 그분의 말씀과 계시, 교회와 성사, 그리고 교황님의 무류권과 교회의 교도권 등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의식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인류를 죄와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자신의 정신과 의식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게 만듦으로써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도록 만드는 인류 구원의 적대자이고, 악마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티 없는 내 성심에 대한 사랑 안에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야 너희 삶이 의미있게 될 것이고, 평화가 온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왜곡된 사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들의 의식으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그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인류에게 원죄를 초래한 아담과 이브와 달리,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 38)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겨 드렸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순종만으로 가득했던 그분의 정신과 마음은 아무런 티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고, 그분의 티 없는 성심에 우리 마음과 정신, 아니 우리 전 존재를 다 맡겨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과 그분의 티 없는 성심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모님의 티 없는 성심을 사랑하고, 그 성심에 매일, 아니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삶을 봉헌합시다. 그러면 성모님께서 우리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계명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제 안에 그리고 제 주변에 있는 선한 모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당신은 참으로 선하신 분이시기에 선한 모든 것은 오직 당신에게서만 오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 은총의 힘으로 당신의 말씀과 계명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저에게 주신 선한 모든 것을 지키고, 저의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제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이 더 선하고 거룩하게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 제가 모든 것 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따라 사는 가운데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저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소서. 

성모님, 티 없으신 당신 성심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성심에 제 삶과 존재 전체를 봉헌하오니 제가 오직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2010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특별히 기도하고 나의 전구를 구하는 이 시기에, 어린 자녀들아, 기도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더 내 메시지에 열리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나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 각자를 위해 전구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특별히 기도하고 나의 전구를 구하는 이 시기에, 어린 자녀들아, 기도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더 내 메시지에 열리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같은 음식 재료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내지 못하는 특별한 맛을 만들어 냅니다. 나름대로 특별한 조리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특별한 기도 방법은 매일, 마음으로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거나 가끔 생각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의 하루를 짧고 열렬한 기도로 가득 채워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 저녁 기도를 기본 축으로 하여 일상의 중간 중간 기도하며 그 날 전체가 기도의 분위기로 가득 하게 만들고, 하느님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인들은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입으로 기도하되 늘 마음을 담아 기도했습니다. 의무감이나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는 절대 특별하게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분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언제나 특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특별하게 되려면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인 기도도 필요하지만 마음으로 모아 함께 바치는 공동체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더욱 효과적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 하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머니의 청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에 무엇이 부족하거나 없는지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께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고 예수님께 전구해 주시도록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은총의 중재자이신 성모님께 늘 전구를 부탁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해 전구하고 중재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특별히 아직까지 성모님의 메시지에 마음을 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구원과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더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처럼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거룩한 일은 성모님의 전구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더 내 메시지에 열고자 하는 너희를, 내가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나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 각자를 위해 전구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지향들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지만 그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성모님이 뜻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류의 회개와 구원, 교회의 쇄신, 성직자 수도자들의 성화, 가정의 성화 등이 아닐까요? 성모님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이 가득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가 하느님이 살아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분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향들보다 그분의 지향들을 먼저 생각하고, 우리 기도의 우선 순위를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지향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기도할 때, 이미 그분은 우리 각자의 지향들을 위해 예수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또한 저희의 어머니로 만들어주신 당신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머니의 청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시니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저희가 드리는 모든 청을 들어 허락하소서. 

성모님, 언제나 주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위해 전구해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당신의 전구에 보답하기 위해 저희는 저희의 기도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메시지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성모님, 저희 마음을 다해 기도하오니 당신의 모든 지향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0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너희가 기도할 때, 시련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 강해지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싶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기쁘고 겸손하게 살며 모든 이에게 증거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내 아들 예수님 앞으로 데려간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힘이 되어 주시고 너희를 떠받쳐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너희가 기도할 때, 시련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 강해지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싶다. 

무엇을 하든지 대충해서는 절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좋은 결과를 얻기 원한다면, 있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신명기 6장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지만, 하느님을 사랑할 때도 있는 힘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바치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더 크게 만들어주고, 기적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와 엎드려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말씀하시며 거절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감동하셨고, 그녀에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은 나았습니다. (마태 15, 21-28 참조)     
     외면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가나안의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예수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예수님께 끝까지 매달리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힘차게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딸이 마귀에 들리는 시련을 겪으며 고통을 받았던 이 가나안 여인은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과의 대화, 즉 기도를 이어갔고,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이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체험 이후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더 커졌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차게 기도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적당히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참으로 힘차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힘차게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온전히 의탁합니다. 기도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삶과 영원한 세상에서의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바치는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게 만들어줍니다.     
     구체적으로 그 양상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으셨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시련들을 겪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냥 알고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시련을 당신의 것으로 하시고,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성모님의 사랑은 우리의 고통과 시련에 동참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련을 통해 많이 단련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겪는 시련은 우리의 마음을 많이 위축시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가장 큰 시련을 겪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고, 갈바리아 산 십자가 밑에 서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 보시며 그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그 순간에 성모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성경에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아들아, 힘을 내어라. 세상을 구원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힘을 내어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시련을 겪고 있든지 성모님은 그 시련을 아시고, 그 시련에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기쁘고 겸손하게 살며 모든 이에게 증거하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 16) 우리를 당신의 제자, 당신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계속 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이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마르 16, 20)     
     어떤 사람은 사제로, 어떤 사람은 수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평신도로, 우리가 받은 소명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명의 공통점은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와 환경에 따라서 말과 행동과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그 구원의 열매를 함께 나누도록 하시니 말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움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언제 어디서나 그분께서 드러나시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세례자 요한의 말은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 3, 30)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내 아들 예수님 앞으로 데려간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힘이 되어 주시고 너희를 떠받쳐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늘 그들과 함께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모든 기쁨과 슬픔, 아픔과 시련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함께 나눕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특별히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시련을 겪는 그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십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왜 성모님께서 그토록 오랫동안 메주고리예에서 계속 발현하고 계시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든 인류에게 회개와 성화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그럼으로써 모든 인류를 예수님께 데려가시기 위해서 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 5)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인간은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오직 그분의 이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4, 8 참조)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서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달아 예수님께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셨고, 그는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나갔습니다.(마르 2, 1-12 참조)    
     예수님은 당신에게 중풍병자를 데려오고 정성과 믿음으로 치유를 갈구했던 사람들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가셔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주시도록 청하실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은 성모님의 청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내 아들 예수님 앞으로 데려 간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힘이 되어 주시고 너희를 떠받쳐 주실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맡겨 드립시다. 그러면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 가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떠받쳐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세례를 통하여 저를 당신의 사람으로 불러주시고,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 드립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뒤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저의 말과 삶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당신을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당신 없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오직 당신의 이름에만 모든 희망을 두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제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저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게 도와주십시오. 

성모님, 당신은 제가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지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계시고, 그 시련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당신의 마음으로 느끼고 계십니다. 성모님,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제가 겪고 있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당신의 말씀 대로 더욱 더 힘을 내어 기도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시련과 고통, 슬픔과 아픔을 당신께 봉헌하오니 저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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