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위해 기도하며, 너희가 새로운 삶, 곧 기쁨과 기도의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어린 자녀들아, 성령께서 너희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너희가 맑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솟아나는 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과 함께하며, 사랑과 평화의 선교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서의 너희 삶은 짧기에, 내가 너희를 천국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위해 기도하며, 너희가 새로운 삶, 곧 기쁨과 기도의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어린 자녀들아, 성령께서 너희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너희가 맑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솟아나는 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과 함께하며, 사랑과 평화의 선교사가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제목의 생활 성가가 있습니다. 제목과 가사, 음악 모두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특별히 영성체 후에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이 성가를 부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경험할 만큼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 성가의 제목처럼,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힘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계시며,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새로운 삶, 곧 기쁨과 기도의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기쁨과 기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천상적 기쁨, 그리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끊임없이 이어 주는 기도로 가득한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모님의 기도와 이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원의가 함께할 때, 우리는 기쁨과 기도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야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기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23).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이며,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쁨과 기도의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모님을 기억하며, 그러한 삶을 살겠다는 강한 원의를 가지고 성령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기쁨의 열매를 내려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과 함께하도록 도와줍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도구이기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과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을 더 키워 가게 됩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기도만이 하느님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우리가 기쁨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과 함께할 때만, 우리는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과 평화의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사랑과 평화 역시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 열매들을 은총으로 주실 때, 우리는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 이러한 은총의 열매들을 선물로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선한 열망으로 바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청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세상에서의 너희 삶은 짧기에, 내가 너희를 천국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이를 더욱 깊이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선 세대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말입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너의 삶은 짧다. 머지않아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세상은 네가 잠시 거쳐 가는 정거장에 불과하며, 너의 참된 목적지는 그 너머에 있는 천국이다. 그 천국을 늘 그리워하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남은 삶을 다 바쳐 준비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시는 성모님께 우리의 손을 내어 드립시다. 우리의 손을 잡아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합시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성모님의 손을 붙잡고 천국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에게 평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 조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자신을 버리는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매우 타당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이기적인 자기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은 희생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결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면에서 자기 자신, 자기 생각, 자기 계획, 자기 뜻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첫자리에 두거나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기적인 자기를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에게 평화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이기심과 증오는 독입니다. 독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기에, 우리 마음 안에 독이 있으면 마음이 죽게 되고, 마음이 죽으면 우리는 몸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기심과 증오는 함께 갑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늘 우선되어야 하므로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고 경멸하며 분노를 쏟아붓고 증오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여기기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하며 미워하고 억압하고 내칩니다.
그러면 이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은 어디에서 생긴 것입니까?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참조)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마음에 독을 뿌리는 이는 사탄입니다. 그는 전쟁과 평화의 부재를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을 뿌리고, 그로써 마음 안에 있는 작은 평화마저 빼앗아 다시는 그 자리에 평화가 자리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탄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을 뿌리고자 하지만, 모든 마음이 그 독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그 독에 반응합니다. 그것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모든 죄는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방식으로 그 사랑을 채우려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나누며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전혀 희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제하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독점하려는 사랑, 곧 이기심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과 타인이 없이 오직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러한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지만, 우리는 이를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 이웃과 공동체, 교회와 나라, 그리고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은 사랑과 지지와 격려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미움과 상처와 질시를 받기도 하고, 심하면 철저히 홀로 버려지기도 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마음에 증오와 복수심을 품게 됩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받은 마음은 사탄의 눈에 가장 잘 가꾸어진 밭이 됩니다. 바로 그 마음에 사탄은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을 퍼부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전쟁과 증오를 일으키며 평화를 없애 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에 뿌려진 이기심과 증오의 독을 해독하고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그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사랑이 되고, 나의 연장된 손이 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사랑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 우리를 미워한 사람,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 심지어 우리를 박해하고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것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성모님께서 그것을 몸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처럼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아셨지만 그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당신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여한 모든 이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처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에는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이 들어올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이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스럽고 상처 입은 마음 때문에 우리는 늘 조건이 붙는 인간적인 사랑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내미는 손이 우리 자신의 손이 아니라 당신의 손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모든 이에게 사랑이 되기 어렵지만, 성모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모든 이에게 참된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아, 네 삶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니 단 한 순간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내 안에, 내 성심 안에 머물러 있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언제나 나와 함께 행동하고, 내 정신으로 사고하며, 모든 것을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훈련이다.”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 14쪽)
이 말씀처럼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행동하고, 그분의 정신으로 사고하며, 모든 사람을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손으로 만지며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분의 연장된 손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사람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힘써라.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선익이 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이기심과 증오라는 독을 제거하고 그 안에 평화를 다시 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기도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우리는 그 선물을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주시도록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평화는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청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그 이름 그대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분열시키는 존재입니다. 성모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며 그분의 연장된 손이 되어야 하는 우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하나가 되도록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힘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노력은 적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가 수많은 빗방울이 모여 이루어지듯, 우리의 작고 미약해 보이는 기도와 노력도 마침내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선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하느님께서 너희 개인의 회개를 통해 너희를 부활로 이끄실 수 있도록 너희의 삶을 그분께 봉헌하라고 나는 너희를 다시금 부른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며 너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지만, 너희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깨우고, 너희가 봄꽃처럼 거룩함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하느님께서 너희 개인의 회개를 통해 너희를 부활로 이끄실 수 있도록 너희의 삶을 그분께 봉헌하라고 나는 너희를 다시금 부른다.
지난 2월 18일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부활을 준비하는 이 사순절을 재를 얹으며 시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우리 존재의 무상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회개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회개해야 하지만, 사순절에는 더욱 깊은 회개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에 사제의 손을 통해 머리에 재를 받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회개하겠다는 내적 결심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충북 음성 꽃동네의 표어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회개할 마음만 있어도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으로 돌아서겠다고 결심하지 않으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가 없다면 구원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위해 먹고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회개는 우리 영혼이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과 평화를 누릴 것인지,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지옥과 연옥, 혹은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회개를 통해 우리를 부활로 이끄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그분께 봉헌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활, 곧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한결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봉헌하셨기에, 부활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부활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먼저 회개하라고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회개는 철저히 개인적인 일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회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다음은 고해소를 찾는 것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은 뒤, 죄를 피하고 잘못된 삶을 고치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매일 계속되어야 하는 여정입니다.
어떤 이는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죄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뜻이며,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루카 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같은 복음 18장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며 너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지만, 너희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깨우고, 너희가 봄꽃처럼 거룩함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친근하게 느끼면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하며, 될 수 있으면 가까이 있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공감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말인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완전히 준비되어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십니다. 깊은 잠에 빠지면 자기 밖에 누가 있는지,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또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모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그저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스스로 그 깊은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깨우십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도와 회개의 시간 안에서 새롭게 깨어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그 빛을 다른 이들에게 비추게 하심으로써, 그들 역시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거룩함의 길을 함께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며, 그들에게서 태어난 첫 형제는 카인과 아벨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우 아벨의 제물만을 기꺼이 굽어보시자 분노를 품게 됩니다. 그는 아우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결국 그를 죽입니다. 그 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하며 모른다고 잡아뗍니다(창세 4,3-9 참조).
이 성경 이야기는 형제 사이의 갈등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함께 공존해야 하고, 서로의 생명과 안위를 지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구약성경 안에서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표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여겨 ‘야훼’ 대신 ‘엘로힘’이나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곧 인류 전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나의 대가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나 전례 안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이기에, 그로 인해 우리는 당연히 서로 형제자매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다면,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결코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그 가운데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 또한 하느님과 성모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 가정의 한 일원으로서 그들에 대해 형제적 책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형제적 책임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성모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위해 한 번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축복 안에 언제나 그들이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지향은 나 자신과 내 가정을 넘어, 세상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특히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사랑을 체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의 안녕과 축복만을 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세상 모든 이가 행복과 평화 안에서 살아가며 하느님의 축복이 언제나 그들 위에 머물도록 청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들이 되어, 너희의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라.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성모님 메시지 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평신도들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의 바리사이라 불리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참된 정신보다는 자신의 의로움과 신심을 앞세우며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3,1-36 참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하실 때, 그 말씀 안에는 오늘날의 새로운 바리사이가 되지 말라는 경고 또한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세상 안에서도 스스로를 남들과 다르다 여기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오늘날에도 존재하듯, 바리사이 또한 오늘날 우리 안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다름’은 그러한 다름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말투에서, 태도에서, 심지어 걸음걸이와 뒷모습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우리 자신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서도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될 때, 우리는 쉽게 또 다른 바리사이가 될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의 삶에도 선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과 평화에 이르도록 초대받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든지 아름답고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참되다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증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말보다 삶이 더 큰 힘을 지니며, 사랑으로 살아낸 삶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오래 지속되는 힘을 발휘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삶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는 나의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며,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요즈음 성모님께서는 메시지의 끝에서 이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축복하시고 전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 말씀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지금 더 큰 축복과 전구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전보다 더 힘겹고 어려운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겨움과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 안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며 예수님 앞에서 전구해 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너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 그분께서 너희를 사랑의 열정과 평화로 가득 채우시어, 이 은총의 때에 모든 마음이 그분의 성심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러면 이 은총의 때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너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
예수님의 성탄절인 오늘,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너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시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당신의 품에 안고 우리에게 모셔 오도록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시며 현재형을 사용하십니다.
분명 예수님의 성탄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성탄은 지금도 매번 새롭게 이루어지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그분께는 모든 것이 언제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과거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다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경배합니다.
옛날 그러하셨던 것처럼, 성모님께서는 이번 성탄에도 평화의 왕이신 당신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우리에게 모셔 오십니다. 이 성탄에 필요한 것은 크리스마스트리나 카드, 선물 교환이나 파티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없이 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미래도, 희망도, 영원한 생명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분을 이번 성탄에 우리에게 모셔 오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던 목자들처럼, 우리 역시 구유와 감실과 십자가가 있는 성당으로 달려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깊이 경배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성당입니다. 성당에는 그분이 태어나신 구유, 매 미사 때 그분께서 새롭게 육화되시는 제대, 그분의 몸이 모셔져 있는 감실, 십자가와 말씀 등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사제가 그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절에, 이 성당은 우리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가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은, 성모님과 사제를 통해 매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활짝 열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도 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만 열리고 그분께만 매이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너희를 사랑의 열정과 평화로 가득 채우시어, 이 은총의 때에 모든 마음이 그분의 성심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 탄생 때,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이 찬미 안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이 찬미를 가장 먼저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던 사람들, 곧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과 하늘 군대의 찬미를 듣고, 예수님의 탄생과 그 표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본 것을 그대로 믿었으며, 자신들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쁨 속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메주고리예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 발현을 통해, 매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 제대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시며 성체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표징으로 믿고 받아들였던 그들처럼, 우리는 하얀 작은 빵의 형상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표징으로 굳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지녔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을 지니도록,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끝은 우리 마음의 완전한 변화, 곧 예수님의 성심을 닮는 데까지 이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의 열정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성심을 닮게 된다면,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러면 이 은총의 때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방어하고 지켜야 합니다. 생명과 안전, 권리와 재산에 위협이 닥칠 때,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섭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너희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하고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수호하라는 이 말씀은, 그 사랑이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며 심지어 박해받고 있다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이 현실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고 말한 요한 복음사가는, 자기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에 비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수호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사랑을 수호하기 위해 단호하다는 것은, 이 사랑과 맞서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타협도, 혼합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시어 수많은 박해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진리이시기에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셨고, 그 사랑을 끝까지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랑을 단호하고 용기 있게 전하고 증언하며 지켜야 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증거하기를 바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2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