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 그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이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 그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이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고통을 당했고, 그 피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또 하나의 큰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입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준군사 조직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수천발의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를 응징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며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며 기본적인 생필품도 없는 가운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 역시 하마스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여파는 이웃 중동 나라들과 온 세계 곳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넘실대며 이곳 저곳으로 불어가듯이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전쟁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마인 그는 악과 증오를 퍼뜨리고 평화와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집단들, 가정 그리고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조차도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에 덧붙여 사탄은 각종 대중매체들과 인터넷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 등을 통해서 사람들 정신과 마음속에 악과 증오를 증폭시키고 평화를 깨뜨리며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 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구의 어느 한 두 곳이 아니라 지구 전역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생명들을 파괴하기 위해 지구 전역에서 불고 있는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을 바라다보고 계시는 성모님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수많은 인명 피해 상황 뉴스를 아무런 감흥 없이 남의 일처럼 바라다보고 있는 시청자와 같은 입장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고 부상당하고 극한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비탄 속에서 통곡하시며 그들을 당신 품에 안으시는 어머니이시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실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로 인도하도록 이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악과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을 막아내고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특사로 세상에 파견되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평화의 길,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회개하게 되며, 그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참평화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가까이 가고, 그분과 하나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한 정치인들의 대화와 타협, 외교적 노력 등을 절대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로는 진정한 평화를 이 땅에서 구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 평화는 절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말 ‘사탄’은 ‘디아볼로’라는 그리스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사탄의 그리스말인 ‘디아볼로’는 그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 ‘디아볼로’는 ‘분열시키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처럼 사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분열시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하나가 되고, 서로 일치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악, 증오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전역에서 불고 있는 이 지구로 보내시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 5)라고 말하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과 달리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앞에 자신을 한껏 낮추셨습니다. 성모님께서 호칭하시는 대로 우리가 그분의 ‘어린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과 같은 겸손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겸손을 바탕으로 성모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모두 행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너희는 나의 펼쳐진 손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우리를 단순한 도구나 종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분신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펼쳐진 손인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모든 마음이 갈망하는 보물인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그 어떤 재능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성모님의 분신으로서 어머니를 도와 세상 구원과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마음과 실천할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회개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의 회개만 필요하다면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로부터 회개해야 하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느님을 잊고 살기 때문에 거듭거듭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눈을 감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서야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고 짓지 않아야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해서 거기에서 실망하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첫번째 교황이었던 베드로 사도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성목요일 밤 예수님께서 곧 붙잡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사도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성전 경비병들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을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저 가야파의 관저로 끌려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대사저의 관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의 두 여종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세 차례나 물었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심지어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 때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나옵니다.(마태 26, 31-35;69-75 참조)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하늘로부터 환시를 받아 쓰여진 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대사저의 관저를 나오다가 그 안에서 그는 사도 요한이 모시고 온 성모님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 그를 안타까우면서도 여전히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성모님의 그 눈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속 참회하고 회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그의 배반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요한 21, 15-17 참조)
베드로처럼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한 사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유다 이스카리웃 입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와 함께 게세마니 동산으로 와서 예수님의 체포를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뉘우치고는 은전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에게 돌려 주고 나가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마태26, 14-16, 47-50; 27, 3-5 참조)
베드로와 유다가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잠시 뉘우치기는 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막아 버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히 죄를 피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다는 외적인 표징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한 달에 여러 번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주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우리는 계속 회개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대신하는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받을 때 우리에게 엄청난 하느님의 자비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입는 자루옷을 속죄할 때에도 입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재나 흙을 얹고 자루옷을 입고 단식하며 속죄했습니다.(느헤 9, 1 참조) 그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데 그 옷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의 자루옷과 같은 그 어떤 외형적인 옷이 아니라 속죄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우리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고 그 죄를 기워 갚기 위해 기도, 단식, 그외 자선 활동 등을 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속죄의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를 오르시고 거기에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속죄의 옷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옷을 입을 차례입니다. 우리 죄와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십자가 속죄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저는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이기 때문에 긴꼬깔 모자가 달려 있는 갈색 수도복을 입습니다. 이 수도복은 제가 누구인지를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징입니다. 저는 수도복을 입음으로써 제 자신이 수도자임을 더욱 자각하게 됩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동네에서 마트에 갈 때도, 다른 볼 일들을 볼 때도 수도복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우리 신자인 필리핀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 이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남자이기에 늘 눈에 띄지만 제 수도복 착용 때문에 더욱 도드라집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도복 착용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 증거라고 생각되기에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게다가 제가 처음 수도복 착복을 할 때 ‘프란치스칸 수도복은 십자가의 형상이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수도복을 입고 다니려고 노력합니다. 어찌보면 수도복은 제게 속죄의 옷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 6)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원죄를 짓게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우리의 첫 선조를 유혹한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다른 피조물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그들을 유혹했고, 그들은 그 거짓말을 참으로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고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거짓말장이인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 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던 그분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사탄의 거짓말 유혹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마태 4, 1-11 참조)
예수님까지도 유혹했던 그 사탄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영혼들을 파괴하기 위해 그의 졸개 마귀들과 함께 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모님 메시지처럼 그는 우리를 포함한 온 인류를 유혹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의 거짓말은 무척 달콤하고 근사하고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는 우리의 행복이나 생명, 구원과 평화에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그는 우리를 거짓말로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사탄의 거짓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눈 앞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선악과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생명 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우리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쳐다보고 살아났던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민수 21, 9 참조)
사탄은 심지어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더 많이 가지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온갖 것을 소유하고 갖은 욕망에 우리 자신을 맡기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고 물질과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며 그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택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죄를 속죄하고 원죄로 닫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모님 말씀처럼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갈바리아를 향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예수님 잉태를 예고하기 위해 성모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최초 만민의 어머니 하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을 듣고 죄를 지어 인류에게 죽음을 불러 들였지지만 새로운 만민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낮추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심으로써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그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 명령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라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그런 자세 자체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 모범을 따르면서 그분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