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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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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랑하고 기도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현존을 증거하여라. 너희의 증거와 모범으로, 너희는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들을 좀더 가까이 끌어들일 수 있다. 너희가 사랑과 결의를 가지고, 티 없는 내 성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을 격려할 수 있도록,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랑하고 기도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현존을 증거하여라. 너희의 증거와 모범으로, 너희는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들을 좀더 가까이 끌어들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꼭 지켜져야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 34-3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 역시 계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올바른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6, 5-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고(루카 18, 1-8),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루카 22, 40)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양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새가 하나의 날개로는 날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사랑하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한 영적인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만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인본주의적 박애주의자와 별반 다름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한다면 이기적인 종교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을 지향해야 하고, 사랑은 기도 속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 마음들을 하느님 가까이 데려올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과 결의를 가지고, 티 없는 내 성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을 격려할 수 있도록,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쉽고, 빠르고, 안전하고, 완전한 길은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바로 그 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마리아의 손에 당신의 제자,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기에 성모님이야말로 예수님께 이르는 최고의 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몸에 예수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이미 당신의 마음, 곧 티없으신 당신의 성심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셨고, 그 성심은 예수님이 늘 거처하시던 궁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준비하시면서 먼저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보다 앞서 보내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있었던 파티마 발현에서 마침내 티없는 당신의 성심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이 티없는 성심이야말로 우리 인류 모두가 들어가야 하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티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늘 그 안에서 살기를 결심하면 성모님께서는 가장 안전하고 완전하게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주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우리만 그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이미 티없으신 당신의 성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그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티없으신 성모님의 성심 안으로 함께 데려갈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티없으신 성모 성심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사명을 잘 수행하라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해주고 계십니다. 

   
 
 
2017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에 너희의 마음을 열라고, 기도하고 보속하며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이 봄 시간이 너희의 생각과 마음속에서 너희를 새로운 삶, 쇄신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에 단호하게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와 너희의 후손들을 위해 내게 주시는 은총을 통해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에 너희의 마음을 열라고, 기도하고 보속하며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이 봄 시간이 너희의 생각과 마음속에서 너희를 새로운 삶, 쇄신으로 움직인다.

루카 복음 18장 9절 부터 14절까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자말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너무도 당당해 보입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은 아무 죄도 없이 깨끗하며 죄인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우위에 있으니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종교적 의무에 충실하다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반면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먼저 그는 성전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성전을 하느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은 죄인이기에 감히 그곳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땅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미사때 혹은 다른 경우에 고해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가슴을 칩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탓임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죄임을 고백하는 외적인 행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바로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에 너희의 마음을 열라.”고 하시는 성모님의 부르심은 바로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의 마음을 열기 위해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죄도 없고, 모든 것이 완벽하며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마음도 없고, 하느님의 자비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여지도 없습니다. 경외심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줄 알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한없이 낮출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고, 자신에게 그분의 자비가 임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또한 “기도하고 보속하며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짜으로 겸손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나 위 비유의 바리사이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세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세리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거룩하게 삶으로써 우리의 삶이 새로와줘야 합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겨우내 얼어붙고 움추렸던 모든 것들이 따스한 햇살에  자신을 열어놓고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누렇기만 했던 잔디가 파래지고, 나무들에서는 새싹이 돋고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거나 역행하지 않고 자신을 내맡기고 순응한 결과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영적 봄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를 완전히 맡겨드리고, 그분의 힘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활짝 열어드리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에 단호하게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와 너희의 후손들을 위해 내게 주시는 은총을 통해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으로 불리게 되는 히브리 민족은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을 가엾이 여기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이집트 왕 파라오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고자 하셨지만 그들을 정화시키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한 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과 이적들을 체험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 목이 말랐을 때는 하느님의 힘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였고(탈출 17장 참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아론을 부추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를 자신들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죄를 저질렀습니다(탈출 32장 참조).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에 언제나 충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도록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을 잘 들어,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면, 주님께서 너희  땅에 제때에 비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어,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해 주실 것이다. 또 너희 들에서는 가축에게 풀을 주시어, 너희가 배불리 먹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유혹을 받아, 길을 벗어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경배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신명 11, 13-16) 이렇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에 충실하라고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모세와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계명에 단호하게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우리에게 성모님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죄에 떨어지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며 그분의 계명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하고 성모님을 부르면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 지상에 계실 때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에 늘 단호하게 ‘예’라고 말씀드리면서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와 너희의 후손들을 위해 내게 주시는 은총을 통해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성모님을 통해 은총을 주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2017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충심으로 너희의 믿음을 살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시도록 지극히 높으신 분께 간청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바람과 폭풍들이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한다. 너희 믿음의 뿌리가 기도가 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라도 이 은총의 때에 너희 자신을 개선하여라.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포기 그리고 회개의 부름을 통해 확실하고 끈기 있는 믿음과 희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너희에게 은총을 주고 계신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충심으로 너희의 믿음을 살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시도록 지극히 높으신 분께 간청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바람과 폭풍들이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한다. 너희 믿음의 뿌리가 기도가 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되기를 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따로 기도하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혼자 거기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는 맟바람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혼비백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예수님께 구해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마태 14, 22-32절 참조)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명령이 있으면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 위를 걸어서 오라고 하셨을 때 과연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 위를 걸어 그분께 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시고 그를 구해 주시며 그의 약함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에서 충심을 다해 믿음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금 묵상해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늘 함께 있었고, 그분의 능력과 온갖 치유와 기적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체험했습니다. 심지어 바로 전날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오천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물 위를 걸어 자기에게 오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거센 바람 때문에 두려움을 가져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거센 바람이 불지언정 바로 자신 앞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않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을 향해 걸어갔더라면 베드로는 결코 물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정도가 어떠한지 잘 드러나는 때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될 때가 아니라 역경과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입니다.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 제자 어느 누구에게나 여느 세상 사람들이 겪는 똑같은 시련과 역경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시련이나 역경만을 보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앞에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그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온전하게 의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굳건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 성모님 말씀대로 바람과 폭풍들이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겨운 순간이 찾아올 때,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마음에 떠올린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 내가 이집트를 너의 몸값으로 내놓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너 대신 내놓는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 대신 다른 사람들을 내놓고 네 생명 대신 민족들을 내놓는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해 뜨는 곳에서 너의 후손들을 데려오고 해 지는 곳에서 너를 모아 오리라.”(이사 43, 1-5)

어린 자녀들아, 이제라도 이 은총의 때에 너희 자신을 개선하여라.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포기 그리고 회개의 부름을 통해 확실하고 끈기 있는 믿음과 희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너희에게 은총을 주고 계신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린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와 거룩함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내로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은총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죄 속에서 살아 왔고,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죄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하더라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은총으로 도와주시고,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 12-1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 안에서 늘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을 포기하고 모든 악과 죄로부터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 귀한 은총의 시간을 절대로 놓치지 맙시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총의 시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해 회개하고 우리의 삶을 개혁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 12; 9, 4-5)

   
 
 
2017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람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그리고 세상의 평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사탄은 강하고, 너희 모두를 하느님과 등지게 만들고, 너희를 인간적인 모든 것으로 돌아가게 하며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모든 감정들과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기도하고, 세상이 너희에게 제시하는 물질주의, 근대주의 그리고 이기주의에 맞서 싸워라. 어린 자녀들아, 거룩함을 선택하여라. 나는 내 아들 예수님과 함께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람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그리고 세상의 평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1981년 6월 24일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에서 처음으로 발현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인 25일에는 여섯 명의 발현목격증인들이 모두 발현산에 함께 모여 성모님의 발현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발현 세번째 날인 26일,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발현산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있은 발현이 끝나고 모두 산을 내려가는 중에 산 아래 쪽에서 성모님이 발현목격증인 마리야에게 다시 발현하셨습니다. 그때 발현에 대해 메주고리예 순례 가이드인 미키 무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날 성모님께서 마리야에게 하셨던 세 번째 발현은 모든 차갑고 구름낀 상태였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시고 오른쪽에 십자가도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 눈에는 눈물이 글썽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내 성모님께서는 온 세상에 당신의 첫 번째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때의 성모님 말씀이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 평화, 평화.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평화’는 성모님께서 온 세상에 첫 번째로 주신 메시지이고, 그 이후로 성모님께서 주신 수많은 메시지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성모님께서는 다시금 평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람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그리고 세상의 평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오늘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 그리고 세상에 평화가 없는지 성모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에 모든 사람들 마음과 가정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미사때마다 영성체 직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우리 옆이나 앞뒤로 있는 사람이 우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어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평화를 빌어줍니다. 그때의 그 마음으로 우리는 모든 순간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 그리고 온 세상에 평화가 임하도록 평화를 빌어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시편의 말씀이 늘 우리 마음 안에서 울려 퍼져야 합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 예루살렘은 도성으로 세워져 견고하게 짜였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는구나, 주님의 지파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송함이 이스라엘을 위한 법이라네. 그곳에 재판하는 왕좌가,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하여 나는 이르네.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네.”(시편 122)

사탄은 강하고, 너희 모두를 하느님과 등지게 만들고, 너희를 인간적인 모든 것으로 돌아가게 하며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모든 감정들과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성모님 말씀대로 사탄은 강합니다. 사탄은 초자연적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1, 21; 3, 8-9) 라고 말한 사도 바오로도 악, 곧 사탄의 힘에 휘둘리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 15-21)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사탄이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를 하느님과 등지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놓아 우리를 멸망의 길,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뿐입니다.그를 위해 사탄은 먼저 그의 초자연적 힘으로 아주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이며 대단히 인간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듭니다. 죄를 짓게 합니다. 유혹을 받는 과정뿐만 아니라 죄를 짓고 나면 우리의 마음은 어두워져 하느님을 피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감정도 파괴되어 기도할 마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체험한다면 그 뒤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1884년 10월 13일,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사탄의 지배가 절정에 달할 백 년 동안의 모습을 환시로 보고난 다음 아래와 같은 기도문을 작성하여 어느 성당에서든지 미사 끝에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미카엘 대천사에게 바치는 이 기도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모든 교회에서 더 이상 미사 후에 공식 기도문으로 바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교회 내외적으로 사탄이 더욱 기승으로 부리는 이 시기에 우리는 이 기도를 매일, 수시로 자주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
그리고 천상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기도하고, 세상이 너희에게 제시하는 물질주의, 근대주의 그리고 이기주의에 맞서 싸워라. 어린 자녀들아, 거룩함을 선택하여라. 나는 내 아들 예수님과 함께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모님 눈에는 어린 자녀들입니다. 그가 어떤 큰 힘이나 지위나 재물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성모님 눈에는 어리게만 보입니다. 어리고 작기만 한 우리가 사탄의 거대한 힘과 싸우고,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물질주의, 근대주의, 그리고 이기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수 골리앗을 단 한 개의 조약돌로 쓰러뜨린 어린 목동 다윗처럼 될 수 있습니다. (1사무 17장 참조)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시니 그 힘을 받아 다윗와 같은 하느님의 투사가 됩시다. 

   
 
 
2016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을 열고 너희가 그 평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여라. 천국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마음 안에서, 너희 가정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하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너희의 기도로 도와라. 나는 내 아들 예수님과 함께 너희를 축복한다. 그리고 너희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또 너희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천국과 영원을 향하도록 너희를 부른다. 이 방식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에 너희를 열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을 열고 너희가 그 평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여라. 천국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마음 안에서, 너희 가정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하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너희의 기도로 도와라.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첫 성탄 때처럼 성모님은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예수님을 모셔다주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35년 6개월 동안 매일 같이 계속 발현하고 계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다시 모셔다 주고, 우리가 마음을 열어 그분의 평화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대로 동굴로 찾아가 구유에 누워 계셨던 예수님을 뵙고 기뻐했던 베들레헴의 목동들처럼, 또 그분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 베들레헴을 찾아와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뵙고 기뻐하며 그분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며 그분을  경배했던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도 마음을 열고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고맙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이십니다. 매번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에, 천국이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성탄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 매 미사 때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현존으로 이 땅에 천국이 계속 머물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가정 그리고 세상이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그 모두가 평화롭기를, 천국과 같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과 세상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로 가득차게 되기 위해 성모님과 예수님은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두 분의 노력에 우리도 힘을 합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러니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하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너희의 기도로 도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런지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가늠할 수 없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기도로 하늘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나는 내 아들 예수님과 함께 너희를 축복한다. 그리고 너희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또 너희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천국과 영원을 향하도록 너희를 부른다. 이 방식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에 너희를 열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복은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축복해주신다니 이중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받는 축복은 인간적인 축복과는 비교가 안되는 천상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천상의 축복을, 그것도 이중의 천상 축복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우리가 이와 같은 천상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시편 저자처럼 다음과 같이 끊임없이 말씀드려야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 5)
   예수님과 성모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우리는 늘 그분들 보살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분들께서 거하고 계시는 천국에서 그분들과 영원히 살기 위해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오직 천국과 영원만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이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응답하기만하면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를  끊임없이 외우며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응답합시다.

   
 
 
2016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이 은총의 시기에 내가 너희를 거룩함과 단순한 삶으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셨다. 작은 일들 안에서 너희가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사랑에 빠지며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계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너희의 삶이 지극히 높으신 분께 드리는 감사가 되어야 하는 그 단순한 삶 말이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 안에서, 너희의 삶이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기를 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증거하도록 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이 은총의 시기에 내가 너희를 거룩함과 단순한 삶으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셨다. 

성모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거룩함과 단순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느님의 허락을 받아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즉,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가 거룩하고 단순한 삶을 살기 바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룩하고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역시, 나는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일들 안에서 너희가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사랑에 빠지며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계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너희의 삶이 지극히 높으신 분께 드리는 감사가 되어야 하는 그 단순한 삶 말이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거룩함과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시면서 성모님께서는 단순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십니다. 단순한 삶은 먼저 작은 일들 안에서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란 어떤 것입니가? 매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매일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며 절기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와 만물을 만드시고 살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매일 같이 큰 일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따라서 매일 같이 우리를 위해 뜨고 지는 해가 그냥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에 의해서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않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매 순간 살아 있기 위해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생각해봅시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그래서 의식되지도 않고 작은 일처럼 여겨지지만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고, 숨이 멎는 순간 죽은 몸이 되고 맙니다. 
   두번째로 성모님께서는 단순한 삶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사랑에는 그 어떤 계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갈리지 않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려면 우리는 하느님께만 눈이 멀어야 합니다. 다른 그 어느 것에도 눈길이나 마음을 주지 않는 그런 눈멈 말입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눈이 먼 우리의 그 마음 안에 오직 하느님만이 계시기에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드리는 감사가 될 때, 바로 그것이 단순한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모든 것의 목록을 헤아려봐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계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큰 것보다 작아 보이고, 이전에는 감사드리지 못했던 것을 먼저 찾아내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면 큰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삶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감사를 드리기 위해 기도하고, 미사 참례를 하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침 저녁, 아니 매 순간 감사의 마음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일러주시는 단순한 삶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단순한 삶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 안에서, 너희의 삶이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기를 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증거하도록 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고린토 1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노래하면서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 안에서, 너희의 삶이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기를 빈다.”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사랑 안에서”라는 단어를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공짜로 받았으니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거저 주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눈에 기쁨이 될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더욱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2016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이기심을 버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대로 살아라. 내 메시지 없이 너희는 너희 삶을 바꿀 수 없다. 실제 기도함으로써 너희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너희는 지금 너희에게서 멀리 계시다고 느끼는 하느님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에, 평화 속에 삶으로써 증거할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너희 마음에 들어오시게 해 드려라. 너희 안에, 또 너희 주위에 있는 악을 이겨내기 위해 단식하고 고해성사를 보아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이기심을 버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대로 살아라. 내 메시지 없이 너희는 너희 삶을 바꿀 수 없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기브온에 제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한밤중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는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솔로몬의 청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 주겠다.”(1열왕 3, 4-14 참조)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우리의 기도 지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보다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분별하는 마음을 청하는 솔로몬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잘 통치하고, 선과 악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솔로몬의 청은 당연히 받아들여졌고, 그에 덤으로 그가 청하지도 않은 부와 명예도 받게 되었으며, 조건부이지만 수명 연장까지 보장받았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실 때 그 “평화” 앞에 어떤 소유격도 붙지 않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저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를 위한 평화입니까? 모든 이를 위한 평화입니다. 우리의 이웃, 나라, 그리고 세상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청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평화입니다. 만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 대로 살아라. 내 메시지 없이 너희는 너희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기도함으로써 너희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너희는 지금 너희에게서 멀리 계시다고 느끼는 하느님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에, 평화 속에 삶으로써 증거할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만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실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도 그 평화의 선물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만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평화를 우리 마음과 삶에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되고, 우리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너희 마음에 들어오시게 해 드려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20)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지금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라고 직접 말씀도 하고 계십니다.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문 두드리시면서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바로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당신에게 문을 열라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닫혀 있는 우리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 열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하고, 하느님께서 너희 마음에 들어오시게 해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끝을 보기 위해 사용하는 삼 세판처럼,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또 너희 주위에 있는 악을 이겨내기 위해 단식하고 고해성사를 보아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이미 수요일과 금요일에 물과 빵으로 단식을 하고, 적어도 매달 한 번 고해성사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또 너희 주위에 있는 악을 이겨내기 위해 단식하고 고행성사를 보아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해주셨습니다. 단식과 고해성사가 가지는 다른 많은 효과들이 있지만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단식과 고해성사가 우리 안에,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단식과 고해성사는 우리 안과 우리 주변에 있는 악과 그 악의 근원인 마귀를 극복하고 쫓아내는 구마의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 대로 살아라. 내 메시지 없이 너희는 너희 삶을 바꿀 수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단식하고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도록 합시다.

   
 
 
2016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기도로 부르고 있다. 기도가 너희 삶이 되기를 빈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너희의 마음이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고, 너희는 마음속으로 그분을 친구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너희는 마치 아는 사람과 말하는 것처럼 그분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 안에 계시고, 너희는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증거자가 될 필요가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기도로 부르고 있다. 기도가 너희 삶이 되기를 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기도로 부르고,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얼마나 기도해야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치 계속 숨을 쉬어야 생명이 이어지는 것처럼 하루를 기도로 가득 채워야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다른 일들은 모두 등한히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게 하면서 우리의 삶이 기도와 조화를 이루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잘 알려주는 예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메주고리예 발현 초기에 발현목격증인들을 통해 메주고리예 청소년 기도 모임을 직접 이끄실 때의 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아이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면서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묵주기도를 바치시다가 3단을 하고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와 함께 바치도록 하지구나. 집으로 가면서 나머지 4단을 바치거라. 집에 도착하여 숙제도 하고 집안 일도 도와드리고 잠자기 전에 마지막 5단을 바치거라.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 너희가 자는 동안 기도의 영이 너희와 함께 계속 기도를 바칠 것이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기도를 중심에 두면서,기도와 일상생활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그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너희의 마음이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고, 너희는 마음속으로 그분을 친구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너희는 마치 아는 사람과 말하는 것처럼 그분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모님은 기도가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주십니다. 또한 평화와 기쁨은 기도의 열매이고,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지금껏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성모님의 부르심 대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지금껏 하던 기도의 양보다 두 배, 세 배 더 많은 기도를 마음으로 바치십시오.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누군가가 친해지기 위해서는 말문을 터야 하고, 계속 대화를 하면서 그 친밀함은 깊어져 갑니다. 그렇듯이 하느님과 친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과 대화해야 하고, 그 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친해질 수 있고,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기도하면 하느님과의 친밀감은 더욱 강화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더 이상가까이 하기에 먼 분이 아니라 친한 친구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일차적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바쳐야 하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어린 자녀들아,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 안에 계시고, 너희는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증거자가 될 필요가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기도의 효과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마치 우리가 친한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고 늘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셨기에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머물고 싶어하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하나되어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얼굴과 말과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또 우리가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 않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2016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더불어 천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어린 자녀들아, 오직 하느님께서만 주시는 희망, 평화 그리고 사랑이 너희 마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너희 마음의 문을 열어라.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지상과 지상의 것들에 너무 매여 있다. 그 때문에 바람이 바다의 파도를 일렁거리는 것처럼 사탄이 너희를 일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삶의 사슬이 마음을 다한 기도 그리고 내 아들 예수님께 대한 흠숭이 되게 하여라. 너희가 그분 안에서 기쁨이 되고 너희의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너희의 미래를 그분께 맡겨드려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와 더불어 천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어린 자녀들아, 오직 하느님께서만 주시는 희망, 평화 그리고 사랑이 너희 마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너희 마음의 문을 열어라.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고 나서 다시 이 지상의 현실로 돌아오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아 혼자 방에 들어가 한참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겨우 마음이 진정이 되면 그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천상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가져오시는 그 천상의 기쁨을 체험했을 때 이 지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발현목격증인들처럼 성모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어도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천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성모님께서 나누어주고자 하시는 천상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 2)라고 말하는 시편 저자처럼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면서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 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고자 하시는 천상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열면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오직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희망, 평화 그리고 사랑의 씨앗을 뿌리시어 그것들이 우리 마음 안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지상과 지상의 것들에 너무 매여 있다. 그 때문에 바람이 바다의 파도를 일렁거리는 것처럼 사탄이 너희를 일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삶의 사슬이 마음을 다한 기도 그리고 내 아들 예수님께 대한 흠숭이 되게 하여라.

 

머리로는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지상과 지상의 것들에 너무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러한 우리 마음에 걱정, 불안, 두려움, 의심, 탐욕, 그리고 분노 등의 악한 씨앗을 뿌려 유혹하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지상과 지상의 것들에 묶여 있는 마음의 사슬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우리의 마음이 기도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흠숭으로 가득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아이에게서 벙어리와 귀머거리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 29)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기도만이 우리 마음을 일렁거리는 사탄을 쫓아낼 수 있고, 지상과 지상의 것들에 매여 있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분 안에서 기쁨이 되고 너희의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너희의 미래를 그분께 맡겨드려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수님께 맡겨드리려면, 먼저 그분의 선하심과 섭리적 보살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위에서 아무런 미련이나 후회 없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맡겨드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미래를 만들어 주십니다.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며 따라갈 때 부모의 마음이 흐뭇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수님께 맡기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면 예수님의 마음도 흐뭇하고 기쁘실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께서 특별히 성체 앞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읽고 묵상하도록 권장하신 다음 성경 말씀을 우리도 목요일뿐만 아니라 매일 읽으면서 예수님께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25-34)

 

   
 
 
2016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고, 너희가 길을 잃어버렸으며 너희 마음에 기도나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안다. 어린 자녀들아,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셔라.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그 희망을 잃지 마라. 어린 자녀들아, 이 시기가, 매일매일이, 너희가 마음으로 침묵하면서 하느님을 더욱더 찾는 시간이 되기를 빈다. 그러니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고, 너희가 길을 잃어버렸으며 너희 마음에 기도나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안다. 어린 자녀들아,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셔라.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그 희망을 잃지 마라.

어머니는 어린 아기에게서 결코 눈을 떼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염려하면서 다정한 눈으로 아기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참된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인 우리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 자녀들이기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강제적으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길을 잃어버려도 그 또한 허락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길을 잃어버린 채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일깨워주시고 다시 바른 길로 걸어가도록 격려해주십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고, 너희가 길을 잃어버렸으며, 너희 마음에 기도나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말씀 속에서는 그 어떠한 단죄나 판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염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럼 우리가 다시 길을 찾고, 마음에 기도와 기쁨을 간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해야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우리 마음에 기도와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또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 주고 있는 그 희망을 잃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실 때, 하느님은 늘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셔야 우리의 모든 삶이 그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실 때 우리는 결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고, 늘 희망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 시기가, 매일매일이, 너희가 마음으로 침묵하면서 하느님을 더욱더 찾는 시간이 되기를 빈다.

나쁜 습관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몸에 배이지만, 좋은 습관은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에야 비로소 어렵게 우리 몸에 배는 법입니다. 마음의 침묵, 하느님을 찾는 기도의 시간 모두 의식적으로 마련하고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 몸에 배이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야 하고, 시간을 내어 하느님을 찾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일류 운동 선수가 되기 위해 체력단련과 자기 분야 운동에 대한 연습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해야 하는 것처럼,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매일매일 마음의 침묵을 지키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합니다. 마음으로 침묵하는 영혼에게 하느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게임이나 드라마에 중독되는 것은 쉬운데 기도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게임이나 드라마는 접하는 그 순간 재미가 있고 쾌감이 느껴지는 반면, 기도는 어느 정도 적당히 한다고 해서 갑자기 재미있어지고,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해 끊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정말 기도가 우리를 위한 기쁨이고, 이 기쁨은 세상의 그 어느 것에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이며,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참된 기쁨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고 말씀하셨고, 바오로 사도 역시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 12),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 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 그래야 기도가 우리를 위한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기도가 기쁨이 될 때가지 기도해 본 경험이 있는 영혼은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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