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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현존은 너희 모두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고, 회개를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사탄은 강하고, 너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무질서와 불안을 심어주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성령께서 너희를 참된 기쁨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의 현존은 너희 모두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고, 회개를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주고리예 발현이 우리 모두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모님을 선물로 계속 보내주고 계시는데 대해 우리는 무엇보다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고,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성모님 발현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기에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기에 과분한 선물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라는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선물을 받는 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이 선물을 주시는 이유는 모든 인류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회개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악을 끊어버리고, 하느님께 완전히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될 수 있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메주고리예를 통해 계속해서 성모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할 때면,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을 떠올리고, 온 마음을 다해 감사 드리며 지금 이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사탄은 강하고, 너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무질서와 불안을 심어주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성령께서 너희를 참된 기쁨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여라.

사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가 지닌 초자연적인 힘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죄짓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강하고, 너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무질서와 불안을 심어주고 싶어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에게 사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혹시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무질서와 불안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바로 그 순간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무질서와 불안을 심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 사탄의 악령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바로 기도 드려야 합니다. 예컨대, 짧지만 대단히 강력한 기도인 “오소서, 성령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정배 마리아의 힘있는 전구를 들으시어 오소서!”와 같은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 말씀대로 우리를 참된 기쁨과 평화의 길로 인도해주시도록 성령께 간단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5-27)
   이 성경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온 인류를 대표하여 당신의 십자가 아래 서 있던 사도 요한을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삼으셨고,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로 맺어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자리에 없었을지라도 사도 요한은 우리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날 우리 모두는 성모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직접 성모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성모님께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들이 어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그 곁에 머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머니로 직접 맺어주신 성모님께서도 영적으로 어린 당신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늘 우리 곁에 머무십니다.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예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참된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기도의 중개자로 우리 곁에 머무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합시다.

   
 
 
2016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죄와 죄스러운 습관들에 빠져 있는 너희를 바라보면서 티 없는 내 성심은 피를 흘린다. 이 지상에서 너희가 잘 되기 위해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영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나의 부름이 너희 영혼과 마음에 위안이 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으니 이 때를 잘 활용하고 선을 행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죄와 죄스러운 습관들에 빠져 있는 너희를 바라보면서 티 없는 내 성심은 피를 흘린다.

사제품을 받고 처음 부임했던 본당에 알코올 중독자들의 단주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떻게 모임이 진행되는지 알고 싶어 책임자에게 허락을 얻고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모임에 참석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컨대, 남자면 자신의 실명을 대지 않고 “저는 미스터 알코올 중독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자들은 자신이 결코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인정했습니다. 참된 겸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라고 소개함으로써 치유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뿐만 아니라 모든 중독은 자신이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그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치 루카 복음 15장 “되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집을 찾아간 그 작은 아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치면서 모든 것이 다 우리의 탓이라고 말함으로써 작은 아들과 같은 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아룁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짓고, 죄스러운 습관에 빠져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양심이 너무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 중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죄와 죄스러운 습관들에 빠져 있는 너희를 바라보면서 내 티 없는 성심은 피를 흘린다.”는 말씀을 통해서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죄를 성찰하고 통회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죄스러운 습관은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이 피를 흘리게끔 합니다. 우리의 죄와 죄스러운 습관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고 우리가 멸망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것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시는 고통이 얼마나 크시면 마음에서 피를 다 흘리시겠습니까? 그만큼 성모님께서 당신 자녀들인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상에서 너희가 잘 되기 위해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영원한 집이 있는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도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잘 된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지칭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이 지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은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기도 없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잘 될 수 없습니다.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편 작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 2-3) 또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신명 30, 15-20) 이처럼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 기도하면서 그분의 길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다음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는지 알려주는 성경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 1-3)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다른 이들을 위한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위한 축복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이 완성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희망과 기쁨을 넣어주십니다. 그렇게 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희망과 기쁨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영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나의 부름이 너희 영혼과 마음에 위안이 되기를 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에게서 무엇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완전히 떠나가지 않는 이상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시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영원으로까지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을 끊임없이 찬미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 창조주 하느님께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두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영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 영혼과 마음이 기뻐 뛰놀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메시지가 성모님의 부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고 있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위안을 얻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습대로 우리를 귀하게 창조하신 하느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바라신다는 이 메시지를 그 어디에서, 그 어느 누구에게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메주고리예를 통해 매일 같이 우리에게 보내주고 계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에게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으니 이 때를 잘 활용하고 선을 행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긴 시간을 살아온 것 같은데 그 뒤를 돌아보면 마치 어제 같이 느껴집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앞으로 올 시간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질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으니 이 때를 잘 활용하고, 선을 행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 때를 잘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뿐 아니라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조배를 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물과 빵만으로 단식하면서 사랑으로 보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악을 끊어버리고 오직 선만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이 생에서부터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를 영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16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사랑을 가져다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회개하도록 너희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사랑하는데 서툴며,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고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사랑으로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기도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사랑을 가져다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회개하도록 너희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모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으로 가득한 천국에서 이 지상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냥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오실 때마다 당신의 사랑을 담뿍 가지고 오시어 우리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그 사랑은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성모님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는 내리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너무도 보잘것없고 작기만 하기에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사랑은 바로 천상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성모님을 거쳐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온 마음과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사랑을 갈구하고 알아 듣는 자만이 그 사랑을 느끼고 기뻐하며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우리를 사랑할 능력을 주셨을지언정, 성모님은 그것마저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의지를 먼저 앞세우십니다. 그러하신 성모님께서 “회개하도록 사랑으로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회개한다는 것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우선시하고, 그분의 뜻에 순명하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회개의 길입니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사랑하는데 서툴며,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고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사랑으로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기도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 말씀대로 우리는 잘 사랑할 줄 모릅니다. 사랑하는데 서툴기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안위와 편의를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고 성이 차기 때문입니다. 주기보다는 받는 데만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잘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는데 서툰 것입니다. 두 번째 큰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그에게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주기 위해 몸소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목숨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더 잘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사랑으로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성모님께서는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기도를 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 기도의 양과 정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 사명입니다. 

   
 
 
2016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회개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조금 사랑하고 기도마저 적게 한다. 너희는 길을 잃었고, 너희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가거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너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기도 안에서 희망과 너희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마음으로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회개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사순절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보이셨는지 특별히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사랑으로 바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순절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마저 십자가의 죽음을 겪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하느님께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리면서 그분의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한 사람의 자세이고,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은총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8)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만을 온전히 사랑하며 그분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회개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조금 사랑하고 기도마저 적게 한다. 너희는 길을 잃었고, 너희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가거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너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당연히 사랑해야 하지만, 사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반목하고 마음 속에 미움을 간직하고 있으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꼭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만큼 예수님의 계명을 잘 따르지도 못하고, 우리 자신도 큰 행복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마저 적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조금 밖에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나마 기도를 많이 하면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가게 되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 미움 대신 사랑이 차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마저 적게 하고 있으니 성모님께서는 그것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별로 사랑하지도 않고, 기도도 적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 마음과 삶에 깊이 자리 잡으실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로 우리 마음과 삶이 가득하게 되고, 그것들이 우리를 움직여 구원이 아니라 멸망의 길로, 거룩함이 아니라 타락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또 우리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인 우리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을 갖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조금 사랑하고, 기도마저 적게 한다. 너희는 길을 잃었고, 너희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다시 되찾고, 무엇이 우리의 목표인지 깨달으며 그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가거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너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해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곧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웃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처럼 사랑할 때만 참된 자아 완성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따라간다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처럼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가 아니고는 천국에 오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 페루 리마의 성녀 로사의 말처럼 십자가는 우리는 부활로 이끌고, 천국으로 오르게 합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고, 계속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앞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분께 늘 우리의 시선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기도 안에서 희망과 너희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마음으로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루카 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그분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며 그들의 절망과 슬픔에 대해 들으시고, 당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에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다 되어 그들과 함께 어느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기 위해 빵을 떼어 나누어주셨을 때, 그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열 두 사도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증언했습니다. (루카 24, 13-35 참조)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기도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길을 걸어가면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열고 그 안에 담긴 자신들의 절망을 예수님께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희망을 다시 되찾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말씀 드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에 대해 응답하십니다. 두 제자들처럼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렸다면, 그래서 기도로 그 절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드러내 보인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희망을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십니다. 또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도 깨달을 수 있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비록 희망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20) 그러니 성모님께서 부르시는 것처럼 기도 안에서 희망과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마음으로 다시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다음과 같이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 12)

   
 
 
2016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른다. 기도는 너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너희는 기도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말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로 돌아오너라.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자유롭게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그분을 거스를 자유가 있다. 사탄이 너희를 죄와 노예살이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려라.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내 아들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내 마음으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른다. 기도는 너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너희는 기도 없이 살 수 없다.

2016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인사말처럼 우리는 새해 정말 복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할 새해의 복 가운데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모든 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아가며, 그분 뜻대로 살아간다면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 1-3)고 하신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큰 복을 받아 잘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인간적이고 물질적이며 세상적인 복을 먼저 구하거나 빌어줄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이고 영적인 축복인 하느님 자신을 먼저 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큰 새해 축복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 늘 하느님 곁에 살면서 그분에게서 참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2016년 새해를 시작하는 첫 달 메시지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역시 나는, 기도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른다. 기도는 너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 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너희는 기도 없이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더 가까이 데려다 주는 연결고리입니다. 기도를 해야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분 안에 머물며 언제나 그분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4-5)
   기도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죽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의 자양분을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비록 육신의 몸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살기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생명이고, 우리가 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말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로 돌아오너라.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우리의 뜻을 먼저 앞세우고, 하느님께서 뜻하신 방식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뜻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 지라는 식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되도록 행동합니다. 왜 입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는 그 반대로 움직이는 것입니까?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자기 삶의 중심이고,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힘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 우리 전 존재를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이 우리 삶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고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철저한 순종과 겸손입니다. 늘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자신을 낮추며, 그분의 뜻을 먼저 헤아리고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언제나 온 마음을 다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는 자유롭게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그분을 거스를 자유가 있다. 사탄이 너희를 죄와 노예살이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려라.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내 아들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내 마음으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자유 의지로 우리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고, 심지어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그분을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자유 의지는 우리에 약이 되거나 독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 사용 배후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이 늘 먼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 8)라고 한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적대자 악마, 즉 사탄은 우리를 죄와 노예살이로 끌어 들이고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주시하며 집어 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초자연적 영적 존재이기에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 어떤 유혹에 쉽게 빠지고, 무엇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어떻게 죄를 짓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 약한 부분들을 치고 들어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죄에 떨어지는지, 무엇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속박을 당하는지 언제나 깊이 성찰하고, 우리 자신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 19-20)라고 말한 사도 바오로 조차도 자신의 약함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 14-15)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약하다고 해서 사도 바오로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께 매달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25)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만 우리가 모든 나약함과 비참함을 딛고 일어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니 위해 먼저 당신의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성모님의 성심은 예수님의 성심과 하나된 성심이기에 우리를 성모님의 성심에 봉헌하면, 성모님께서는 지체 없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시고, 그분의 성심과 하나되게 해주십니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성 이냐시오)

   
 
 
2015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으며, 그분을 품에 안고 그분의 평화와 천국에 대한 열망을 너희에게 주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평화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어머니로서 평화의 복을 누리도록 너희 모두를 축복해 주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으며, 그분을 품에 안고 그분의 평화와 천국에 대한 열망을 너희에게 주고 있다.

예수님의 성탄절이 되어도 세상은 예수님보다는 싼타 클로스를, 성탄 미사 참례보다는 선물 준비와 카드 보내기를 더 강조합니다. 세상은 성탄절을 인간적으로 즐기는 근사한 휴가 시즌으로 만들고, 교묘하게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구세주로 태어나시는 예수님이신데 정작 성탄절에서 그분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고, 예수님 없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늘도 역시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너무도 단순하지만 분명한 사실, 즉 성탄절에 싼타 클로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십니다. 성탄절에 우리의 눈은 오직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에게만 고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평화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어머니로서 평화의 복을 누리도록 너희 모두를 축복해 주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십니다. 성모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위해가 아니라 이 세상과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셔오십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예수님을 모셔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그분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우리가 예수님을 모셔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그 큰 뜻을 알아 듣고, 그 구원 사업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나는 너희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평화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모든 가정, 공동체, 이웃, 교회 그리고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우리 자신이 가는 곳마다 평화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2015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내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니 기도하고, 사탄이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고 유혹하고 있는 이 불안한 세상에서 평화와 희망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어린 자녀들아, 기도 중에 굳건해지고 믿음 속에서 용기를 내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내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다.

1981년 6월 26일 메주고리예 발현 3일째 되던 날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첫 번째 발현지인 포드브르도(발현산)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신 후, 산을 내려 오던 발현목격증인 마리야 파블로비치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평화, 평화, 오직 평화만을!” 그때 마리야는 성모님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이 메시지가 바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의 중심 주제이고, 이것이 바로 성모님 발현의 이유입니다.
   34년 전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시면서 메주고리예 발현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매일 발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매월 25일에는 발현목격증인 마리야를 통해서, 매월 2일에는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계속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왜 성모님은 아직도 매일 같이 메주고리예에서 발현하시고,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전히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실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평화가 실현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여러 전쟁들이 그 이유입니까? 혹은 얼마 전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프랑스 파리 테러를 자행한 IS(이슬람 국가)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물론 외적으로 볼 때 그런 것들이 우리 인류가 평화를 실현하지 못하게 만들고, 평화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요인들입니다. 
   그러나 평화가 위험에 처하고, 우리 인류가 여전히 평화를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인류가 하느님을 잊고, 그분을 저버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평화 그 자체이시고, 그 원천이신 하느님께로 완전히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삶을 철저하게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모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기도하고, 굳건하게 믿고, 회개하며, 보속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니 기도하고, 사탄이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고 유혹하고 있는 이 불안한 세상에서 평화와 희망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우리 인류가 평화를 실현하지 못하게 하고, 평화를 위험에 빠뜨리는 만드는 또 다른 영적 요인은 바로 사탄의 존재입니다. 사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인류를 가장 강력하게 공격하며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느님 아닌 것들, 예컨대 돈, 섹스, 힘과 명예 등을 하느님처럼 섬기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관심을 거두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 탐닉하도록 각종 대중 매체의 영향에 빠져들게 하여 기도보다는 그런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시간을 쓰게 만듭니다. 또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과 탐욕, 시기와 분노, 의심과 절망의 씨앗을 뿌려 개인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가정 불화와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국가간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 어느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비율의 이혼, 낙태, 안락사, 그리고 테러와 전쟁 뒤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이 그 실제 배후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공격과 유혹으로 불안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평화와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력한 초자연적 힘을 가진 사탄에 맞서 우리가 평화와 희망의 사도가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으며, 얼마나 그 효과가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모님, 수많은 천사들과 성인들, 그리고 열심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 늘 우리와 영적으로 함께 하기에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영적 원군들과 기도로 함께 하면서 우리가 먼저 평화와 희망을 구하고 살며 전파한다면, 그 힘은 널리 퍼져나갈 것이고, 사탄의 공격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 중에 굳건해지고, 믿음 속에서 용기를 내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분의 힘에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키워줍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에 놓여져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좋으신 하느님께서 자기를 구해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오고 계셨을 때, 그를 본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걸어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속으로 빠졌고,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14, 22-33 참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걸어오라고 말씀하시면,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갈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을 가지게 되고 용기를 잃었습니다. 바로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하고, 그 말씀에 따랐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갈 때, 그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계심을 잊고 그분이 아니라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 그는 믿음과 용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우리는 기도 중에 굳건해지고, 믿음 속에서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존재이기에 때로는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상황에 직면하면 베드로처럼 믿음과 용기를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2015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너희 모두를 위해, 특별히 내 부름에 대해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너희는 은총의 시기를 살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현존을 통해 너희에게 주시는 선물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오늘도 역시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이 시대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라. 그러면 너희는 거룩함이 실제로 너희 모두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기쁨이기에, 그분 눈에 너희는 유일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사랑 안에서 기뻐하여라. 평화, 기도 그리고 사랑을 증거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너희 모두를 위해, 특별히 내 부름에 대해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너희는 은총의 시기를 살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현존을 통해 너희에게 주시는 선물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그 자리에 있었던 사도 요한을 성모님의 아들로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성모님을 만민의 어머니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성모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특별히 내 부름에 대해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참 어머니이시기에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부름을 들었으나 그에 응답하지 않는 자녀들, 그 부름조차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당신의 발현을 여러 가지 이유로 받아 들이지 않고, 심지어는 그를 박해하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당신과 뜻이 달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 구원을 위해 마음을 열고 당신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시면서 기도하시는 성모님의 한없는 모성애에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성모님을 본받아, 그분과 함께 아직도 성모님의 부름에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당연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은총은 우리를 구원의 길,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모님께서 여전히 우리 가운데 찾아 오시고, 당신의 메시지로 우리를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끄시며,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구원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은총으로 알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에 성모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표징 그 자체인 성모님과 그분의 메주고리예 발현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당신을 거부하셨던 예루살렘을 보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3, 34-35)

어린 자녀들아, 오늘도 역시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이 시대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라. 그러면 너희는 거룩함이 실제로 너희 모두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을 닮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 4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같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이 말씀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셨으니, 우리는 반드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배움에 앞선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앞서 거룩하게 산 사람들, 즉 성인들의 모범을 잘 살펴봄으로써 그들에게서 구체적으로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이 시대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성인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수많은 성인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성녀 파우스티나, 성 막시밀리안 콜베, 오상의 성 비오 성인, 성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1978년 교황직에 오르시어 2005년에 돌아가시고, 2014년에 성인품에 올려지셨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사셨던 성인이십니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성인이 우리 동시대에서 나오셨다면, 우리 역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을 우리 자신과 전혀 무관한 저 먼 옛날 얘기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안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또 다른 우리 동시대의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기쁨이기에, 그분 눈에 너희는 유일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사랑 안에서 기뻐하여라. 평화, 기도 그리고 사랑을 증거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부모님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 자녀들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께 가장 큰 기쁨은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이지만, 그분 눈에 우리는 유일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독보적이고 유일하며 가장 중요하고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눈을 떼시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시며, 우리를 모든 위험과 죽음에서 구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기에 이미 오랜 전에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 내가 이집트를 너의 몸값으로 내놓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너 대신 내놓는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 대신 다른 사람들을 내놓고 네 생명 대신 민족들을 내놓는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해 뜨는 곳에서 너의 후손들을 데려오고 해 지는 곳에서 너를 모아 오리라. 내가 북녘에 이르리라. ‘내놓아라.’ 남녘에도 이르리라. ‘잡아 두지 마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너라.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이사 43, 1-7)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기쁨이고, 그분 눈에 유일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창조주, 구원자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를 깊이 체험하셨던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1-39)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참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늘 감사 드리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깊이 깨달으며, 그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 말씀대로 평화, 기도 그리고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15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확고한 신앙으로 너희의 마음을 채워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고 있다. 기도와 신앙은 사랑과 기쁨으로 너희의 마음을 가득 채워 줄 것이고,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서로 격려해 주어라. 그러면 기도가 너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줄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매일같이, 모든 것에 앞서, 너희는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그분을 섬기는 증인이 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너희 이웃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확고한 신앙으로 너희의 마음을 채워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고 있다. 기도와 신앙은 사랑과 기쁨으로 너희의 마음을 가득 채워 줄 것이고,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참되고 영적인 어머니이신 성모님 역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 보시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확고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성령께서 확고한 신앙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성모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확고한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먼저, 너무도 쉽고 간단한 답이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확고한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성령께 확고한 신앙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실 겁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더욱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할 주변의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점점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저버리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확고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은 확고한 신앙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성령께 무엇을 청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성모님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 가장 필요한 확고한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 15-17) 

이렇듯이 근본적으로 신앙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기도 중에 사도들처럼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 하고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비록 신앙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신앙은 동시에 우리가 기도할 때 더해집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기도의 열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신앙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기도는 신앙을 더욱 증진시키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와 신앙은 우리를 점점 더 하느님 가까이 데려다 주기 때문에 또 다른 성령의 은사인 사랑과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져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기도와 신앙으로 단련되어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면, 우리의 얼굴과 눈, 그리고 우리의 전체 모습은 맑고 빛이 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 5, 14-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거룩한 맑음과 빛남은 주변에 저절로 좋은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우리를 통해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서로 격려해 주어라. 그러면 기도가 너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줄 것이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두 기도해야 하고, 온 교회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숨쉬기를 멈춘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적 호흡인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교회 안에 끊임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 각자는 기도하고, 서로 서로 기도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사제는 직접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면서 신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하며 신자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메주고리예에서처럼 사제가 미사 전에 직접 묵주기도를 인도하고, 성시간을 이끌면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수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수도자는 이미 수도자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수도자들을 기도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도자는 그 누구보다도 기도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말과 모범으로 동료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해야 합니다. 

기도는 사제와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기도는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서로 서로 기도하자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부부, 부모와 자식, 본당 신자들, 같은 공동체와 단체원들, 친구와 이웃 등 그 어느 관계에서든 함께 기도하고, 서로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오직 마음으로 기도하는 곳에서만 생명이 넘쳐나고, 삶이 충만해집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매일같이, 모든 것에 앞서, 너희는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그분을 섬기는 증인이 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너희 이웃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상관없이 늘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찬미하면서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구약의 욥 성인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와 우리의 마음이 건조해져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 순간마저도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진짜로 매일같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섬김을 우리 삶의 최우선에 두지 않을 때, 우리는 금방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저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외면하게 되고, 자신만을 챙기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배하며 섬기면서 그 사랑의 마음을 우리의 형제자매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 20-21)

   
 
 
2015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가 너희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날개가 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버렸기 때문에 시련의 때를 겪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내 아들에게로 인도하고 있지만, 너희는 하느님 자녀로서 자유롭게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고 무한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기도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가 너희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날개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기도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이 기도가 될 수 있을까요? 딱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마음으로 많은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래 달리기를 하고 나면 멈추려고 해도 저절로 계속 다리가 앞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를 열심히 오래 많이 하다 보면, 기도는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 외에 더 기쁜 것이 없을 정도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그때 우리 자신이 기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땅에 발을 두고 있는 우리는 늘 지상의 것들에 눈이 가고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영적으로 이 지상을 떠나 천상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상의 날개를 가져야 합니다. 육신은 지상에 있으되 마음과 영혼은 언제나 천상 아버지께로 날아갈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기도가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날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저버렸기 때문에 시련의 때를 겪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이끌어낸 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신명 6, 4-9)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기적적으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들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그 하느님은 아주 보잘것없는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느님,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인식했고, 틀림없이 마음으로 오직 그분을 잊지 않고 그분만을 섬기기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눈에 보이는 표징까지 만들어서 그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명령을 끊임없이 기억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계명과 법규와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들을 짓고 살게 될 때, 또 너희 소 떼와 양 떼가 불어나고 너희에게 은과 금이 많이 생기며, 너희가 가진 모든 것이 불어날 때, 너희 마음이 교만해져,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를 위하여 차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시다. 또 그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몰랐던 만나를 너희가 먹게 해 주신 분이시다. 그것은 너희를 낮추고 시험하셔서 뒷날에 너희가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 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만일 너희가 정녕 주 너희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한다면, 내가 오늘 분명히 경고하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처럼 너희도 멸망할 것이다.”(신명 8, 11-20)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자신들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그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시련을 겪고, 마침내는 모세가 예언했던 대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 왕에게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바빌론에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왕을 비롯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538년까지 5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 유배 기간 중 자신들이 바빌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들이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자신들이 지은 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들을 섬긴 죄,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저버린 죄의 결과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습니다.

그러면 그 후로 이천육백 년이 흐른 오늘날 세상은 어떻습니까?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처럼 오늘날의 세상 역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현재 세상이 겪는 시련들은 앞으로 올 더 큰 시련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죄로 가득했던 노아 시대의 세상을 벌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대홍수를 보내셨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저버리고 동성애 쾌락에 빠져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떨어졌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을 이처럼 저버렸던 때는 인류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어떤 벌이 떨어질지 너무도 자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인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인류가 스스로 벌과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하느님을 알아드리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즉 회개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인류가 모든 시련, 벌, 그리고 멸망에서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대홍수로 죽었지만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통틀어 여덟 명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오직 그들만이 하느님을 잊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의롭게 살고, 그분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어떤 큰 시련을 겪게 될 지 알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내 아들에게로 인도하고 있지만, 너희는 하느님 자녀로서 자유롭게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고 무한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은 만물이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나자렛 처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당신의 뜻과 계획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하거나 힘으로 밀어 부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는 딸이기에 마리아가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렇게 피조물인 자신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놀라운 하느님을 체험하셨던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에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내 아드님께로 인도하고 있지만, 너희는 하느님 자녀로서 자유롭게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자유 의지에 대한 당신의 존중을 표현하십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심으로써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 성모님과 우리에게 하시듯이 우리도 다른 이들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강요하거나 힘으로 상대방을 밀어 부쳐 그 자유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러하시고, 늘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무한히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성모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시고, 우리 자유 의지를 그처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하시는 성모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저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당신의 아들이시며 저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로 저를 늘 인도해주십시오. 어머니, 저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Totus Tuus,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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