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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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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를 통해 너희에게 내려오시고, 너희가 회개하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의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어라. 그러면 그 증언들을 통해 너희는 또한 하느님과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너희를 먼지와 죄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들을 찾고, 지상의 것들은 지상에 내버려두어라. 너희는 거룩함에로 불리웠고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 

2018년 새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늘 그러하듯이 “사랑하는 자녀들아!”라는 말씀으로 새해 첫 메시지를 시작하십니다. 매번 메시지마다 이 말씀을 하셔서 지나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 성모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메주고리예 발현 36년 7개월 동안 아주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를 주실 때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너희가 나에게서 멀어져 있을 때에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성실하게 표현하셨습니다. 2018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성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메시지는 우리에 대한 성모님의 모성애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자녀의 안녕을 위해 사랑으로 내려주시는 메시지에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모든 메시지들을 깊이 받아 들이며, 그 메시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녀된 자의 참된 자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지금 즉시 기도에 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 혹은 모레, 아니면 시간이 있을 때 기도하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모든 것에 앞서 기도를 맨앞자리에 두고자 다짐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바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라는 너무도 잘 아시기에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를 통해 너희에게 내려오시고, 너희가 회개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사도들에게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 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모님 그리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일을 루카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 12-14)
   그렇게 사도들은 성모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분과 함께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이어진 여러 날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을 때, 마침내 성령께서 백 스무명의 초기 교회 공동체에 임하셨고,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증언을 하면서 회개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으로써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예수님께로 돌아서고, 더 이상 세상이나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홀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셨고,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전교회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셨던 성모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회개를 불러 일으켜주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를 통해 너희에게 내려오시고, 너희가 회개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어라. 그러면 그 증언들을 통해 너희는 또한 하느님과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계획이나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먹은 대로 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마음 먹으면 우리는 거룩한 것을 행하려고 하고, 우리가 세속적인 것을 마음 먹으면 우리는 세속적인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거룩한 것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살기로 마음 먹고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것, 하느님께로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인간이 어떻게 구원되었는지,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하느님께 인간이 감사와 순종으로 성실하게 응답했을 때 어떤 축복과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그 반대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죄악으로 길로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졌는지 등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신앙과 배반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알게 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좀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알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공부도 성경을 아는데 도움을 주지만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모르고, 성경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우리 마음에 오시기를 청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더 활짝 열어주시고,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틈을 자주 만들어서 성경을 열고,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너희를 먼지와 죄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들을 찾고, 지상의 것들은 지상에 내버려두어라.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숨을 불어넣기 전까지는 살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이 없는 존재는 다만 그저 수많은 작은 먼지들로 이루어진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숨을 빼앗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숨통을 막아 우리를 그저 먼지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숨통을 막아버리기 위해 죄를 짓게 하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우리 영혼은 감옥에 감히게 되고, 하느님의 숨이 들어오는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참 생명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 계속 자유롭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설령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과 그분의 것들을 찾지 않고, 지상의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쏟게 합니다. 그것들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삼게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돈과 재물, 이 세상의 것들의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이 지상에 사는 한 우리는 의식주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의식주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들일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해 주실 것입니다.(마태 6, 25-34 참조)

너희는 거룩함에로 불리웠고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거룩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다고 말합니다.(1테살 4, 3. 7 참조) 베드로 사도 역시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 15)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거룩함에로 불리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 14)라고 말합니다. 거룩함이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조건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지상에 사는 동안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의 두 눈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기 위해서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세의 천국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면 되고,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강조해야 할 점이라고 말합니다. 이 지상을 천국처럼 만들고,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것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지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현세의 것들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지상과 지상의 것들은 영원한 천국과는 절대로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발을 이 땅에 딛고 있으나 우리의 머리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이 지상이 아니고, 천국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천국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갈 수 있는 영원한 장소, 그 천국입니다. 주님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뵙고, 주님과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그 천국을 구하라고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 지상에서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행복과 평화를 누리려면 지상의 것들이 아니라 천상의 것들을 구하라고 우리를 말씀하십니다. 

   
 
 
2017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와 축복을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받은 은총과 은사들을 살며 증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기쁨으로 가득 찬 증거자, 또 평화와 희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와 축복을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예수님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은 나자렛 출신의 처녀였습니다. 그 당시 나자렛의 인구은 4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라고 말했을 때,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말한 것을 보면(요한 1, 45-46 참조), 나자렛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동네에 불과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작은 동네 나자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를 당신 아들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전언 대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예수님을 낳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는 메시아로 세상에 태어나야 하기에 다윗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을 나자렛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은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이미 약혼한 사이인 요셉이 속한 다윗 가문의 호적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노의 명령에 따라 마리아께서는 남편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낳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예수님께서 다윗 왕의 출생지이며, 다윗 가문의 호적지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을 보면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금 주목할 것은 베들레헴 역시 그리 큰 마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인구 4만명이 살았던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8km 남단에 위치한 베들레헴의 당시 인구는 겨우 3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태어나시도록 준비하셨고, 역시 작은 마을 출신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당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제외하고 첫 번째로 아기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베들레헴 인근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 일에 관해 루카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 8-20)
   목자들은 주님의 천사가 들려주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님을 뵙고 대단히 기뻐했으며 하느님을 찬미 찬양했습니다. 
   2천년 전에 있었던 이 사건은 그저 과거의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아닙니다.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인 구세주 예수를 낳아주시고, 목자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었던 그 사건이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바로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세상에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현재 인구 3500명의 메주고리예는 1981년 성모님 발현이 시작되고 15년 간 그 3분의 1의 숫자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를 감안하면 성모님 발현이 시작된 1981년 당시 메주고리예에는 적은 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 이전까지 메주고리예는 나자렛이나 베들레헴처럼 작은 마을이었고, 인구도 매우 적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으로 선택하시어 성모님 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우리도 메주고리예로 달려가 성모님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느님, 평화의 왕, 구세주로 살아 계심을 믿고, 그분은 우리의 주님으로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받은 은총과 은사들을 살며 증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기쁨으로 가득 찬 증거자, 또 평화와 희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총은 바로 그분의 자비로우신 사랑이요 그분 자신이십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서 우리에게 호의로 거져주어지는 것이기에 늘 감사하게 받아야 하고, 귀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선을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다른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겸손되게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사용할 때, 그 은사들은 주어진 목적에 알맞게 사용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알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교인이었을 때에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휩쓸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 1-11)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호의로 우리에게 은총과 은사들을 내려주셨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우리 안에 간직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잘 활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받은 은총과 은사에 대한 감사와 활용은 곧 그것들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증거로 이어집니다. 각자 받은 은총과 은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 먼저 잘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감사 드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을 위해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봅시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갈라 5, 25)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례와 견진을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늘 그분의 인도를 청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두려운 마음이 들면 바로 무릎을 꿇고 성령께서 오시어 그 두려움을 물리쳐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 22-23) 따라서 마음을 다해 성령께 기도하며 이 열매들을 청하면 성령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와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이 주신 은총과 은사를 살며 기쁘게 이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떠한 순간에서든지 평화를 추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2017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너희를 기도에로 부른다. 기도하고 평화를 구하여라. 너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여기 이 땅에 오셨으며 너희의 형제이신 내 아들은, 하느님 없이 너희에게 미래나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며 그분과 너희의 개인적 만남에 대한 기대와 은총 속에서 살아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너희를 기도에로 부른다. 기도하고 평화를 구하여라.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라는 어느 자선 단체의 구호가 생각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해서 얻어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구걸을 할 힘이라도 있으니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호에 비하면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은총으로 다가옵니까? 비록 매일 지지고 볶을지언정 함께 사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은총으로 여겨져서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어디 좀 불편한 데가 있어도 그래도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는 건강을 은총으로 주신 하느님께 고마워하고 있습니까?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열심히 일해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힘과 직업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힘이 있습니다. 다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현재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한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시기에 우리를 기도에로 부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힘을 우리의 육신을 넘어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한해를 마감하는 연말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기도 생활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값지게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종 송년 모임과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각종 파티와 음주 오락 등으로 흥청망청하며 정신없이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모든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성모님과 함께 앉아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한없이 바쳐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여기 이 땅에 오셨으며 너희의 형제이신 내 아들은, 하느님 없이 너희에게 미래나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 1-4)
   이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별 믿음없이 사는지, 선하게 사는지, 죄 속에 사는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인지,  혹은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하는지, 아니면 지상의 것들에 온통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 있는지 등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2위이신 성자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부정적이고 죄스러운 것까지도 모두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것들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형제가 되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황송한 일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 혹은 노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사랑 덕분입니다. 
    이 자비와 사랑에 감사드리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삶의 중심에 있던 예수님 아닌 것들을 모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며, 오직 그분만이 모든 것 위에 최고가 되실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우선권을 예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이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과감하게 없애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이고, 하느님을 자신의 삶에 모셔 드리고 그분을 첫 자리에 모신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의 삶을 움직여가십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
   하느님께서 동반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사람의 인생은 밝은 미래가 있고, 그 미래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천국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회개할 때 이루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지금 바로 우리가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며 그분과 너희의 개인적 만남에 대한 기대와 은총 속에서 살아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기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서로 친해지기 위해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예수님과 친해지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시간 없이 절대로 예수님과 친해질 수 없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그분과의 개인적 만남에 대한 기대와 은총 속에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17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너희 모두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고, 평화가 부족하다. 성인들이 너희에게 모범이 되고 거룩하게 살도록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고, 너희는 너희 자신의 회개를 통해 구하는 가운데 쇄신될 것이다. 신앙이 너희에게 희망이 될 것이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너희 모두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고, 평화가 부족하다. 성인들이 너희에게 모범이 되고 거룩하게 살도록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도 자체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우리에게 기도가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고, 평화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우리의 문제, 괴로움, 고통에 답과 힘이 되어 주고, 기도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성인들 역시 우리처럼 이 지상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분들 역시 우리처럼 문제, 괴로움, 고통을 체험했고, 때론 평화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럴 때마다 성체 앞으로 달려 갔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묵주를 손에 들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충만한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모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죄 말고는 인간의 모든 조건을 체험하셨고, 성모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이 지상에서 사셨기에 인간이 어떠한 문제와 괴로움 그리고 고통을 겪는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성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기에 제3자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자녀의 문제, 괴로움, 고통은 부모의 것이기도 한 것처럼, 아니 육신의 부모들보다 더 우리의 문제, 괴로움,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우리에게 평화가 부족한 것을 안타까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기도와 성인들을 모범을 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고, 너희는 너희 자신의 회개를 통해 구하는 가운데 쇄신될 것이다. 신앙이 너희에게 희망이 될 것이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이 늘 그들 가까이에 있었음을 믿고 체험했던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을 본받고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거룩하게 살려고 애썼고, 매일매일 매순간 회개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쇄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문제, 괴로움 그리고 고통을 안고 있을지라도 하느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늘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온갖 문제와 괴로움 그리고 고통이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 35-37)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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