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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너희의 삶은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있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하느님과 너희의 만남의 체험을, 너희는 사랑으로 증거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 

성녀 모니카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29년 동안 끊임없이 기도했고, 눈물과 희생으로 가득한 그녀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사제, 주교, 그리고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였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던 것이고, 아들의 회개를 넘어서 그 아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 육신의 어머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속속들이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우리를 회개로 부른다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조차도 성모님께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고 하실 때 바로 그 ‘너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느 누구도 회개하라는 어머니의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죄와 잘못 그리고 오류 속에 살면서도 그를 인지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혹은 죄에 대한 정당화나 합리화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를 죄와 악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 생명과 구원을 얻도록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르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회개하라는 어머니의 부르심은 바로 그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지만 분별력이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의 지도와 인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다 큰 것같아도 성모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어린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모님의 지도와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우리를 위한 때라고 인식할 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먼저 깨닫게 됩니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이 시간을 잘 활용하여 진정으로 우리를 위한 때가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침묵과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침묵이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까? 침묵이야말로 기도의 산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침묵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너무 시끄러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리가 아닌 수많은 세상의 소리와 그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사탄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마음이 점점 없어지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데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또 너무 많은 말을 하느라 마음의 침묵을 지킬 틈도 부족하고, 기도할 시간도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말은 많이 하지만 기도하지는 않는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기로 결심하여라.”(1993년 12월 25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침묵과 기도를 생활화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러므로, 너희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너희의 삶은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서도 가장 큰 사랑인 하느님의 사랑이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온기를 넘어서 불꽃처럼 타오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만이 하느님을 바라고, 그분을 믿게 됩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 희망과 신앙이 낟알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다면 그 온기로 낟알은 싹이 트고 자라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에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에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는 것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 하느님께 바라고 믿는 사람, 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속아내어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간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삶은 질서가 잡히고, 작은 것 하나에도 성실하게 또 책임감있게 대하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하느님과 너희의 만남의 체험을, 너희는 사랑으로 증거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불타는 사람, 하느님만 바라고 믿는 사람, 매일매일 기도에 갈증을 느끼고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집이 이 지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나그네처럼 살 수 있습니다. 또 이 지상의 것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처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오직 하느님만 변치 않으신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오직 하느님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점점 더 하느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 만남의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다른 이들 역시 그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분 가까이 가도록 만드는 참사랑을 실천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 성모님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떻습니까? 늘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분 메시지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고 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안타까움을 느낍니까?
   옛 격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도록 성모님께 ‘예’하고 응답합시다. 성모님께 우리 자신은 온전히 의탁하고, 성모님의 메시지 대로 살려고 노력합시다. 지금이라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을 ‘예’라고 말씀드립시다. 지금은 우리를 위한 때이지만 이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때가 다 지난 후 아무리 수천만번 ‘예’라고 해도 그 때는 늦을 것입니다. 

   
 
 
2018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평화가 너희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현존은 사랑의 표징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평화가 너희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어라.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연히 그곳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8 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인구 300명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셨을까요? 마리아의 배우자이자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받은 다윗의 자손 요셉의 고향이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빵의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정체성과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빵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보여주셨고,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같이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따라서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의 탄생에는 이미 성체성사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잠재적인 형태로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빵이 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십자가 죽음에서  평화를 이룩하신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 14-17)
   메주고리예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다시 모셔다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십니다. 특별히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한 한 많이 매일 미사에 참례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 앞으로 나아가 그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때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의 집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 38년 6개월 동안 4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순례하고, 성모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지만, 성모님의 그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예수님께 열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제 12, 2) 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셔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을 예수님께 활짝 열어 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늘 흘러 넘치도록 온전히 의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평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직까지 그분의 평화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특별히 우리 주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연장된 당신의 손, 당신의 사도가 되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고 산다면, 우리는 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쁨이 바로 평화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얼굴은 밝고 웃음으로 가득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저절로 그 기쁨에 전염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먼저 섬기려고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예수님의 평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평화의 전제조건이고, 기쁨은 평화의 열매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현존은 사랑의 표징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늘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역시 우리에 함께 계십니다. 더군다나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착하신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인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어 그를 증명해주고 계십니다. 
   성모님 사랑의 표징인 메주고리예에서의 그분의 현존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자체가 바로 어머니의 집이고, 어머니 마을입니다. 즉 그곳은 우리의 집이고, 우리의 고향 마을입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모님의 현존,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다시금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게중에 어떤 사람들은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와서도 아무런 감흥이나 삶의 변화도 없고,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 그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은 순례가 아니라 관광 차원에서 메주고리예 성지 관광을 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이끄시는 기도의 학교에 가서 기도하기 보다는 관광객들처럼 인간적인 편의를 구하고 뭔가 자극적인 것, 예를 들면 태양이 도는 것을 맨눈으로 보거나 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에서 태양이 회전하거나 색깔이 바뀌는 초자연적 기적이 보여지는 것은 예수님의 성체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81년 6월 24일 이래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까지 성모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사, 묵주기도, 성체조배, 성시간, 십자가의 길, 성경 봉독, 고해성사 등, 메주고리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기도이고, 기도로 끝이 납니다. 특별히 메주고리예 순례의 핵심은 하절기(5월~8월)에는 오후 6시, 동절기(9월~4월)에는 오후 5시부터 메주고리예 야고보 성당에서 본당 신자들과 모든 순례자들이 함께 모여 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들의 인도에 따라 미사 전 10단의 묵주기도, 크로아티아어 국제 미사, 미사 후 5단의 묵주기도, 치유의 기도, 그리고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미사 후 밤에 거행되는 성시간으로 이어지는 3시간의 매일 저녁 기도 프로그램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오전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고, 발현산과 십자가산을 오르면서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각종 영적 체험담과 강의를 듣고, 개인 기도를 바치며 메주고리예 순례를 하게 되면 기도의 바다에서 하루 종일 헤엄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순례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고 회개 체험을 하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이 목적이라면 절대로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도가 목적이라면 반드시 그곳에 순례를 가봐야 합니다. 자신들의 기량을 더 향상시키고, 다음 경기들을 준비하기 위해 전지 훈련을 떠나는 운동선수들처럼 기도의 선수가 되기 위해 기도하는 메주고리예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빛을 보고 싶으면 관광을 가야 하고, 기도하는 중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싶으면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극대화시켜주는 순례가 바로 메주고리예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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