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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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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사랑 그리고 펼쳐진 나의 손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닮은 모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을 닮아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절제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선보다는 악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다가 사탄이 온갖 유혹과 거짓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죄짓게 하고 악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선하게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지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 몸에 밴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을 청하고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굴에 뭐가 묻어 있는지, 머리가 제대로 단정하게 되어 있는지, 혹은 옷은 제대로 입었는지 등을 살피기 위해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듯이, 기도라는 영적 거울을 통해 우리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선한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악한 것은 과감하게 도려낼 수 있도록 매일매일 양심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의식적으로 그런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는, 우리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선을 품고 우리의 행동으로 그 선을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 직장, 학교, 성당, 이웃, 사회, 국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우리 마음의 쇄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 19-20) 고 하셨기에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 모두를 다 마음 밖으로 들어내고 그 자리에 좋은 생각들, 사랑, 자비, 용서, 헌신, 절제, 인내 등과 같은 선한 것들을 새로이 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쇄신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쇄신은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 26)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선이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기도하고 마음을 새롭게 했는데도 기쁨의 열매,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가 선이라고 믿고 뿌렸던 그 선이 진정한 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선처럼 보이지만 그 동기가 자기 자신의 만족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전혀 식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이목을 끌기 위해 행한 것이라면 거기에서는 참된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가 절대로 맺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뿌리는 모든 선의 씨앗은 그 동기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순수하고 아무 사심 없는 마음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 1-4) 이 시편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 숨은 생각까지도 다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가 감언이설이나 포장된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만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또한 심지어 잠깐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그것 역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 26)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감추어진 것은 끝내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올 수 없고, 팥 심은 데서 콩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뿌린 선이 진정한 선이고 거기에 기도와 마음의 쇄신이 더해진다면 그 선은 분명 기쁨의 열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사랑 그리고 펼쳐진 나의 손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마태오 13장 20-30절에서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어지는 36-43절에서 그 비유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밀밭에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종말 때에 이 가라지를 다 태워버릴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밀을 보호하기 위해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는 것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 나라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한 자의 자녀들까지도 참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즉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동안 메시지에서 단 한번도 쓰신 적이 없는 단어를 이번 달 메시지에서 처음으로 쓰셨습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가라지’ 입니다.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 즉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남을 죄 짓게 하는 모든 사람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뒤흔들어 그들 마음 안에 선한 열매가 맺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도 죄를 짓고 악하게 살면서 마치 전혀 그러지 않은 것처럼 꾸미고 교묘하게, 혹은 대놓고 남을 죄 짓게 하는 사람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적지 않게 많습니다. 그리고 그 폐해가 무척 크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지가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라지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빛, 사랑 그리고 펼쳐진 성모님의 손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비록 가라지가 판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은 여전히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 미움이 아니라 사랑, 그리고 성모님을 대신하여 성모님의 손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도와주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들이 되라고 간청하십니다.

   
 
 
2024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기도의 때가 되기 바란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기도의 때가 되기 바란다.

2024년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주어진 이번 달 성모님 메시지는 아주 짧습니다. 단 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메시지를 처음 접했을 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한 문장으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들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집, 직장, 건강, 자동차, 음식, 옷 혹은 그 외 어떤 것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공간과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그것들이 분명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2024년을 시작하시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기도’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직장도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데 기도를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이 시기를 기도의 때가 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아주 똑 떨어지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찬찬히 읽고 묵상해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25-34)
   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면 우리에게 필요한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 생활했지만 아주 오래 전에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겼던 한 성인의 삶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지난 1월 17일은 성 안토니오 성인의 축일이었습니다. 그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그는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내지 스무 살 정도였고 가사와 여동생의 양육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주일 날 성당에 가던 길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세주를 따랐는가? 또 사도행전이 말해 주는 대로 무엇 때문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나온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는가?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크고 위대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당에 들어갔는데 그때 막 복음이 봉독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 21)
   안토니오는 성당에서 나온 즉시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소유지 약 37만평 전부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동산 전부를 처분한 돈 가운데 여동생을 위해 약간만 남겨 두고 상당한 액수가 되는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음 번 성당에 갔을 때, 그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이 담긴 마태오 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위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후 성당에서 나와 남겨 둔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여동생을 잘 알고 있던 믿을 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기고 거기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근처에서 고행 생활을 시작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 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 기억하며 손수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번 수입 중에서 약간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또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 6)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고 하신 말씀에 따라 오랜 시간 기도하고, 그 내용을 모두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3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으며,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리울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동과 극기와 기도로 주님을 따랐던 안토니오 성인은 모든 성경 말씀을 살고자 했지만, 특별히 평생 동안 마태오 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평화의 모후께서는 한 발현목격증인을 통해 매주 목요일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바로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무엇을 통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은 그 답이 바로 ‘기도’ 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면 밥이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입을 옷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마실 물이 생깁니까?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적으로 혹은 독점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신 섭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의 때입니다!

   
 
 
2023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평화이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마음을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도록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라.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그분은 너희 각자에게 그분 자신을 매일 주시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아라." 오늘 성대하게 차려 입으신 성모님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오셨다. 성모님이 우리를 향해 아람어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표징으로 그분의 팔을 벌리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평화이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마음을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도록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대림과 사순 시기 밖의 모든 주일, 대축일과 축일, 그리고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전례를 거행할 때 성령 안에 함께 모여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양께 영광을 드리고 간구하는 대영광송을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이 대영광송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저는 미사 중에 이 부분을 노래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예수님 탄생 때의 베들레헴으로 향해 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이 말씀이 첫 번째 성탄, 즉 2천년 전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 앞에서 하느님을 찬양했던 찬미가였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이 짧은 찬미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성모님의 몸을 통해 아기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라고 말하는 하늘 군대의 찬미가 뒷부분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평화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찬미가 뒷부분은 아무나 그 평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 즉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그 평화가 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한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며 하느님의 계명과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지만 그를 받기 위해 먼저 회개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이후 이어진 공생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여러 기적들을 통해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갈릴래아 지역의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 고을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 21-24)
   이렇게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인류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당신의 어머니를 마지막 시대의 ‘천상 예언자’로 이 땅에 보내고 계십니다.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발현하고 계시는 메주고리예 성모님께서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통해 인류를 회개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인류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과 평화를 얻을 수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다음 성모님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초대한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너희에게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1996년 2월 25일)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새롭게 태어나시도록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라.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그분은 너희 각자에게 그분 자신을 매일 주시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아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소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 마음은 수많은 생각과 걱정들 때문에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 같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모님께서는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침묵하기 위해 내적인 고요를 찾아야 하지만 그에 앞서 외적인 침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침묵하려고 해도 외적인 소음이 계속되고 있을 때는 절대로 집중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침묵을 방해하는 외적인 소음을 먼저 제거하거나 차단하고 마음으로 침묵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맞는 시간과 장소를 정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정해야 합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 시간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기와 선택 그리고 헌신이 있어야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며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어느 곳일까요? 그곳은 바로 성당입니다. 성당 안에 성체가 현시되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앉아 사랑의 눈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경배한다면 우리 마음은 저절로 침묵을 지키게 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 마음과 영혼 안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성체 앞으로 나가 마음의 침묵을 지키면서 그분을 조배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성체조배도 무척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사 참례입니다. 미사는 가장 최고의 완전한 기도이기에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한 만큼 매일미사도 참례해야 합니다. 사제를 통해 매일미사 때마다 새롭게 우리 가운데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며 심지어 그분을 우리 몸 안에 모실 수 있는 그 엄청난 기적이 매일 우리 성당의 미사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27.35.51)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청원합니다. 예수님은 매일미사 때마다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매일같이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오십니다. 매일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성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매일미사 참례를 하루 중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로 정합시다. 

오늘 성대하게 차려 입으신 성모님은 어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오셨다. 성모님이 우리를 향해 아람어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표징으로 그분의 팔을 벌리셨다.

1984년 3월 1일부터 성모님께서 공식적으로 메시지를 주기 시작하셨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메시지 뒤에 성모님 발현 광경을 묘사하는 글이 공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야고보 본당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번 2023년 12월 25일 메시지 뒤에 위와 같은 광경 묘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기에 성모님께서 이것을 당신의 메시지와 함께 첨부하도록 마련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발현목격증인 비츠카는 성모님이 어떻게 생기셨느냐고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모님은 매우 아름다운 파란 색 눈을 지니셨고, 머리칼은 검은색인데 약간 곱슬거리며 키는 자신보다 약간 더 크시다고 대답했습니다. 비츠카의 말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에는 언제나 앞서 밝은 빛이 나타나고, 성모님께서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긴 회색 드레스를 입으시고 흰 베일을 쓰고 계시며 머리 주위에는 늘 12개의 별이 왕관처럼 둘러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축일에는 종종 황금색 옷을 입으시고 황금색 베일을 쓰시며 많은 보석으로 장식하기도 하십니다.
비츠카가 증언한 바와 같이 이번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성모님께서는 장엄하고 성대한 옷차림으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오셨습니다. 보통 성모님께서는 발현목격증인들에게 그들의 언어인 크로아티어로 말씀하시고 그 언어로 함께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모님께서 메시지 수령자인 발현목격증인 마리야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시면서 아람어를 쓰셨기에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람어는 성모님이 지상에 계실 때 쓰시던 그분의 모국어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언어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2천년 이상이 지난 지금 왜 성모님은 굳이 아람어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을까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혹시 ‘당신이 몸소 아람어를 쓰시던 당시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그 옛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첫 성탄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메주고리예는 사람들 마음에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시도록 만들어 주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번 성탄절에 아람어로 기도해 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또 이번 달 메시지에서 특이했던 점은 성모님께서 보통 메시지 끝에 붙이시는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역시 의아했는데 12월 25일 같은 날 야콥 촐로에게 연간 발현하시면서 주신 메시지 끝에 이 문구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이번 달 메시지와 야콥을 통해 주신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야를 통해 주신 공식적인 월간 메시지와 야콥을 통해 주신 연간 메시지를 함께 읽으면서 이번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성모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는지 그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는 내 아들과 함께, 너희 마음의 치유를 위해 어린 아기 예수님께 기도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르고 싶다. 자녀들아, 너희 삶을 파괴하는 죄가 종종 너희 마음을 지배하기에 너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이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는 이 은총의 날에, 너희 삶과 마음을 주님께 의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은총으로 그 모두를 치유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만 예수님의 탄생을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 탄생의 빛이 너희 삶을 비추어 줄 것이다. 나는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2023년 12월 25일 야콥 촐로에게 주신 연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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