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회개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의 회개만 필요하다면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로부터 회개해야 하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느님을 잊고 살기 때문에 거듭거듭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눈을 감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서야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고 짓지 않아야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해서 거기에서 실망하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첫번째 교황이었던 베드로 사도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성목요일 밤 예수님께서 곧 붙잡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사도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성전 경비병들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을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저 가야파의 관저로 끌려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대사저의 관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의 두 여종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세 차례나 물었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심지어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 때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나옵니다.(마태 26, 31-35;69-75 참조)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하늘로부터 환시를 받아 쓰여진 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대사저의 관저를 나오다가 그 안에서 그는 사도 요한이 모시고 온 성모님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 그를 안타까우면서도 여전히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성모님의 그 눈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속 참회하고 회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그의 배반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요한 21, 15-17 참조)
베드로처럼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한 사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유다 이스카리웃 입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와 함께 게세마니 동산으로 와서 예수님의 체포를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뉘우치고는 은전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에게 돌려 주고 나가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마태26, 14-16, 47-50; 27, 3-5 참조)
베드로와 유다가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잠시 뉘우치기는 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막아 버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히 죄를 피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다는 외적인 표징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한 달에 여러 번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주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우리는 계속 회개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대신하는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받을 때 우리에게 엄청난 하느님의 자비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입는 자루옷을 속죄할 때에도 입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재나 흙을 얹고 자루옷을 입고 단식하며 속죄했습니다.(느헤 9, 1 참조) 그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데 그 옷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의 자루옷과 같은 그 어떤 외형적인 옷이 아니라 속죄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우리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고 그 죄를 기워 갚기 위해 기도, 단식, 그외 자선 활동 등을 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속죄의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를 오르시고 거기에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속죄의 옷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옷을 입을 차례입니다. 우리 죄와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십자가 속죄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저는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이기 때문에 긴꼬깔 모자가 달려 있는 갈색 수도복을 입습니다. 이 수도복은 제가 누구인지를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징입니다. 저는 수도복을 입음으로써 제 자신이 수도자임을 더욱 자각하게 됩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동네에서 마트에 갈 때도, 다른 볼 일들을 볼 때도 수도복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우리 신자인 필리핀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 이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남자이기에 늘 눈에 띄지만 제 수도복 착용 때문에 더욱 도드라집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도복 착용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 증거라고 생각되기에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게다가 제가 처음 수도복 착복을 할 때 ‘프란치스칸 수도복은 십자가의 형상이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수도복을 입고 다니려고 노력합니다. 어찌보면 수도복은 제게 속죄의 옷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 6)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원죄를 짓게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우리의 첫 선조를 유혹한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다른 피조물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그들을 유혹했고, 그들은 그 거짓말을 참으로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고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거짓말장이인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 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던 그분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사탄의 거짓말 유혹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마태 4, 1-11 참조)
예수님까지도 유혹했던 그 사탄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영혼들을 파괴하기 위해 그의 졸개 마귀들과 함께 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모님 메시지처럼 그는 우리를 포함한 온 인류를 유혹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의 거짓말은 무척 달콤하고 근사하고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는 우리의 행복이나 생명, 구원과 평화에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그는 우리를 거짓말로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사탄의 거짓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눈 앞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선악과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생명 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우리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쳐다보고 살아났던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민수 21, 9 참조)
사탄은 심지어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더 많이 가지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온갖 것을 소유하고 갖은 욕망에 우리 자신을 맡기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고 물질과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며 그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택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죄를 속죄하고 원죄로 닫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모님 말씀처럼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갈바리아를 향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예수님 잉태를 예고하기 위해 성모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최초 만민의 어머니 하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을 듣고 죄를 지어 인류에게 죽음을 불러 들였지지만 새로운 만민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낮추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심으로써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그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 명령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라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그런 자세 자체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 모범을 따르면서 그분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마음을 바꾸어 주는 빛의 부름에 닫혀 있기 때문에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지도록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마음을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평화의 왕을 모셔 들이기 위해 너희 자신을 열도록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마음을 바꾸어 주는 빛의 부름에 닫혀 있기 때문에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지도록 기도하여라.
예수님의 성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분 없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아기,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그분께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진지하게 묻지도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모님께서는 이 성탄절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거울이 자신을 위해서 어떤 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바라다보는 그 어떤 사람을 위해 반사를 하듯이 우리를 바라다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의 반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고 그것들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요셉의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조차 요셉이 데리고 온 그의 아내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요한 복음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 9-11)
성경은 베들레헴의 사람들과 달리 하늘로부터 온 빛에 마음을 연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2 킬로 미터 떨어져 있는, 현재 “목자들의 들판”이라 불리우는 광야에 살면서 양 떼를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마을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 묵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어느 동굴로 인도했습니다. 그 동굴은 가축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받으신 도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외에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의 모습을 직접 뵙고 그분을 알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구세주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주님의 천사가 그 목자들에게 다가가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천사는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리고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목자들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하늘의 평화, 예수님이 선물로 가장 먼저 주어졌던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떠난 뒤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들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알려 주신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들은 대로 믿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빛의 부름에 완전히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내했던 그 동굴로 가서 세상의 빛으로 탄생하신 구원자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습니다.(루카 1, 8-20 참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세 명의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하늘에 떴을 때 그 별을 보고 길을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동굴에 도착하여 크게 기뻐하고 귀한 선물들을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 탄생에 대한 구약 성경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구세주가 탄생할 때 그분의 별이 하늘에 뜬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밤이면 하늘을 쳐다보며 그 별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구세주의 별이 떴지만 그들의 마음은 구세주의 오심에 완전히 열려져 있었고 그분을 통한 구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는 이미 구원의 별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은 마음이 착하고 하늘이 알려 준 소식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늘은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그 마음이 더욱 활짝 열리고 구원자 아기 예수님을 직접 뵙는 은총을 특별히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들은 그곳에서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뵙고 그분의 영접을 받는 큰 영광도 체험했습니다. 빛의 부름을 받고 찾아와 자신들의 마음을 활짝 열고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경배를 드리는 그들을 바라다보셨던 성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하셨을지, 또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워 하셨을지 저절로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나 지금이나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과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이 자신들 위에 와서 비추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 빛의 부름에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하느님이시요 참인간이신 예수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곧 지나가고말 세상의 화려한 빛들에 마음을 두고 그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태워 죽이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들처럼 말입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죽음과 멸망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는 빛의 부름과 평화에 마음이 열리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처럼 되어야 하지만 그를 넘어서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마음을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평화의 왕을 모셔 들이기 위해 너희 자신을 열도록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은 늘 함께 있고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바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열도록 기도해 주고 계시는 성모님의 그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의 마음을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 활짝 열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에게 기도를 가르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고 계신다. 기도는 마음들을 열고 희망을 주며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킨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사랑으로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너희의 희망이시니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죽음이 아니라 회개와 생명을 선택하도록 너희를 인도해 주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에게 기도를 가르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고 계신다. 기도는 마음들을 열고 희망을 주며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킨다.
지난 11월 21일은 성모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성모자헌축일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세 살 어린 나이로 성전에 봉헌되셨는데 그곳에서 11년간을 사시며 사제들의 제의를 비롯한 성전 제사에 사용된 빨래들을 빠는 봉사를 했고, 여선생님들의 지도하에 다른 어린 동정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어린 동정녀들을 뽑아 성전에서 살게 한 것은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전통에 따라 세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 성전 봉사 동정녀로 선발되었습니다. 그 선발 과정에서 어린 마리아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려온 사제들로부터 엄격한 시험을 치르셔야 했는데 놀라운 지혜로 그들을 감탄케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린 마리아께서는 사제들이 물어보기도 전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성전 동정녀들이 한 밤중에 일어나 한 번 기도해야 하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나서 밤에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 대답에 사제들은 감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조상님들은 구세주 메시아의 오심을 열망하던 에세네라 불리우는 경건한 사람들 공동체에 속한 분들이었고, 그 부모님 요아킴과 안나 성녀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부모님은 성모님의 잉태 순간부터 그분이 구세주를 잉태하실 동정녀라는 계시를 받았고, 그들의 딸 어린 마리아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열망하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으며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리아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기도를 배우셨던 마리아,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님들 그리고 다른 동정녀들과 함께 끊임없기 기도를 바치며 기도 속에서 사셨던 마리아께서는 나자렛 집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잉태하시리라는 예고를 들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요셉 성인과 함께 나자렛 성가정 생활을 하시면서 그분들과 함께 기도하셨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는 거룩한 여인들과 함께 기도하시면서 예수님과 제자들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 중심에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9년 동안 에페소가 내려다보이는 셀죽 산 위에 지어진 집에 사시면서 당신을 돕던 동정녀와 함께 기도에 전념하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셨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진정한 기도의 여인이셨습니다. 성모님은 기도를 통해 언제나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에 들어가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셨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찾으셨습니다. 하느님만이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셨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오직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만 모든 사랑을 드렸고 성부의 딸, 성자의 어머니 그리고 성령의 정배가 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느님, 지극히 높으신 그 하느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가장 기도에 전념하셨던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기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까?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인류는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기도를 게을리하고 있는지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시고 이를 안타까워 하시기에 이를 도와주기 위해 성모님을 보내 기도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최소한의 의무적인 기도를 바치고, 그것마저도 마음을 다해서가 아니라 입으로만 드리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왜 기도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기도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까지의 메시지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서,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기도의 효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기도는 마음들을 열어 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수많은 여러 마음들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이웃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마음의 문도 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진 하느님의 그 마음에서 사랑과 은총과 자비가 우리에게 쏟아져 내립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의 힘으로 그 사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재와 전구의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두번째로 기도는 희망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께 우리의 희망을 두게 됩니다. 사랑, 평화, 용서, 기쁨 등 기도의 열매가 수없이 많지만 희망 역시 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기도는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여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기도하게 만들고 우리의 믿음을 점점 자라나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 믿음을 더욱더 굳건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관한 책을 수많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사랑으로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너희의 희망이시니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성모님은 그냥 우리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대해 가지고 계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모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떠한 지 2009년 3월 18일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천상적 사랑, 즉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중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께 둘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우리 곁에 계시고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힘을 내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발걸음을 돌려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죽음이 아니라 회개와 생명을 선택하도록 너희를 인도해 주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들을 해왔는지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지나간 날들의 선택들이 아주 잘못되고 죄스러웠다면 그 회한이 무척 클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희망이시기에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좋은 선택들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바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 이 지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과 생명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더 큰 집과 더 좋은 자동차 그리고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분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 없이 살아간다면 진정한 미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모시고 산다면, 그분을 선택한다면 우리에게 참된 미래가 있습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물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그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두고 살아 갑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에게 거룩함을 장려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고 너희 각자를 위해 그분께 감사드리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는 방해받고 있고, 사탄은 평화가 없는 것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열과 전쟁의 더러운 영이 잠잠해지도록 너희의 기도가 훨씬 더 강력해져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서 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너희 안에 또 너희 주변에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 부활하신 분의 기쁨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에게 거룩함을 장려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바라보고 있고 너희 각자를 위해 그분께 감사드리고 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 38) 이 말은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였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께 위와 같이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 뜻에 대한 순종은 성모님 일생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11개월 동안 성모님께서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고 우 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장려 하시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먼저 모범으로 삼고 실천을 통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덕행입니다. 우리의 뜻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만이 중요합니다. 성모님이 그러셨고, 지금도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것에서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 그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주님의 기도’를 통해“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끊임 없이 바치면서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찾고 그를 따르 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우리의 뜻이 땅에서 와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기를”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금 우리 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모든 것에 앞서 그를 받들고 그를 따 라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제자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청 으로 그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보내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지금 우리 의 어머니 성모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보내 주고 계십니다. 우리 보호자이신 성모님 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사랑 그윽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어느 것도 감히 당신 자녀들에게 손을 대거나 해치지 못하도록 성모님은 우리에게서 그 눈을 절대로 떼지 않으십니다. 어머니의 보호와 염려 그리고 사랑이 가득 담긴 그 눈길이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매우 귀하게 여기시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겨 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평화는 방해받고 있고, 사탄은 평화가 없는 것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열과 전쟁의 더러운 영이 잠잠해지도록 너희의 기도가 훨씬 더 강력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쟁과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무차별 총기 난사와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평화가 위협받고 사람들 마음속에 공포의 씨앗이 마구 뿌려지고 있습니 다. 지금의 세상은 옛날과 달리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매우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부정적인 영향은 그 이전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합니다. 비록 우리 집안은 평화로와도 이웃에서 욕설과 고성이 들리고 텔레비 전을 비롯한 각종 대중 매체와 스마트폰을 통해 끊임없이 나쁜 사건 사고 소식들이 전해져 우리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파괴의 배후에는 모든 분열과 전쟁의 더러운 영인 사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어린 자녀들 아, 평화는 방해받고 있고, 사탄은 평화가 없는 것을 원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를 분명하게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는 평화가 있지만 사탄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고 대신 분 열과 전쟁 그리고 미움이 있을 따름입니다. 모든 분열과 전쟁의 더러운 영을 잠잠하 게 만들고 사탄에 대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 힘에 대한 의탁뿐입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기도는 아직 그 힘이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가 기도가 훨씬 더 강력해져야 하는 것이다.”평형저울의 한 축이 기울면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서 기우는 편에 더 많은 추를 올려 놓아야 하듯이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기도를 열렬하게 바쳐야 합니다. 영적인 공격에는 영적인 방어로 맞서 야 하고, 더욱더 강한 영적 무기로 더러운 영과 사탄을 공격하여 격퇴시켜야 합니다. 오직 기도, 기도, 기도 그리고 단식만이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서 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너희 안에 또 너희 주변에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 부활하신 분의 기쁨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우리 안에 평화를 넣어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 는 길은 바로 기도, 회개, 믿음 그리고 단식입니다. 우리가 그 길들을 온전하게 걸 어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우리 주변에 평화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를 건설하는 방식은 억지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인간적인 노력을 하는 방식보다는 우리 안에 내재된 평화가 자연스 럽게 발산되고 우리 주변에 전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또한 부활 하신 분의 기쁨을 전하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그 기쁨을 먼저 체험하 고,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 주변 사람들은 우리 기쁨의 원천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 한방울은 대단히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물 한방울 한방울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결국 바다를 만들어냅니다. 그렇듯이 평화를 건설하고 부 활하신 분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 각자의 노력이 대단히 미약해 보일지라도 그 하나 하나가 다 모이다보면 결국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 안에 평화와 선의 바다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모든 사람 안에서 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너희 안에 또 너희 주변에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 부활하신 분의 기쁨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