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를 위한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탄은 수년 동안 전쟁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인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신 것이다. 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이 땅에서 너희에게 선이 될 것이고,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구하여 새로운 생명에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게 된 이 위기에서 빠져 나오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를 위한 너희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탄은 수년 동안 전쟁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인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신 것이다.
발현목격증인들을 빼고 우리들은 성모님을 뵈올 수 없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그리고 그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습니 다. 그냥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마태 14, 14 참조)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를 위한 너희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한달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수 많은 사상자들이 생기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4분의 1에 달하는 천만명 가량의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이웃 나라들로 고통스러운 피난길을 떠나야 했으며, 집과 도시가 파괴되고 물과 식량이 없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반전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체포되며 일반 국민들의 삶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전쟁 종식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화학 무기와 핵 무기 사용이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은 정말 심각하고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울부짖고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전 세계 주교님들과 더불어 온 인류, 특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에 봉헌하시며 기도하셨고, 전 교회가 함께 그 봉헌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우리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 24)는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사탄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 때문에 울부짖으며 평화를 청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당신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울부짖음과 기도를 하느님 앞에 봉헌하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인류가 기로에 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직접적이고 심각한 표현을 하신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성모님께서는 지금 현재 인류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그 상태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분명하 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인류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경고와 주의를 주시는 것입니 다.
생명과 죽음, 구원과 멸망을 앞에 두고 기로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선택할 자유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은 이러한 우리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우리가 죽음과 멸망의 길을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신 것이다.” 인류가 생명과 구원을 얻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삶,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인 거룩함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 인류가 그 길로 가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성모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그 길이 있음을 일깨워 주시고 우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의 자녀들인 모든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접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사랑이실 수 없고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천상 아버지께서 그분 사랑의 사절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고 계시는데 대하여 감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예언자로 우리 인류를 찾아오시어 우리가 대단히 큰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해서 생명과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어머니다운 사랑과 염려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이 땅에서 너희에게 선이 될 것이고,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구하여 새로운 생명에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게 된 이 위기에서 빠져 나오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금은 우리가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되돌아온 작은 아들처럼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그것들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전에 작은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만 미리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게 되자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흥청망청 돈을 쓰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남은 것은 죄와 굶주림뿐이었습니다. 그가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라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가장 곤궁한 처지가 되었을 때 그는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작은 아들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고, 잃어버렸던 존엄성과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자비와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에로 돌아가면 우리도 똑같은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류와 우리 자신이 겪는 위기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반대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에서 생명과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느님은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그에 귀를 막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기의 생각과 목소리를 따라갑니다. 그럴 때마다 사탄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 우리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라고 우리를 부추킵니다.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거기에서 그들에게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우리에게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린이처럼 단순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 3)
성모님은 하느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니셨던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모송을 바치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하고 성모님을 부르면 성모님은 ‘하느님’하고 메아리로 답하십니다. 성모님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시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만이 그분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게 되면 성모님은 당신이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위기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에 따르면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 위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세세대대로 복되신 분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 성모님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말씀대로, 메시지대로 살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그 때문에 설령 어떤 위기를 겪게 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망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더 가까이 하시고 우리가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자비의 때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기도와 사랑 그리고 천국의 표상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시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너희의 마음이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서 너희가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기 위해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고, 너희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자비의 때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기도와 사랑 그리고 천국의 표상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시는 이 세상에서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너희의 마음이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기를 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을 ‘자비의 때’로 규정하십니다. ‘이 자비의 때’라는 표현에서 큰 기쁨과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치 언젠가 이 때가 지나가고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를 찾을 수 없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때가 진정 하느님 자비의 때임을 느끼고 있다면 그 자비가 주어진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비의 때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더욱 굳은 믿음을 키우라고 촉구합니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기도를 바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라고 촉구합니다.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시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 이 때는 분명 자비의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지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이 지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그 시간은 다가올 것이고, 그 때까지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의 한정된 시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기도와 사랑과 천국의 표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기도와 사랑 그 자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이 지상에 있지만 천국을 그리워하고 그곳에서 사는 것처럼 언제나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평화를 이루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마음은 기쁨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서 너희가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기 위해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고, 너희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구원과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 그리고 천국의 표상이 되고,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가운데 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계속해서 그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일 후면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희망의 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보내 주셨음을 기억하고,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느님 안에서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대림절에는 우리에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더욱 큰 희망을 둡니다.
성모님은 대림절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지만 구세주의 오심을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택하셔서 그분을 통하여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같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금은 성모님을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보내시면서 우리가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구세주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두고 그 안에서 희망을 가지도록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그 천사 곁에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왜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노래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평화 그 자체이시고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그분의 평화는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온전히 모시고 있으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고정시키고 예수님께만 우리의 모든 희망을 두고 살아가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에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한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느끼고 그의 형제인 사람의 선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한다. 그러니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보통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불안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도 모으고 각종 보험도 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선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손에 놓여 있고 그분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자신의 힘이나 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뜻에 따라 만들어지고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마음을 열기 때문에 생명에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에게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즉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단순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시는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분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한껏 자유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저 나와 다른 사람 혹은 이방인이 아니라 나의 형제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형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가족에게 하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사제, 수도자, 신자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어떤 범주의 사람들만 꼭집어서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자녀들인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은 사랑이고 자유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너희를 얽어매고 너희를 이용하기를 원할 때,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일반적으로 앞에 나오는 ‘그의 형제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명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뜻하는 복수적인 의미의 사람 말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형제로 여기고 그를 존중하고 섬기고 도우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거나 혹은 착취와 억압 그리고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귀한 인간이기는 커녕 그저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되는 비인격적 대상, 더 심하게 말하면 그저 하나의 물건처럼 인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함부로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사기를 치고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하느님을 모르고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여 지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입니다.(마태 23, 1-33 참조)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자유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그런 사람들은 사랑과 자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모릅니다. 대신 그와 정 반대로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사람들을 얽어매고 이용하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이것은 선을 가장하거나 영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 중에 그를 잘 식별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유이시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식별의 기준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없는 관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기 때문에, 너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 주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의 주인공은 성모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의지나 계획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명을 받고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라고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바라시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조력자로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거룩함 속에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조력자로 성모님을 보내 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성모님께 우리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즉 그분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그분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성모님께 청하고, 그를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는 거룩함 속에서 성장하게 되며 매일매일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계속해서 나를 보내고 계시니 기도하고 증거하며 나와 함께 기뻐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고 영원은 너희 존재와 모든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천국이 너희의 목표가 되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계속해서 나를 보내고 계시니 기도하고 증거하며 나와 함께 기뻐하여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 1-2) 이 말씀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저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거룩하니 당신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거룩함의 길을 가는 것은 하느님을 닮고, 그분처럼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의 길을 계속해서 가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물 위로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바라보고 두려움을 느껴 물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 가면서 다양하고 수많은 거센 인생의 바람들을 대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바다에서 거센 바람들을 맞으며 살아 가는 우리를 오직 당신께로만, 또 당신의 거룩하심만을 따라 살도록 인도해 주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특사로 우리에게 파견되고 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거룩하게 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거센 인생의 바람들 속에서도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께 속해 있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하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시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늘 기쁨 속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고 영원은 너희 존재와 모든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라.
어렸을 적에는 언제 어른이 되나 하면서 시간이 아주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어른이 되어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면서 시간이 무척 빨리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긴 것같지만 성모님 말씀대로 짧습니다. 우리 인생의 짧음에 대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 10) 성모님께서는 “눈깜빡할 사이”라는 표현도 쓰신 적도 있을 정도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짧지만 우리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 내세에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원한 삶 혹은 영원입니다. 영원한 삶이기에 그때에는 굳이 나이를 셀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시간의 제한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를 앞서 가신 모든 성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함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성모님은 이 사실을 의식하라고, 이를 유념하라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이를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성모님이 말씀하시는 그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준비없이 어떻게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 지상에서의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을 늘 영원에 두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는 삶을 여기에서부터 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와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영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든 성인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천국이 너희의 목표가 되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아주 오래 전 부제품 준비 한 달 피정을 할 때 어느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우리 마음은 걱정의 공장이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참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이런 저런 걱정거리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하느라 우리의 마음은 늘 부산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모님은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걱정거리들은 이 지상의 것들과 관련이 있고,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기 위해 대부분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성모님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대신 천국을 그리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 지상의 것들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자문해 보면 답은 ‘살 수 있다.’ 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지상의 것들을 걱정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다 되었고, 또 되어 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믿는 우리가 이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대신 더 기도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천국으로 들어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 27)
우리가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지상의 것들에 매이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그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지상의 것들을 걱정하게 될 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지상의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성모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짧기만 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의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최종적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칠십 년, 팔십 년이 아니라 그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아니 햇수 자체가 없는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는 천국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이 지상에서의 모든 것이 그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방향지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돈, 아이디어, 마음, 그외 모든 것 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선하게 쓰여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야말로 참된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기쁨과 평화가 되라고, 내 부름에 응답한 어린 자녀들인 너희 모두를 기쁘게 부르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천국을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가 내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도록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기쁨과 평화가 되라고, 내 부름에 응답한 어린 자녀들인 너희 모두를 기쁘게 부르고 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성실, 온유 그리고 절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갈라 5, 22-23) 즉 이 덕목들은 우리의 힘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은사, 곧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 살아갑시다.”(갈라 5, 25) 라고 권고하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기쁨과 평화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의 위 권고 말씀과 연관지어서 본다면 기쁨과 평화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령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신, 우리의 힘이 이나라 하느님의 힘, 우리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성령께서 임하시어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우리 자신이 기쁨과 평화 그 자체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당신의 메시지 모읍집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에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를 통해 직접 가르쳐 주시고 늘 바치도록 권고하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성령 강림 청원기도로 바치면 좋을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정배 마리아의 힘있는 전구를 들으시어 오소서!”
내가 너희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천국을 너희의 삶으로 증거하여라.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참사람이요 참사람이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이 존재하신다고, 예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그 자리에 바로 천국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현존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모님께서는 기도와 단식, 믿음과 회개를 통해 어떻게 이 천국의 시민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부터 이 천국의 삶을 살게 될 수 있는지 당신의 발현과 메시지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발을 땅에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이고 사는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삶은 천국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들을 낮추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어 그들도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맛보고 천국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를 강력히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천국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그 증거가 가능합니다. 셋째로,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천국을 우리 삶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영적인 삶, 끊임없이 마음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천국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가 내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도록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의 삶을 사실 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마음속에는 오직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을 뿐 그들을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그런 당신의 어머니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세워 주셨습니다.(요한 19, 26 참조)
바로 이 성모님께서 지금 우리를 찾아 오시며 매번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하시며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인종, 종교, 언어, 성, 나이, 문화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이 세상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만이 온 세상 인류를 향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나의 어린 자녀들아!” 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을 위해, 너희가 내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 그들은 우리의 미움, 단죄나 배척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야 하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두 팔을 벌려 포용해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미움이 그 마음을 정복한 모든 이들에게 성모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함께 해 주시고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평화를 얻도록 당신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전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전구를 받아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말고 늘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너희 삶으로 증거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교만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관대해야 하고 내 사랑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티 없는 내 성심에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고,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열리도록 만들어 주는 도구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할 수 없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으며,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해야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기도는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이고, 생사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살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성모님은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데 있어 지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깊이 염려하시면서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염려와 초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고 있는지, 기도를 자신들 삶의 맨 첫자리에 놓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더욱더 기도에 전념하고, 이번 달 성모님 말씀처럼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정도가 아니라 기도 그 자체가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 사랑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되고 우리에게 큰 은총을 가져다줄 것이며 우리를 더욱더 거룩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너희 삶으로 증거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교만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고,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과 우리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 즉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이 어머니이신 가정에 속해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이처럼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기쁨에 넘쳐 춤을 춰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처럼 사랑, 겸손, 믿음, 기도 그리고 희생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외적인 표지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성모님의 손을 잡듯이 묵주를 우리 손에 들고 그분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가 하지 않는가, 혹은 누가 그분의 사람임을 기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려면 그가 묵주기도를 마음을 다해 열심히 바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모님을 성령의 정배로 삼으시고 당신의 아들 성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기쁨으로 알고 그 사실을 삶으로 증거한다면 성부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바치는 기도를 매우 기쁘게 들으시고, 그 지향들을 선으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셨고, 자기를 온전히 내놓으셨습니다. 성모님께는 교만과 이기심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과 이타심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성모님께 속한 사람들, 그분의 자녀들 역시 성모님처럼 겸손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관대해야 하고 내 사랑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티 없는 내 성심에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관대한 사람은 자선을 잘 베풀고 용서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연민할 줄 알고 자신의 것을 사랑으로 나누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줍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당신 사랑의 사랑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부터 이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마태 5, 45 참조)을 온전히 닮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성모님은 우리에게 그 길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되면 그 결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즉 이방인들이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에로 마음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백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의 실천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모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따라 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