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신앙 안에서 더욱 강해지도록, 나는 이때에 기도, 단식 그리고 포기에로 너희를 부르고 있다.
지나간 메시지들에서 성모님은 ‘포기’라는 단어를 스무 번 정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기도, 단식 혹은 회개와 함께 사용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이때에 기도, 단식 그리고 포기에로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포기는 선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성모님이 요청하시는 대로 기도를 우리 삶의 첫자리에 놓고자 한다면 현재 우리 삶의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기도를 첫자리에 놓고자 한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유투브 혹은 텔레비젼을 보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에 쓰던 시간의 양은 당연히 그에 비례해서 줄여야 더 많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기도가 아닌 다른 것을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일 성모님이 요청하시는 대로 수요일과 금요일에 물과 빵으로만 단식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그 날들에 우리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려면 죄를 포기하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애착과 욕심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보다 영적이고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를 방해하는 것들을 포기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깨어나고 생명을 주는 때이다. 어린 자녀들아, 그 자신을 주는 자연처럼, 너희 또한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라.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간들을 살고 있습니다. 작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여러 종류의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시작되거나 바로 예정되어 있고, 치료제 개발도 머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정치 그리고 경제 등 삶의 모든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부정적인 때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지금은 깨어나고 생명을 주는 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무엇에서 깨어나고 어떤 것을 깨닫기를 바라십니까?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영적 교만에서 깨어나고,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각성하며 참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없이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생명을 주는 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 특별히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도 염려하고 그들에게 사랑과 자선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자연은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고,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하지 않고 모두 인간을 위해 내어 놓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습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기이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하느님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헤아려보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받게 될 모든 것에 대해 미리 감사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기쁘게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29-30)
지상에서 너희를 위해 선이 될 수 있도록 평화와 사랑을 기쁘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라. 천국을 그리워하여라. 그리고 천국에는 슬픔도 미움도 없다. 어린 자녀들아,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회개하기로 결심하고, 거룩함이 너희 삶 안에서 다스림을 시작하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이 지상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삶은 유한하고 그 끝이 있습니다. 아무도 여기에서 예외적일 수 없습니다. 한 번뿐인 이 지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 사람마다 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지상에서의 우리 삶의 목표와 목적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이 지상의 삶이 우리에게 선이 되려면 평화와 사랑을 기쁘게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와 사랑을 기쁘게 전하는 삶, 바로 이것이 우리 지상 삶의 목표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마음 안에 평화와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전파는 모범을 보이는 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와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와 사랑을 우리 안에 지니고 그것들을 기쁘게 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하고 그분께서 늘 우리 삶의 첫자리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현존과 능력을 굳게 믿고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을 주시도록 간절하게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것도 아닌 그분의 평화와 사랑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절대로 마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지상을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평화와 사랑을 기쁘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 그것이 이 지상에서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필요하고 그것 외에 더 이상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재산, 높은 학식, 큰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사랑이 없으며 그것들을 체험하며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유한한 이 지상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성모님 메시지대로 실천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지상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살게 되는 내세는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내세에는 세 가지 장소와 상태가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입니다. 지옥은 영원한 벌을 받는 장소이고, 연옥은 정화와 단련을 통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장소이고, 천국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오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천국을 그리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슬픔과 미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기쁨과 사랑만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수많은 성인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천국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 있는 실재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앞으로 이 천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 그 천국을 마음 깊이 그리워해야 하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천국이 존재하고, 그곳에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성모님께 감사하면서 그분께서 일러 주시는 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천국에 가기 위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죄와 악을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삶의 첫자리에 모시며 그분의 말씀과 뜻대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가 가능하려면 거룩함이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미사에 참례하지 않고, 단식하지 않으며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해질 수 없고 회개도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회개했기 때문에 올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제 회개했기 때문에 오늘은 회개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매일매일, 아주 매 순간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죽는 순간까지 멈추어서는 안 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2021년 한 해가 시작되는 1월 25일 메시지에서 다시금 “회개하기로 결심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 보시기에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는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너희 삶 안에서 다스림을 시작하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거룩함이 우리 삶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니 그렇게 하도록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그 길을 시작한 사람들과 그 길로 가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며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아기 예수님, 너희 존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이신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미래 속에 있는 너희의 믿음과 희망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분의 평화로 너희를 축복해 주시도록 내가 예수님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아기 예수님, 너희 존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이신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서 한 천사가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 때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0-14 참조)
성모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아기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찬미의 노래 소리는 성모님의 입을 통해 다시금 이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태어나셨고,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잘 헤아리고 계셨으며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그러나 선물로 주어지는 이 예수님의 신적이고 천상적인 평화를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고자 하시지만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그 평화를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을 찬양했던 베들레헴의 그 목자들같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루카 2, 15-20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 찬가를 쓰고 있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 15-20)
위 찬가에서 나오듯이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그분의 힘으로 존속하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마침내는 그분 안에서 그 생명의 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 존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고 말씀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존재의 근거이십니다. 그분 없이 우리의 존재는 생겨나지 않았고, 그분 없이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분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오직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을 때에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살게 하시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때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미래 속에 있는 너희의 믿음과 희망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분의 평화로 너희를 축복해 주시도록 내가 예수님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에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요셉을 통해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그에 딸린 가족 모두를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아무도 그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형들의 시기를 받아 죽을 뻔하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가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의 집 관리인이 됩니다. 그러나 안주인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무고하게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곳에서 그는 이집트 왕에게 포도주잔을 올리는 시종의 꿈을 해몽에 주었고 그 시종은 해몽대로 석방되어 복권이 되었습니다. 다시 파라오를 섬기게 되면 무고하게 불운한 처지에 빠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했지만 그 시종은 요셉의 청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 후 2년이 흐른 어느날 파라오는 두 개의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현자들이 불려왔지만 아무도 그 꿈들을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파라오에게 포도주잔을 올리는 시종은 요셉의 청을 기억해내고 파라오의 꿈들을 해몽해 줄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셉은 파라오에게 불려 나와 7년 동안 풍년이 들고 그 후 다시 7년 동안 기근이 들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도록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보여 주셨으니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뽑아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그 자리에서 요셉이야말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라고 말하고 그를 파라오 다음 자리에 가는 이집트의 재상으로 세웁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7년 동안 풍년이 있었고, 요셉은 앞으로 다가올 기근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7년 후 기근이 찾아왔을 때 이집트에는 그를 견디어 낼만한 곡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다른 아들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에는 곡식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어 곡식을 사오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요셉과 조우를 하게 되고 마침내 요셉은 자신이 바로 그들이 팔아 넘긴 아우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그러자 형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그들에게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기근이 든 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거두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아버지께 올라가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전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저를 온 이집트의 주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저에게 내려오십시오. 아버지께서 고센 지방에 자리 잡게 되시면, 아버지께서는 아들들과 손자들, 그리고 양 떼와 소 떼 등 모든 재산과 더불어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기근이 아직도 다섯 해나 계속될 터이니, 제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부양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집안, 그리고 아버지께 딸린 것들이 궁핍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요셉의 아버지와 다른 모든 형제들과 가족들은 요셉의 말대로 이집트로 완전히 이주하여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살게 되었고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은 요셉의 품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형들은 혹시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 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다정하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아 버림받고 죽을 뻔하다가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가고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요셉은 결코 희망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시련을 겪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고, 요셉은 많은 기도와 묵상 속에서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요셉이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근거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열악하고, 심지어 최악으로 보이는 상황에 놓여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 요셉은 바로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형들에게 했던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요셉은 자신의 시련과 불행뿐만 아니라 심지어 형들의 죄과 악까지도 모든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선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결코 단 한 순간도 희망의 촛불을 끄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한 전쟁 포로가 자신이 갇혀 있던 독일 퀼른 지방의 한 건물 지하실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고 합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햇빛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엄연히 계심을 믿는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가운데서도 그분의 현존과 사랑을 믿고 그 믿음 위에서 꺼질 줄 모르는 희망을 지녔던 이름모를 위대한 한 인간의 강렬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우리는 임마누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분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드리며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제 존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이십니다. 오직 당신만이 저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마련해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굳게 믿고 오직 당신께만 저의 모든 희망을 둡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사랑, 따뜻함, 기도와 기쁨의 때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기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 안에서 태어나시도록 기도하여라. 너희 각자에게 그분 자신을 주시는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이제 한 달이 지나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몸 안에 잉태되어 그 안에서 아홉 달을 지내신 후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사랑, 따뜻함, 기도와 기쁨의 때이다.”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대하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혹시 성모님께서 태중에 아드님을 모시고 있었을 때의 당신의 그 느낌과 상황이 아닐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당신의 몸 안에 모시고 있었을 때 성모님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과 따뜻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태중의 아들 예수님과 대화하며 매일같이 기쁨으로 가득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태어나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우리 마음은 하늘을 향해 열리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무질서하게 자리잡고 있는 쓸데없는 많은 것들을 깨끗이 청소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깨끗해진 우리 마음의 빈 방이 마련될 때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 요청대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께 기도로 우리 마음을 열어 드립시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20)
하느님께서 이 때에 기쁨과 희망이 되도록 나를 보내셨고, 나는 너희에게 말하고 있다. 아기 예수님이 없다면 새로 태어나신 분 안에 감추어진 천국의 다정함이나 느낌이 너희에게 없다.
2천년 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시기 전에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와 똑같이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모님을 이 세상에 먼저 보내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이어 예수님의 재림이 이어질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 때와는 달리 두 번째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성모님 온 인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당신의 메시지를 통해 직접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크고 화려한 것들 속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호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사건입니다. 이 육화 사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 5-7) 이러한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오실 때 당신 인구 400명 밖에 되지 않는 유다의 아주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 마굿간에서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던 베들레헴 들판의 목동들 그리고 별의 인도로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왔던 동방박사들은 지극히 비천한 장소에서 태어나신 작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뵙고 기뻐했습니다. 비록 장소가 비천하고 모습이 아주 작지만 그분은 하느님이셨고,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가 천국이었기에 그들은 그 천국이 발산하는 다정함과 느낌을 바로 알아 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하셨던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천국의 다정함과 느낌을 발견하고 체험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향상시켜라. 성경을 읽음으로써 너희는 그 초창기에 메주고리예가 인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예수님의 탄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오늘도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반복되고 있는 진리가 될 것이다.
요즘 우리는 일상의 여러 곳에서 ‘업그레이드’라는 단어를 수시로 접하고 있습니다. 전화기도 컴퓨터도 심지어 카톡을 비롯한 각종 앱들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능을 더 향상시켜 더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얻기 위해 필요한 업그레이드, 성모님은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향상시켜라.” 이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업그레이드하여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우리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더욱 진보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기울이고 있는 영적 활동의 정도와 양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루에 묵주기도 5단 바치던 사람은 10단, 아니 20단, 아니 그 이상으로 그 양을 늘려야 하고, 주일 미사에만 참례하던 사람은 매일 미사를 다니기 시작해야 하고, 성경을 읽지 않던 사람은 매일 성경 읽기를 시작해야 하며 성체조배를 하지 않던 사람은 성당 감실 앞에 앉아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적 활동을 업그레이드하고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더욱 기울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누군가가 대신해서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굳은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몸으로 스스로 행할 때 이루어지고 그 결과는 반드시 좋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1981년 6월24일 성모님께서 메주고리예에 처음 발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초창기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 매일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흠숭하며, 고해성사를 보고 단식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어찌보면 너무도 평범한 것들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늘 교회 안에 있어 왔던 이 평범한 것들을 마음을 다해 정성껏 바치기 시작하면서 메주고리예 본당 신자들과 순례자들은 변화되었습 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님께서 자신들 안에 다시 태어나시는 것을 체험하며 기쁨에 넘쳤습니다. 메주고리예는 마치 새로운 베들레헴처럼 되었습니다. 2천년전 성모님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것처럼 성모님 발현과 메시지를 통해 메주고리예에서 사람들 마음 안에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 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천상적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성모님을 당신의 예언자로 보내시어 온 인류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 하셨습니다. 그 간절한 호소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말씀과 성체와 기도 안에 현존하시면서 자신들에게 새롭게 태어나시어 함께 머무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신들이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메주고리예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 처음부터 끝까 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지금 까지 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진행되고 있어도 인간은 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반역하고 죄를 짓고 하느님 없는 문명을 건설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다시 파멸로 치닫는 그 길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는 획기적인 진보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해보고 우리 주변을 자세히 둘러봐도 타락한 인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일어나 회개하고 당신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인간 홀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을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 이처럼 오랫 동안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평화를 증진시키고 건설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과 화해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너희 주변에서 기적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고해성사는 화해의 성사라고도 불립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것이 고해성사의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화해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즉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깨어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우리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복원하면서 화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화해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또 다른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평화를 증진시키고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우리의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혹시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고, 그 회개의 구체적인 표시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분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잠시 떠났다하더라도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루카 복음 15장은 돌아 온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의 자애를 깨닫고 그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처럼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는 우리의 평화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면 우리는 우리 주변 이웃과 화해하고 평화로이 지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받아 들이지 못하고 미워하던 사람도 아무런 조건없이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도 그 여파로 자기 주변 사람들과 화해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런 기적적인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과의 화해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에 나는,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모든 성인들이 너희에게 모범과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도움을 청하여라. 사탄은 강하고 마음들을 한층 더 그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는 전쟁과 증오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를 구원의 길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의 힘과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에 나는,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모든 성인들이 너희에게 모범과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도움을 청하여라.
성모님께서는 왜 지금 이 때 우리에게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기도를 잊고 있은 채 살고 있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파에 시달리다보면 쉽게 하느님과 기도를 잊어버리거나 그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우리들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다시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 자신과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인 기도인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를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성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사랑이었고, 그들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도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본받아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머물기 위해 매일의 삶을 기도로 가득 채웠습니다. 하느님과 기도가 그들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성인들이 우리에게 모범과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도움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한 주간을 조금 지나면 11월 1일 우리는 모든 성인의 대축일을 지내게 됩니다. 그날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모범을 되새기고 그들의 도움과 전구를 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성인들은 일년에 한번만 기억되는 분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우리는 하느님 안에 모두 함께 살아 있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일년 365일 내내 매일같이 모든 성인들과 통교하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좋은 친구들이고 영적 동반자들이며 천국에서 주님의 얼굴을 뵌 상태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전구자들입니다. 따라서 매일 인터넷을 통해 전례력에 따른‘오늘의 성인’의 삶을 찾아 읽고 묵상하면서 그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그 성인과 더불어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한다면 우리 매일의 삶은 참으로 든든할 것입니다.
사탄은 강하고 마음들을 한층 더 그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는 전쟁과 증오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를 구원의 길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있어서 우리의 힘이나 능력에 벗어나는 경우 누군가의 도움을 청합니다.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약하거나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도움을 청합니다 이렇듯이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사탄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에 모든 성인들의 도움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만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 들고 그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적으로 우리와 동맹하는 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모든 성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적 동맹을 맺어 한껏 강화된 힘으로 사탄과 맞서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사탄이 강하고 마음들을 한층 더 그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전쟁과 증오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사탄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 입니다. 전쟁과 증오로 남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파멸입니다. 죽음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사탄은 그 마음의 빈 자리에 들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 하며 사람들을 서로 싸우고 미워하게 만듭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누군가를 향한 적대감이나 미움이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사탄에게 우리 마음에서 떠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바로 성모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성모님, 제 마음 안에 들어와서 저에게 적대감과 미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사탄이 제게서 떠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저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전구해 주시어 저의 마음을 예수님과 당신의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성모님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이십니다. 성모님의 유일한 소망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 완전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시고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근 40년 가까이 계속 되고 있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끝으로 앞으로 이와 같은 발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부드럽게만 다가오는 성모님의 메시지 안에 담겨 있는 우리를 향한 안타까움과 절규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의 힘과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 28-30 참조)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 사랑에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힘과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 절대로 어떤 계산이 있어서는 안되지만, 우리의 하느님 사랑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서 주어질 그 다음 보상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피조물인 우리가 무엇인건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해 늘 감사를 드립시다. 또한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심정으로 순수하게 그분을 사랑하도록 노력합시다. 다음 시편 저자의 기도가 우리 평생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
(시편 27, 4)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사랑과 내 현존에서 위대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삶의 방식이 사랑이 되기를 빌고, 기도와 단식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기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너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면, 하늘은 너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이고, 너희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와 너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보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사랑과 내 현존에서 위대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자렛 처녀였던 마리아를 방문하여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 38 참조) 이 말씀은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앞에서 늘 같은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성모님은 당신이 늘 주님의 종이고, 모든 일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 그분의 사랑, 그분의 뜻과 계획이 모든 것에 앞서야 하고, 당신은 오직 그것을 이루는데 도구 역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겸손 그 자체이시고, 오직 하느님 당신의 뜻만을 온전히 따르시는 성모님을 메주고리예를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려 주시고, 당신이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그 위대하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성모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머물 수 있게 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이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당신과 당신의 사랑에로 돌아와 평화와 구원을 얻으라고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에서의 성모님 발현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그분의 현존은 우리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위대한 선물을 받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모님 말씀대로 바로 그 하느님께 돌아가고, 또 그분께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선물만 받고 선물을 보내주신 분에게 어떠한 마음과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와 머물 수 있게 하셨다고 했지만 이제 그 시간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시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는 성모님의 부름에 신속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내일 혹은 다음에 시간이 있을 때 하겠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지 그 어느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지금 오늘이 있을 뿐이고, 매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며 성모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삶의 방식이 사랑이 되기를 빌고, 기도와 단식이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 주변에서 기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잊지 마라.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 7-8) 이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당신의 명을 저버리고 원죄를 지었을 때 여인을 통해 구세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창세 3, 15 참조), 때가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 성자 예수님을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 허락하실 정도로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고,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사랑의 희생 제물로 허락하실 만큼 하느님은 그분의 사랑에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창조주 하느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모상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온 몸으로 깨닫고 그분을 진정으로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너희 삶의 방식이 사랑이 되기를 빈다.”고 우리에 대한 당신의 바람을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방식이 사랑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마음으로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주고 사랑으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고,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 2) 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늘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뜻과 지향으로 바치는 기도와 단식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우리의 마음과 시간과 희생을 바쳐 드리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 착한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와 단식을 바친다면 그것처럼 더 큰 이웃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착한 뜻과 지향 그리고 사랑으로 바치는 기도와 단식을 예물로 받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사랑의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너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면, 하늘은 너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이고, 너희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와 너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보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우리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셔야 하고, 우리의 모든 것 중심에 하느님이 계셔야 하며 언제나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그분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앞에 늘 낮추고 그분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자세를 바탕으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그것을 그냥 공으로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너희 마음을 기쁨을 가득 채울 것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얼마나 기특하게 여기시겠습니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따져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면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기쁨과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대단히 맑고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그분만을 위해 일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화됩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의 모든 발자취 속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지금도 우리를 얼마나 크게 사랑하고 계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제 마음과 영혼의 눈이 하느님의 사랑에 뜨여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지금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지도 알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모님을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땅에 보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이 되게 하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축복이 올 것인지 알려 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그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시간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삶이 개인적인 회개로 시작되고 선으로 바뀌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너희에게 미래나 평화는 없다. 악은 종식되고, 평화가 너희 마음과 세상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시간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 말씀대로 지금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시간과 하느님께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모님을 여전히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이 은총의 시간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느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이 은총의 시간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느님은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감사와 찬미를 영원히 받으셔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십니다. 육신의 어머니들은 특히 자녀들이 어릴 때는 그들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킵니다. 우리를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시는 우리의 영적 어머니, 참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우리를 영적으로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단순한 현존과 동행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랑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고 성장시켜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을 얻고 계속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습니다. 돈, 명예, 쾌락, 오락, 게임, 드라마, 술 그외 각종 취미나 세상 재미들 속에서 기쁨을 찾고자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기쁨을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들은 아무리 그 양과 횟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의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결코 우리의 마음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데서 기쁨을 찾지 않고 영적인 면에서 기쁨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참된 기쁨이고, 바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우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분께 말씀을 드리면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기도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오직 그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께만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는 또한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가 우리를 위한 기쁨이 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과 기도에로 완전히 향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삶이 개인적인 회개로 시작되고 선으로 바뀌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너희에게 미래나 평화는 없다. 악은 종식되고, 평화가 너희 마음과 세상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비록 성모님께서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삶이 개인적인 회개로 시작되고 선으로 바뀌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너희에게 미래나 평화는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이 말씀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 개인 각자가 회개하고 선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고 평화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 주고 평화를 주고자 하십니다. 다만 이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도 평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와 평화를 위해 더 많은 생각과 계획과 인간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회개를 시작하고 선한 사람으로 바뀌어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1-5)
우리 개인의 회개와 선으로의 변화에 의해 우리의 미래와 평화 존재 여부가 좌우되지만 궁극적으로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이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는 악이 종식되고, 평화가 우리 마음과 세상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모님 성심의 승리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회개와 선한 사람으로의 변화 그리고 기도입니다. 회개하고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도이기에 성모님께서는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볼 수는 없지만 성모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어린 자녀들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사랑의 현존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 앞에서 전구하시는 데서 정점을 이룹니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는 표현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이름없는 대중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각 각 이름과 얼굴이 있는 소중한 한 개인들로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십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우리의 관계는 대단히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모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아주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상황에 맞게 맞춤형으로 예수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상황들을 봉헌하고 전구해 주십니다. 이런 성모님께서 기도가 우리를 위한 기쁨이 될 때까지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미래와 평화를 위해 회개하며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데 어찌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마가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을 추수하고 있는 평화가 없는 이 때에, 나는 끈기있게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기도 중에 너희는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을 발견한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손에 십자가를 쥐어라. 특별히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지금, 사랑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십자가가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너희는 신앙과 희망이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평화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희의 삶으로 비추어 주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마가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을 추수하고 있는 평화가 없는 이 때에, 나는 끈기있게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기도 중에 너희는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을 발견한다.
지금은 사탄이라고도 불리우는 악마와 성모님 사이에 큰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번 달 메시지를 보면 그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기를 악마가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을 추수하고 있는 평화가 없는 때라고 규정하십니다. 악마는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이래 지금껏 계속해서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유혹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유혹의 때가 거의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이번 달 메시지에서 ‘추수’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추수란 농사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말이기에 이제 악마와의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악마에게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말이고, 또 달리 말하면 성모님 성심 승리의 시간이 거의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마치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이 순간 인류에게는 가장 어둠이 짙은 시간, 평화가 없는 때입니다. 이 때 성모님은 우리에게 끊기있게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의 군대로 불리움받은 군사들로서 성모님과 함께 악마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손에 쥔 무기를 더욱 힘껏 잡아야 합니다. 즉 악마와 대항하여 그를 쳐부수기 위해 우리 손에 묵주를 들고 끊임없이 묵주알을 돌려야 합니다. 때로운 악마의 공격과 유혹이 너무 심해 우리가 죄에 떨어지거나 영적인 부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다시금 일어서서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하여 끈기있게 기도하며 계속 전투에 참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악마의 힘을 약화시키고 우리를 점점 더 하느님 가까이 있게 만듭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편에 서게 되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는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는 하느님, 비록 악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을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희망의 하느님 그리고 당신에게 매달리는 당신의 자녀들을 평화와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손에 십자가를 쥐어라. 특별히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지금, 사랑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십자가가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보여 주실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었고, 부활로 넘어가기 위해 절대적인 필요한 관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과 승리의 절대적인 표징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우리 손에 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손에 쥔 십자가에서 하느님 사랑의 무게를 느끼고, 우리 손에 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악과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를 관상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교과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승리하신 그 십자가는 사랑과 선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살고 죽는다면 부활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아무리 악이 기승을 부리고 승리하는 듯이 보여도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또한 특별히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지금, 사랑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십자가가 우리를 격려하기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지금은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때입니다. 세상은 늘 져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약해서는 안 되고 늘 강해야 한다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도록 부추깁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을 광신적으로 여기고 때로는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신앙은 합리적이지 않고 미신적인 것으로 폄하하고, 인간의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성과 과학을 절대시합니다. 이렇게 이 시대에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해도 하느님은 분명 존재하시고,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한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너희는 신앙과 희망이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평화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희의 삶으로 비추어 주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자신들의 착한 삶을 통해 증거하고 사람들이 그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그분을 찬양하게끔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착하고 순수하고 사심없으며 온전히 영적인 것으로 비추어 질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마치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분에 의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불리움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 위에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분께 대한 신앙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평화 자체이시고 평화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평화로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종국에는 그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 17)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 13)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