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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마가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을 추수하고 있는 평화가 없는 이 때에, 나는 끈기있게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기도 중에 너희는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을 발견한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손에 십자가를 쥐어라. 특별히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지금, 사랑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십자가가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너희는 신앙과 희망이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평화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희의 삶으로 비추어 주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악마가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을 추수하고 있는 평화가 없는 이 때에, 나는 끈기있게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 기도 중에 너희는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을 발견한다.

 

지금은 사탄이라고도 불리우는 악마와 성모님 사이에 큰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번 달 메시지를 보면 그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기를 악마가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을 추수하고 있는 평화가 없는 때라고 규정하십니다. 악마는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이래 지금껏 계속해서 영혼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유혹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유혹의 때가 거의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이번 달 메시지에서 추수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추수란 농사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말이기에 이제 악마와의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악마에게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말이고, 또 달리 말하면 성모님 성심 승리의 시간이 거의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마치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이 순간 인류에게는 가장 어둠이 짙은 시간, 평화가 없는 때입니다. 이 때 성모님은 우리에게 끊기있게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의 군대로 불리움받은 군사들로서 성모님과 함께 악마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손에 쥔 무기를 더욱 힘껏 잡아야 합니다. 즉 악마와 대항하여 그를 쳐부수기 위해 우리 손에 묵주를 들고 끊임없이 묵주알을 돌려야 합니다. 때로운 악마의 공격과 유혹이 너무 심해 우리가 죄에 떨어지거나 영적인 부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다시금 일어서서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하여 끈기있게 기도하며 계속 전투에 참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악마의 힘을 약화시키고 우리를 점점 더 하느님 가까이 있게 만듭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편에 서게 되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는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는 하느님, 비록 악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을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희망의 하느님 그리고 당신에게 매달리는 당신의 자녀들을 평화와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손에 십자가를 쥐어라. 특별히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지금, 사랑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십자가가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보여 주실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었고, 부활로 넘어가기 위해 절대적인 필요한 관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과 승리의 절대적인 표징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우리 손에 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손에 쥔 십자가에서 하느님 사랑의 무게를 느끼고, 우리 손에 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악과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를 관상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교과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승리하신 그 십자가는 사랑과 선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살고 죽는다면 부활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아무리 악이 기승을 부리고 승리하는 듯이 보여도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또한 특별히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지금, 사랑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십자가가 우리를 격려하기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지금은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때입니다. 세상은 늘 져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약해서는 안 되고 늘 강해야 한다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도록 부추깁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을 광신적으로 여기고 때로는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신앙은 합리적이지 않고 미신적인 것으로 폄하하고, 인간의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성과 과학을 절대시합니다.  이렇게 이 시대에 십자가와 신앙이 거부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해도 하느님은 분명 존재하시고,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한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너희는 신앙과 희망이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평화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희의 삶으로 비추어 주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자신들의 착한 삶을 통해 증거하고 사람들이 그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그분을 찬양하게끔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착하고 순수하고 사심없으며 온전히 영적인 것으로 비추어 질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마치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분에 의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불리움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 위에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분께 대한 신앙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평화 자체이시고 평화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평화로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종국에는 그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 17)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 13)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 1)


   
 
 
2020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 기울이고 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에로 돌아오고, 이 은총의 시간에 너희 마음을 열며 회개의 길로 떠나라. 너희의 삶은 지나가고 있고,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때문에 너희 각자가 삶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너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 기울이고 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430년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도움을 청하는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탈출 2, 23-24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보내셨고,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그들은 이집트를 떠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집트 탈출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원체험(原體驗)이 되고,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잘나서 혹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극히 보잘것없는 그들과 그들이 겪고 있었던 고역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이 연민과 자비의 하느님께서 오늘날 이 땅에 당신의 예언자로 보내고 계시는 성모님도 하느님을 따라서 우리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기에 당신 자녀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그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아십니다. 또 그 때문에 얼마나 울부짖고 있는지, 얼마나 애타게 기도하고 있는지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우리를 위해 전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만이 우리의 울부짖음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응답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울부짖고 애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귀 기울이시는 성모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머니께서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처지와 어려움 그리고 우리 자신을 예수님 앞에 봉헌하면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도록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삶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지, 우리 생명의 진정한 원천은 누구이신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서만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에로 돌아오고, 이 은총의 시간에 너희 마음을 열며 회개의 길로 떠나라

어제 미국에서 가장 큰 서민 마트인 월마트에 갔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다 우연히 옆에 주차된 차 운전자 뒷좌석 문에 쓰여져 있는 성경 구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모님께서 이번 달 메시지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차에 새겨진 성경 구절이 “Jesus said to him,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Jn 요한 14, 6) 였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동차 뒤 범퍼에 “예수님은 나의 목자” 같은 스티커나 혹은 아주 드물게 어떤 성경 구절 스티커를 붙이는 것을 보았어도 운전자 뒷좌석 문에 성경 구절을 새기고, 더군다나 요한 복음 14장 6절의 말씀을 써 넣은 것은 난생 처음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모님 메시지에서 인용된 때에 맞추어 우연히 그러나 특별한 방식으로 보게 된 것이 난생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기도에로 돌아오고, 이 은총의 시간에 너희 마음을 열며 회개의 길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우리의 믿음이 커지고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져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기도할 때 지금 이 순간이 은총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기도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거기에 올라 타야 기도가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다 줍니다. 회개의 길로 떠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너희의 삶은 지나가고 있고,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때문에 너희 각자가 삶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너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나 한번은 다 죽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분명 그 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자기는 죽지 않을 것처럼, 또 이 지상의 삶은 끝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게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 어느 때나 찾아올 수 있고, 우리의 지상의 삶은 언제든지 그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지나가고 있고, 이 삶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그 깨달음 위에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삶은 지나가고 있고,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지나가고 있고, 우리는 순례자로서 이 지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유한하고 이 세상에 우리가 영원히 머물 집은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천국에 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은 그 영원한 집,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하나의 정거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삶은 또한 하느님의 큰 선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지상의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늘 그 하느님과 함께 지상의 삶을 살면서 그분의 뜻대로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한 목적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삶에는 의미도 기쁨도 거룩함도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것같아도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늘 공허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어머니로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을 우리 삶 깊숙히 모셔드리도록 합시다.

   
 
 
2020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모두를 위한 새생명을 위해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변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이고, 영적으로 쇄신될 필요가 있는 이 땅의 얼굴을 바꾸어 주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어라. 출구를 찾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쁨이 되어라. 평화가 없는 이 때의 어둠 속에서 빛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기도하고 성인들의 도움과 보호를 청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보호하고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모두를 위한 새생명을 위해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지금 우리는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코로나 19 때문입니다. 일상의 모든 것 하나 하나 조심스럽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입니다. 
   성모님은 생존을 위한 우리의 몸부림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육적인 생명에 대해서도 염려하시지만 그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 아니 영원한 생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물론 성모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메시지 곳곳에서 성모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고, 우리의 인생은 봄에 피었다 지고마는 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최종 관심은 이 지상이 아니라 천국이어야 한다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당신이 이 지상에 오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우리가 훗날 천국에 들어가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바라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모두를 위한 새 생명을 위해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생명은 우리의 육신이나 세상, 혹은 그 어느 피조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새로온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실 때 얻어지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빵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 오직 그분의 자녀로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느님만 계시면 그 어느 것도 아쉬운 것이 없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새 생명을 지금 이 지상에서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 누구도 예외없이 우리 모두가 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를 위해 우리 모두에게 당신과 함께 기도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통해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실 때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계셨던 성모님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성모님과 함께 있었고, 성모님의 인도를 받았으며 성모님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성모님은 사도들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연히 성모님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머니 옆에 무 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와 같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기도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은 기도하는 부모 요아킴과 안나에게서 태어나 그분들과 함께 기도하며 기도를 배우셨습니다. 세 살때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기 전부터 이미 성모님은 기도하셨고, 일생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나자렛 집에서 매일 같이 구세주의 오심을 대망하며 기도를 바치시던 중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실 거라는 하느님의 명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던 중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을 체험하셨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부름을 좀더 분명하게 듣고 따라 갈 수 있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예수님의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변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이고, 영적으로 쇄신될 필요가 있는 이 땅의 얼굴을 바꾸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양심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그 양심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무슨 잘못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마주하거나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픈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 없이 우리 삶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변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길을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에로 옮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달은 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 21) 라고 말했던 돌아온 탕자인 작은 아들처럼 말입니다. 
   앞으로 돌아오는 주일이 바로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모님과 함께 기도 드리던 사도들과 제자들 위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이 성령 강림으로 인해 사도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용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과 은사를 통해 예수님 사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성령으로 가득 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무려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새로운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던 사도들과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로 돌아가면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시고 영적인 쇄신을 필요로 하는 이 땅의 얼굴도 바꾸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손에 묵주를 들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합시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가 되어라. 출구를 찾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쁨이 되어라. 평화가 없는 이 때의 어둠 속에서 빛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 13-14 참조) 우리를 통해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며 그분이 주신 소명을 세상에서 실천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며 우쭐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평화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는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 계명의 길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출구를 찾고 있지만 그 출구가 보이지 않아 극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 기쁨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출구를 보여주고, 그를 통해 빠져 나오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출구를 함께 찾고, 거기에서 벗어나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실천적인 믿음을 지니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평화가 없는 이 때의 어둠 속에서 빛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빛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녀야 하는 빛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 16 참조) 우리는 세상에 평화가 없다고 혹은 세상이 너무 어두워졌다고 비판하거나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가 없고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착한 행실로 빛을 가져다주고 불을 밝히는 사람이 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평화와 빛을 주기 위해 평화와 빛 자체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를 위해 가장 착한 목자로서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우리 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성인들의 도움과 보호를 청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보호하고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수호성인을 선택하고 그 이름을 우리의 세례명으로 받습니다. 우리는 그 성인의 삶과 영성을 본받고 그 성인에게 기도하며 늘 도움과 보호를 청합니다. 참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교회에는 우리 자신의 수호성인뿐만 아니라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성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룩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천국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계속 살아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성인들에게 도움과 보호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상 교회의 일원이 된 그들은 이전에 우리와 같은 지상 교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도움과 보호를 청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과 우리는 모두 하느님 가정의 한 일원이고 지상 교회 신자들을 돕도록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돕고 보호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실재적으로 우리에게 도움과 보호를 줄 수 있는 우군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들의 도움과 보호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매일 한번 혹은 수시로, 가톨릭 기도서 또는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일상적으로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치면서 그들의 도움과 보호를 청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자신이 특별히 신심을 가지고 있는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의 도움과 보호를 청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즉 자기 나름대로의 ‘성인 호칭 기도’를 만들어 바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들과 아울러 매일의 성인에 대해 그 삶을 찾아보고 묵상하고 본받으려 하며 그 성인에게 도움과 보호를 청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고 성인들에게 도움과 보호를 청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도움과 보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천국과 천상의 것들에 대한 갈망까지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자신들처럼 거룩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 자기들과 함께 같은 천국 시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지상에서의 새로운 성인, 훗날 천국의 새로운 시민,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2020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에게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홀로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께서 나의 현존을 통해 너희 위에 내려 주시는 사랑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로 인해 너희 마음이 굳어지게 하지 말고,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사람, 너희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에게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기를 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에게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기를 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때’는 어떠한 때입니까?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전 세계가 마비되고,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때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방역 국가로 칭송받는 우리 나라를 제외하고 세계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국민들에게 자택대기령을 내렸고, 사람들은 제한된 부자유 속에서 일상의 큰 불편함을 겪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불편함을 넘어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시행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직장 폐쇄, 학교 폐쇄, 사회적 모임 중단, 그리고 종교 활동 제한 등이 단행되면서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이 때’라는 표현을 통해 현재 우리가 어떤 때를 살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시고 난 다음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죽일까봐 무서워 다락방의 문을 꼭 잠가두고 불안과 공포 속에 모여 있었던 제자들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성모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불안한 삶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우리와 온 인류에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지금 이 때를 우리의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로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우리의 삶을 개선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만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지 체험하고 있는 이 때,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우리의 발길을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리기 위해 이 때를 그 자극제로, 유인책으로 잘 활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 5-7)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홀로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께서 나의 현존을 통해 너희 위에 내려 주시는 사랑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는 이제 일정한 조건을 준수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하는 공식적인 성당 미사 봉헌을 시작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 심지어 성모님이 발현하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조차도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가 중단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성모님은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성령께 홀로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홀로’입니까?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외부 활동이 많이 제한되어 있는 관계로 ‘홀로’ 있을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홀로’란 쓸쓸한 마음으로 혼자 있는 외로움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혼자 있는 고독을 의미합니다. 이 고독 속에서 성당, 자신의 방 혹은 조용한 어떤 장소에서 성령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더욱 강하고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손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들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께 위로자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성령께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간청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9-13)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실 만큼 크셨던 하느님의 그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인 인간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분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만 하느님은 그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기억하시고,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바로 성모님을 통해서 입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보내셨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에 앞서 성모님을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발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모님의 현존은 바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강력한 표지입니다. 따라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참되다고 믿는 우리는 성모님의 사도로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로 인해 너희 마음이 굳어지게 하지 말고,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사람, 너희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로 인해 너희 마음이 굳어지게 하지 말고,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시련들’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대유행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온 세상 사람들이 시련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큰 시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시련들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각종 시련들을 겪고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그 시련들로 인해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시련들로 인해 마음이 굳어지면 희망도 삶의 의지도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쉽게 원망하거나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들이 찾아오면 기도하는 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시련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기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것 역시 대단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막의 이미지는 황량함과 건조함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시련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황량하고 메마른 마음으로 건조한 기도를 바치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절대로 시련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시련들과 마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우리는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며 그 시련들과 더불어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봉헌하면서 의탁해야 합니다. 시련들이 찾아온 때는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더욱 열어드리고, 더욱 더 신뢰하는 마음으로 믿고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 말씀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사람, 우리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반사해주려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거나 체험하지 못하거나 우리 안에 그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주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부활의 힘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 부활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아시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하신 성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성모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도록 합시다. 
   

   
 
 
2020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 내 아들에게로 돌아오너라. 기도와 단식에로 돌아오너라.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지배하고 있고 너희의 삶과 너희가 걷고 있는 지구를 파괴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해드려야 한다. 용감해지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여라. 너희는 너희 마음과 가정 안에서 회개를 보게 될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너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나의 모성적 축복을 다해 너희를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 내 아들에게로 돌아오너라. 기도와 단식에로 돌아오너라.

성모님께서 메주고리예 발현을 처음으로 시작하신 날은 1981년 6월 24일이었습니다. 성모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38년 9개월 동안 매일 발현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멸망의 길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고 구원되어 당신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온 세상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근 세기 들어  온 인류가 이처럼 큰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적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의 힘 역시 얼마나 보잘 것없는지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어려운 상황이 빨리 지나가도록 마음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지금 인류가 영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성찰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거나 인간의 힘으로만 모든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온 인류는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께로,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그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 난 다음 가장 곤궁한 처지에 놓였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던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처럼 말입니다(루카 15장 참조).
   예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께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기도와 단식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열도록 도와주고, 단식은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온전히 그분께만 의탁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지배하고 있고 너희의 삶과 너희가 걷고 있는 지구를 파괴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해드려야 한다. 용감해지고 거룩하게 살기로 결심하여라.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 1-11 참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 역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 말씀 대신 사탄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원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 그들 사이의 관계, 그들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영원한 생명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똑같은 사탄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그분의 완전한 승리 전에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의 삶과 우리가 걷고 숨쉬며 살고 있는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지구조차도 파괴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반역하고 우리도 그처럼 하느님께 반역하여 죄를 짓고 멸망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 삶과 우리 삶의 터전 모두 파괴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사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왜 사탄의 말을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 44)
   비록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승리한 듯이 보인다하더라도 그를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그의 시간은 거의 다 지나가고 있고, 종국에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결국 빈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옥에 영원히 가두시고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이 곧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감해지고 더욱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마음과 가정 안에서 회개를 보게 될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너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나의 모성적 축복을 다해 너희를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와 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용감해지고 거룩하게 살면 우리 마음과 가정에 회개의 열매가 열립니다. 순수한 마음과 지향 그리고 열렬한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당연히 응답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그 옛날 이집트 노예살이를 하던 히브리 민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그곳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말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 23-24) 
   바로 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7-11) 또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 23-24)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와 울부짖음을 듣고 그에 응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모님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어머니로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다 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늘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부르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2020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 중에 변모된 너희의 얼굴을 보고 싶다. 너희는 세상적인 관심사에 흠뻑 빠져 있고, 봄이 문턱에 와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보속하고 기도하라고 부름받고 있다. 자연이 새생명을 위해 말없이 싸우는 것처럼, 너희도 기도 중에 하느님께 너희 자신을 열라고 부름받고 있다. 너희는 하느님 안에서 너희 마음의 평화와 봄볕의 따스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 중에 변모된 너희의 얼굴을 보고 싶다. 너희는 세상적인 관심사에 흠뻑 빠져 있고, 봄이 문턱에 와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기도하면 우리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그냥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광채, 생기, 순수함, 거룩함으로 가득한 얼굴로 변화됩니다. 즉 우리의 얼굴이 변모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이 착해지고 우리 영혼이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얼굴로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선하심과 거룩함, 아니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눈이 마음의 창이듯이 우리 얼굴은 우리 영혼의 반사경입니다. 변모된 얼굴을 지니고 싶으면 우리 영혼을 먼저 변모시켜야 합니다. 그것을 변모시키는 것은 기도이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힘이 궁극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자 모세는 십계명이 담긴 증언판을 받기 위해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시나이산에 올라서 사십일 동안 기도하고 단식했습니다. 그 후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탈출 34, 29-30)
   이렇게 기도는 인간의 얼굴을 변모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옛날 사십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했던 모세의 얼굴을 변모시켜주신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의 얼굴도 거룩하게 빛나도록 바꾸어주십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 중에 변모된 너희의 얼굴을 보고싶다. 너희는 세상적인 관심사에 흠뻑 빠져있고, 봄이 문턱에 와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모님은 기도 중에 변모된 우리의 얼굴을 보고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우리의 얼굴이 변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기도를 해도 아주 적게 혹은 대충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진정 은총의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세상적인 관심사에 흠뻑 빠져 있고, 봄이 문턱에 와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쁜 선택을 하고 있고 영적인 감수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을 사라져 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들에 우리 마음과 영혼과 시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보속하고 기도하라고 부름받고 있다. 자연이 새생명을 위해 말없이 싸우는 것처럼, 너희도 기도 중에 하느님께 너희 자신을 열라고 부름받고 있다. 너희는 하느님 안에서 너희 마음의 평화와 봄볕의 따스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예언자로 이 세상에 오고 계십니다. 예언자의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여 회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대단히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보속하고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고, 세상의 죄는 점점 더 늘어가면서 하느님 분노의 잔이 넘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희생의 정신을 따르는 보속을 해야 합니다. 또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보속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두번째 부르심은 기도 중에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여는 맥락은 ‘기도 중’ 입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열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하느님께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안에서 마음의 평화와 사랑의 온기를 체험하게 됩니다. 옛말에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모든 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기도하지 않거나 대충 혹은 조금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0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너희 마음 안에서 용서의 거룩함을 느낄 때까지 좀 더 많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과 거룩함이 없으면 세상에 미래가 없기 때문에 가정들 안에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거룩함과 기쁨 안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너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너희 마음 안에서 용서의 거룩함을 느낄 때까지 좀 더 많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루카 17, 3-5 참조)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도들은 왜 갑작스럽게 자신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을까요? 그들은 그동안의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의 힘이 있어야만 잘못한 형제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의지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전능하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겠습까? 아니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길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해야 우리 마음이 주님께로 열리고, 그 열린 마음에 주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내려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서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어 우리가 그 안에서 자라나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주님께 활짝 열어드리기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용서는 거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그분과 화해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용서는 거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통해 죄인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에 용서는 거룩한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용서를 통해 사람들 마음 안에 화해, 사랑 그리고 평화가 회복되기 때문에 용서는 거룩한 것입니다. 용서의 거룩함을 우리 마음 안에서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교만, 미움 그리고 시기가 사라져야 합니다. 무엇을 통해 이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혹시 여전히 우리 마음 안에서 용서의 거룩함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의 기도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너희 마음 안에서 용서의 거룩함을 느낄 때까지 좀 더 많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사랑과 거룩함이 없으면 세상에 미래가 없기 때문에 가정들 안에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어머니이시기에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미래가 이 세상의 사랑과 거룩함 존재 여부에 달렸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의 가장 작은 단위 세포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인 가정들을 언급하십니다. 가정들에 거룩함이 있으면 이 세상의 미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형태나 상황이 어떻든지간에 한 가정에서 태어나 길러지고 세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첫번째 장소가 바로 가정이고, 그 가정 안에서 사랑과 거룩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다면 , 세상에는 사랑과 거룩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가정에서부터 사랑의 인간, 거룩한 인간 즉, 성인이 만들어져야 세상에 사랑과 거룩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정들 안에 거룩함이 있게 될까요? 하느님이 계시면 됩니다. 어떻게 가정들 안에 하느님을 모셔들일 수 있을까요?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생활할 때, 모든 가족이 함께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고 그 성체의 정신으로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 가정 안으로 들어가시고 그 가정은 거룩함을 지니게 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의 가정을 거룩함을 상기시키는 물건들, 즉 성물들로 조화롭게 잘 꾸밀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고상,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상이나 상본, 자비의 예수님 상본, 요셉 성인을 비롯한 여러 성인상이나 상본 등으로 집안을 장식하면 모든 가족들이 그것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함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게 마련입니다. 환경 면에서 우리의 성당이 거룩함을 일깨워주는 장소인 것처럼 작은 교회인 우리 가정도 거룩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성모님 메시지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날마다 집에서 성경을 읽으라고 부탁한다.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도록 성경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1984년 10월 18일)
   우리의 미래, 세상의 미래는 우리의 능력이나 재물, 군사력 혹은 고도의 과학기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사랑과 거룩함을 간직하고 있을 때만 그 미래가 있습니다. 달리 말해 사랑과 거룩함 자체이시고 그 원천이신 하느님을 우리들 마음과 삶 안에 모시고 우리가 사랑하고 거룩하게 살 때, 비로소 우리와 이 세상에는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기쁨 안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너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분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성경 봉독, 미사 강론, 영성 강의, 가톨릭 잡지나 신문, 영성 상담 등 각종 경로를 통해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잘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지 잘 헤아리지 못하고, 우리 또한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우리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고 마음을 다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무 조건없이,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회개가 일어납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은 회개하게 되고 거룩하게 변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우리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이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고, 영적인 잠 혹은 영적 무의식상태에서 다시 깨어나기 위해 우리는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과 그 메시지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부름에  충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 1)

   
 
 
2019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를 축복해 주시고, 천상으로부터 오는 그분의 사랑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도록,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 오고 있다. 너희의 마음은 평화를 갈망하고, 그 평화는 지상에서 점점 적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영혼들이 아프며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를 부르시는 이 구원의 길로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를 축복해 주시고, 천상으로부터 오는 그분의 사랑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도록,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 오고 있다. 

“나는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는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들과 함께 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이 성탄절에 다시금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우리의 구원자로 태어나시고, 여전히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고자 하시는 예수님께만 둘 것을 촉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모든 축복의 원천이시고, 오직 그분에게서만 천상적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축복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그분의 천상적 사랑을 체험하지 않으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를 축복하시며 우리에게 천상적 생명을 보여주러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과 가정에 모셔들입시다. 
   
너희의 마음은 평화를 갈망하고, 그 평화는 지상에서 점점 적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영혼들이 아프며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평화를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평화가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모님께서는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영혼들이 아프며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 예컨대 돈, 권력, 명예, 육체적 쾌락과 같은 것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의 영혼은 아프며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하느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려 하고 기도하지 않으며 인간적인 욕망만 충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 종국에는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를 부르시는 이 구원의 길로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기에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우리 영혼이 아프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건강한 영혼을 지니며 영적인 생명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거나 혹은 영적 무의식상태에 있는 우리를 다시 활성화시키고 깨우시기 위해 성모님은 메주고리예에 매일 발현하며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오직 하느님이 부르시는 그 구원의 길로만 따라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당신 아들 예수님을 모셔 오시는 성모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또한 예수님께로 데려가고자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예수님을 모셔 오시는 성모님의 그 품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 품에 안으실 수 있도록 유순한 어린 아기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 되게 하여라.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평화는 없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 마음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희 안에서 태어나시고 너희에게 그분의 사랑과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미움과 질투로 가득하기 때문에 세상은 전쟁 중에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예수님께서 너희 삶 속에 태어나도록 해드리지 않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이 눈에 보여지는 것이다. 그분을 찾고 기도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기쁨과 평화이신 아기의 모습으로 그분 자신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 되게 하여라.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평화는 없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 마음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희 안에서 태어나시고 너희에게 그분의 사랑과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보살피고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 수많은 일을 합니다. 씻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놀고, 운동을 하는 등 수많은 활동을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누구도 예외없이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수많은 일과 활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적 삶을 유지하고 그를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모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 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매일 삶 속에서 기도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기도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또 거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다음주면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림절은 구세주의 첫번째 오심과 두번째 오심을 깊이 묵상하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성모님께서도 구세주의 첫번째 오심을 준비하시면서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지상에서 우리와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시면서 성모님은 매일 무릎을 꿇고 두 팔을 가슴에 십자 형태로 얹으시고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셨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매일 일상을 살면서 구세주의 첫번째 오심에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두번째 오심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와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고, 우리를 결정적으로 구원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 두번째로 영광 중에 오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기도로 그 시간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대림절은 우리를 위한 때입니다. 우리 구원의 시간이 가까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때입니다. 이 때가 우리 구원을 위한 때임을 깊이 인식한다면, 우리는 성모님 말씀대로 이 때를 우리를 위한 기도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그 인근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때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2) 이렇게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귀한 선물이고, 오직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만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도록 하려면 하느님이 계실 자리, 곧 우리 마음을 기도로 열어야 합니다. 그 열린 마음이 새로운 베들레헴의 동굴이 되고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기꺼이 다시 태어나시고, 우리는 평화 자체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머물게 되며 그분은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에 사랑과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재물이나 좋은 집이나 차가 아니라 기도이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미움과 질투로 가득하기 때문에 세상은 전쟁 중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는 수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라, 가정, 개인 간에 그 수를 셀 수 없는 엄청난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이 전쟁 중에 있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미움과 질투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미움과 질투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심각한 일입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이 미움과 질투로 가득한 것입니까? 사랑과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을 모르고, 그분을 믿지 않으며 그분을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쟁의 종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미움과 질투는 사라질 것이고, 진행되고 있는 전쟁들도 끝나며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예수님께서 너희 삶 속에 태어나도록 해드리지 않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이 눈에 보여지는 것이다. 그분을 찾고 기도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기쁨과 평화이신 아기의 모습으로 그분 자신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는 요셉 성인과 성모님 그리고 그분 태중에 계시던 예수님이 머무실 여관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목자들의 인도로 어느 동굴로 안내되었고, 예수님은 그곳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눕혀지셨습니다. 요셉 성인의 고장인 베들레헴에 여관이 없어서라기보다 그 당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있어 아무도 자기의 집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 11) 고 하신 성경 말씀대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거듭 거듭 우리들 가운데 태어나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의 주민들이 될 수도 있고,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든지 아니면 그분이 태어나실 자리를 마련해 드리든지 그것은 이제 우리 선택의 몫입니다.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서 태어나시도록 자리를 내드린다면, 우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2) 라고 외친 수많은 하늘 군대의 찬가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 탄생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동굴로 달려갔던 목자들처럼, 하늘에 뜬 그분의 별을 보고 먼길을 마다않고 베들레헴의 동굴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그 앞에서 기도하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모님께 “어머니, 이번 성탄절에 꼭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간절히 청합시다. 그  옛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셔오셨던 성모님께서 이번 성탄절에 다시 한번 아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모셔 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성탄절은 그 어느 성탄절과 비교할 수 없는 감동적이고 은헤로운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2019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기도에로 부른다. 기도의 열매는 기쁨이기 때문에 너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주고 그분을 증거하면서 기도가 너희 영혼에 향유가 되게 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너희를 축복해 주실 것이며, 너희의 희생들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기도에로 부른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또 다시 우리를 기도에로 부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마치 집을 짓기 위해 가장 처음으로 놓은 기초, 반석과 같은 것입니다. 기초가 놓지 않고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기도 없이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는 도구이고 생명줄입니다. 기도를 해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고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 회개하게 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38년 4개월 동안 메주고리예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된 주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두번째로 성모님께서 또 다시 우리를 기도에로 부르시는 이유는 그 수많은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주 적게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가 맨 첫자리를 차지하도록 초대한다.”(1986년 7월 3일) 라고 말씀하셨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기도가 우리 삶의 맨 첫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기도를 우리 삶의 맨 첫자리에 놓게 될 것이고,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고,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기도에로 다시 부르시는 것은 성모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거룩하게 되고 구원되며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기쁨이기 때문에 너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주고 그분을 증거하면서 기도가 너희 영혼에 향유가 되게 하여라.

우리가 어떤 것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항상 그것을 거듭 거듭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 사물, 활동 모두 우리 인간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릅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느껴지고, 계속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계속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기쁨은 점점 커지고 우리 안에서 지속됩니다.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열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안에 생긴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는데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아주 적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당신을 향한 우리 사랑의 마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밥을 입에 넣고 오래 되새기면 단맛이 느껴지는 것처럼 기도도 오래, 많이 바쳐야 그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가능하면 많이 기도하라고 권고하시면서 적어도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고, 매일의 삶이 기도가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마음으로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열매가 기쁨이라는 성모님 메시지를 실제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열매인 기쁨을 체험하게 되고, 그 기쁨은 얼굴과 온 몸 그리고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며 그를 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을 다한 오랜 기도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너희를 축복해 주실 것이며, 너희의 희생들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계시하시고, 기도하실 때마다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당신처럼 당신 제자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그분을 찾게 하셨으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실 만큼 우리는 사랑하시는 분입니다(마태 10, 30 참조). 
   성모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천상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면 그분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우리를 축복하주실 것이며 우리의 희생들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 시작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에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 나라, 뜻을 먼저 찾고 드높이며 모든 중심을 하느님 아버지께 두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새로운 제자들인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간구하고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은 완전히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겨드리고 그분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돌보시고 축복하신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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