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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가 너희를 도와줄 수 있도록 내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역시 너희의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있으니 묵주기도를 바치고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하여라. 삶은 너희가 그것을 하느님 손에  맡겨드릴 때까지 신비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렇게 그 신비들을 너희 삶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셨던 베드로처럼 너희는 이렇게 신앙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또한 하느님께서 매일매일 내 현존으로 너희를 감싸 주시는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증거하라고 부름받는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마음을 열어라.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마음으로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가 너희를 도와줄 수 있도록 내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도록 당신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지향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그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은 바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의 구원입니다.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기도를 통해 회개하고 하느님을 굳게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고, 성모님의 지향들은 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시고, 당신의 지향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성모님의 그 마음에는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만이 가득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 역시 너희의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있으니 묵주기도를 바치고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하여라. 삶은 너희가 그것을 하느님 손에  맡겨드릴 때까지 신비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렇게 그 신비들을 너희 삶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묵주기도는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그리고 영광의 신비 각각 5단씩, 전체 신비 20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2002년 10월 16일에 반포된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묵주기도는 복음의 요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환희의 신비부터 영광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전체 20단을 모두 바치면서 각 신비들을 묵상하게 되면 우리는 신약의 구원의 역사와 복음 전체를 자연스럽게 묵상하게 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각 신비의 내용을 찬찬히 묵상한 후 그 내용을 마음에 새기면서 주어진 기도들을 바쳐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입으로 소리내어 바치는 염경기도이며 동시에 그 신비의 내용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관상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의 각 신비들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떠한 위대한 일을 하셨는지 잘 보여주고, 끊임없이 그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의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주고,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듭니다. 또 각 신비들에 우리들의 삶을 대입시키며 바칠 때 그 의미는 더욱 확대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잉태되심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1단을 묵상할 때, 우리를 창조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감사드리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금 거듭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성모님께 전구하면서 그 단을 바친다면, 환희의 신비 1단 안에 우리의 삶이 함께 들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형되게 됩니다. 또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환희의 신비 4단을 묵상할 때, 우리 자신을 성모님의 손에 맡겨드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해달라고 청하면 우리의 삶은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삶이 되고, 영적이고 신적인 삶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묵주기도의 각 신비들에 우리의 삶을 대입시키고, 마음으로 각 신비들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우리가 바치는 묵주기도는 우리의 삶과 영혼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셨던 베드로처럼 너희는 이렇게 신앙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원래 어부였던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사도가 되었는지 3가지 버전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소개를 통해서였습니다. 요한 복음 1장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세례자 요한의 안내로 예수님을 먼저 만나고 그분과 머문 후에 자기 형 시몬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 보시며 그가 시몬임을 알아보시고 그의 이름을 ‘케파’ 즉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도중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르코 복음 1장에 의하면 그는 갈릴래야 호수에서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를 보시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셨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동생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호숫가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이 앉으시도록 자신의 배를 빌려드리고 그물을 손질할 때였습니다. 루카 복음 5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침이 끝난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은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고, 그 체험 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죄 많은 사람이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요한, 마르코, 루카, 이 세 복음사가가 서로 상이한 버전으로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을 부르시어 그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시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먼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 그를 당신의 제자로, 사도로,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사도들의 으뜸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그의 이름을 처음부터 베드로라고 바꾸신 것은 바로 그를 당신이 세우실 교회의 주추돌로 삼기 위해서 였습니다. 베드로는 돌, 바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8-19)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충성심과 열정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동시에 그의 약점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 하시고 난 다음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갑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22, 31-34)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베드로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대사제의 관저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루카 복음은 바로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 60-6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는 비롯한 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두 번이나 나타나셨지만 베드로와 개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요한 20, 19-29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개인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그 만남에 대해 요한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 15-19)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상처났던 베드로의 마음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치유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고백 위에서 다시금 으뜸 사도로서 그가 교회의 반석, 최초의 교황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성령께서 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불꽃 모양의 혀로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성령으로 가득찬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분의 구원에 대한 최초의 대외적인 설교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그날 3천명의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2, 1-41 참조)
   어부 시몬 베드로는 그의 나이 60세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제자가 되고, 사도들의 으뜸이 되었으며 성령으로 가득 차 곳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마침내 97세의 나이에 로마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신앙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끊임없이 부르시고,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통해 늘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도 기꺼이 내어놓을 만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또한 하느님께서 매일매일 내 현존으로 너희를 감싸 주시는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증거하라고 부름받는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마음을 열어라.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마음으로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들 가운데 성모님께서 함께 하심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하신 사랑이며 동시에 우리에 대한 성모님의 한없는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그 사랑에 겨워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현존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은 그 사랑의 충동으로 늘 영적이고 거룩한 것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삶을 통한 증거를 할 수있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체험이며,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그것을 체험하고 느낀 사람만이 증거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랑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성모님의 현존을 통한 하느님 사랑과 성모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019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너희에게 선이 되도록 하늘 나라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의 노력을 백배로 축복하시고, 너희는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자가 되고, 믿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회개의 은총을 느낄 것이며, 하늘은 너희의 노력과 희생을 고마워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손에 묵주를 들고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거룩함을 선택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너희에게 선이 되도록 하늘 나라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여라.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고,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지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하늘 나라의 시민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은 앞으로 영원히 누리게 될 하늘 나라 삶을 준비하는 시간이기에 우리 삶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하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상에 살면서도 이 지상의 삶에 매몰되지 않고 늘 하늘 나라를 그리워하고, 그에 들어가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모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에 그 나라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우리가 하는 일, 활동을 통해 실천하면서 우리가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우리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며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압니다. 우리의 기도, 일, 증거는 모두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 1-3)
   비록 위에서 “이 지상에서의 삶은 앞으로 영원히 누리게 될 하늘 나라 삶을 준비하는 시간이기에 우리 삶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하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이 지상에서의 삶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아주 소중한 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있고, 하늘 나라와의 연관 속에서 그 의미가 더 깊이 드러나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너희에게 선이 되도록 하늘 나라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의 노력을 백배로 축복하시고, 너희는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자가 되고, 믿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회개의 은총을 느낄 것이며, 하늘은 너희의 노력과 희생을 고마워할 것이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위해서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할 때,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며 축복해주십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노력을 무려 백배로 축복해주십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바친 모든 노력에 대해 그처럼 크게 축복을 해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미 하늘 나라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영예롭고 복된 일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히 우리가 무엇이건대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을 증거한단 말입니까? 감히 우리가 무엇이건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당신 나라의 일꾼으로 써주신다는 말입니까? 이미 그 자체로 우리는 가장 높은 영예를 얻었으며,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더하여 우리의 노력을 백배로 축복해주신다니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자비하시고 후하신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여 하느님의 격려와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설 수 없습니다. 한층 더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서 사랑으로 더 많이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말입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서 사랑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증거하는 사람의 삶은 이전과 달리 변화된 삶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 친구, 친지, 이웃, 동료, 같은 교우, 그외 여러 기회로 자주 접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달라진 모습을 쉽게 감지하고, 그 영적으로 변화된 모습에 자연스럽게 좋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4-16)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기 교회 모습이 어떠했는지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전해 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 42-47) 이렇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함께 기도하고, 가르침을 받고,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서로 사랑과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다른 백성들의 호감을 얻었습니다. 이 호감에 주님의 은총이 더해져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교인의 숫자가 늘어갔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회개의 은총을 느낄 것이며, 하늘은 너희의 노력과 희생을 고마워할 것이다.”고 하신 성모님 메시지의 아주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손에 묵주를 들고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거룩함을 선택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신심이 없는 사람은 묵주기도를 바칠 마음도 없고, 실제로 하지도 않기 때문에 손에 묵주를 드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손에 묵주를 들고 자신이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려면 먼저 성모님을 사랑하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지녀야 합니다. 또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손에 묵주를 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누구나에게나 일상품이 되어 버린 스마트폰은 어디에서든지 다 손에 들고 다니고, 지하철에서도 다 그곳에 눈을 두고 있는데 성모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지하철 안에서든, 버스 안에서든, 그 어느 장소에서건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 뭐 이상한 일입니까?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감출 것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용감하게 손에 묵주를 들고 성모님의 사람임을 증거하며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거룩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신심도 없고, 묵주기도도 바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신앙과 신심 행위를 실천하며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영양소가 결핍된 영적 자양분만을 먹는 것이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사람이 되어야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손에 묵주를 들어야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께로 가장 완전하고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2019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를 위한 나의 부름은 기도이다.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되고, 너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화관이 되게 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이 찾아오고 너희가 강하지 않을 것이며 또 죄가 지배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너희가 내 사람이라면 너희의 피난처는 내 아들 예수님의 성심이 될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가 밤낮으로 언제나 너희를 위한 삶이 될 때까지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를 위한 나의 부름은 기도이다.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되고, 너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화관이 되게 하여라.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부름은 천상적이고 대단히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늘의 부름을 ‘성소’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거룩한 부르심’ 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모님께로부터 받는 부름은 거룩한 것이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받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를 위한 나의 부름은 기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소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대화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거나 그럴 열망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성소는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성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를 위한 나의 부름은 기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소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성모님의 부름 안에는 우리에 대한 성모님의 사랑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 버리고, 사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여 죄에 떨어지고, 심하게는 영원한 생명도 누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현세에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며 살다가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모님은 기도를 우리를 위한 성소로 주시는 것입니다. 
   옛 말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기도의 진정한 맛을 알려면 아주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기도가 너희의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기도가 너희의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너희의 하루를 짧고 열렬한 기도로 가득채워라.” “기도를 너희 삶의 맨첫자리에 두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너희를 위한 기쁨이 되게 하여라.” 기도가 가져다주는 기쁨은 천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도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더욱더 그 기쁨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너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화관이 되게 하여라.”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안에 살게 만들고, 우리를 그분께 묶어 주며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늘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과 하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것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길인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 송이를 받아 성모님께서는 아름다운 화관을 만들어 우리 자신과 함께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 하나 하나에 우리 자신을 담아 바치는 이 과정, 또 그것으로 하나의 아름다운 화관을 만들어 하느님께 바치시는 성모님,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기도의 화관으로 우리가 늘 하느님께 묶여 있기를 바라는 성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4-5)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이 찾아오고 너희가 강하지 않을 것이며 또 죄가 지배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너희가 내 사람이라면 너희의 피난처는 내 아들 예수님의 성심이 될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길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이 찾아오고, 너희가 강하지 않을 것이며 또 죄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미래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 메시지대로만 생각해본다면 그리 밝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떤 종류의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시련들이 찾아올 것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연약하기만 할 것이며 또 죄가 지배권을 갖는 그런 암담한 상황입니다. 사탄은 존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시련에 빠뜨리고, 우리를 무력화시키며 우리를 죄로 떨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만일 너희가 내 사람이라면, 너희의 피난처는 내 아들 예수님의 성심이 될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길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자신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또한 비록 시작은 암울했지만 끝은 밝고,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 승리를 위해 성모님은 우리가 당신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가 성모님께 속한 사람이고, 그분의 것이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이라면,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가 그분의 성심에 봉헌하여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심에서 피난처를 얻고, 그분의 사람이 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가 밤낮으로 언제나 너희를 위한 삶이 될 때까지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목요일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며 예수님은 고뇌에 싸여 피땀을 흘리셨습니다.(루카 22, 39-44 참조)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처럼 죽음의 고통 앞에서 고뇌하시고, 피땀을 흘릴 정도로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성금요일 빌라도의 관저 앞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당신이 져야 하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시고,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성목요일 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힘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 즉 성령이 예수님을 충만하게 하셨고, 모든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없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모든 유혹과 시련에서 우리를 견디게 만들고, 우리를 구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장차 올 시련들과 우리의 연약함, 죄의 지배, 예수님의 성심 안에서의 우리의 승리에 대해 말씀하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결론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기도가 밤낮으로 언제나 너희를 위한 삶이 될 때까지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2019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나는 너희가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끈기 있게 기도하게 될 새로운 시간들을 위해 너희를 준비시키고 있다.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를 통해 일하시고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비록 사탄이 전쟁과 증오를 원할지라도, 나는 가장 귀한 선물인 평화를 위해 너희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나의 손이 되어 주고 하느님과 함께 자랑스럽게 가거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지만 성체성사를 제외하고 돌아가시기 직전 십자가상에서 성모님을 만민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것만큼 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마치신 후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예수님 구원 계획의 준비된 마지막 프로젝트였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당신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우발적으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의깊게 그 일을 준비하셨고, 당신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적절한 때로 택하시어 갈바리아산 십자가상에서 그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만들어주신 것은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이루어진 대단히 숭고한 일이었습니다. 성모님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님, 특별히 십자가상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의 피로써 성모님과 우리가 어머니와 자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돌볼 책임을 맡겨주셨고, 온 인류는 그 어머니의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길 특권과 의무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고 하신 이번 달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이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고 계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너희 각 사람을 위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온 인류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알고 계시고, 그 각 개인을 위해 마음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각 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은 우리 각 사람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고, 거기에 맞추어 하느님께 전구해주시고, 이번에는 특별히 우리 각자를 위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고, 그것들에 마음을 쓰며,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성모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  우리의 모든 약점과 장점, 우리의 간절한 바램과 성취, 그 모두를 알고 계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성모님은 우리 각자를 위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자녀로서의 우리 존재 자체, 우리가 행한 선행과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그 크신 은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우리가 성모님의 메시지를 통해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신데 대하여, 그리고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우리 삶 전반에 하느님이 직접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은총과 자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 각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시는 성모님께서 이제는 우리에게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굳게 믿으라고, 회개하라고, 보속하라고, 평화를 살라고 불러주신 것이 그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이고, 그래서 우리가 먼저 성모님께 “어머니, 특별히 저를 구원의 길로 불러주시고 인도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씀하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성모님께서 “어린 자녀들아, 특별히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신있게 “나는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성모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걸까요? 물론 성모님의 부름에 대해 완벽하게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당신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작은 응답과 노력도 대견하게 여기시고, 앞으로 더욱더 부름에 잘 응답하도록 독려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너희가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끈기 있게 기도하게 될 새로운 시간들을 위해 너희를 준비시키고 있다.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를 통해 일하시고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르지만 성모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새로운 시간들을 위해 너희를 준비시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새로운 시간들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르고, 성모님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굳건한 믿음과 끈기 있는 기도라는 것은 가르쳐주십니다. 만일 다른 것이 필요했으면 그것을 강조하시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준비시켜주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굳건한 믿음과 끈기 있는 기도입니다. 루카 복음 18장 1절에서8절까지에 나오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묵상해보면 왜 굳건한 믿음과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한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 마지막에 약간은 맥락에서 어긋난 듯한 말씀으로 그 비유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 8) 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려주신 비유 끝에 당신의 재림과 그 시기의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아 믿음을 잃어버릴 것을 내다보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을 때 기도하지 않게 되고, 기도하지 않게 되면 당연히 믿음은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과 기도, 특별히 굳건한 믿음과 끈기 있는 기도는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과 끈기 있는 기도는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우리가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믿음을 굳건하게 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간들이 왔을 때 우리는 굳건하게 믿지 못하고, 끈기 있게 기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비무환 有備無患 입니다. 준비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영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화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믿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잘 훈련시키고 준비합시다.
   매일 같이 기도하던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어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모님과 함께 매일 같이 기도하던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온 교회와 함께 기도하면 성령께서  제2의 강림을 하실 것이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며 우리를 통해 온 땅의 얼굴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마치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사도들을 예수님 부활의 용감한 증인들이 되게 하고, 그들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져 하느님 나라 도래의 시작이 알려지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사탄이 전쟁과 증오를 원할지라도, 나는 가장 귀한 선물인 평화를 위해 너희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 5-6)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도 평화의 사도, 평화의 전달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시면서(루카 19, 42-43 참조) 이름 자체로도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당신을 통해 오는 하느님의 평화를 거부한 것을 대단히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루살렘 갈바리아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열 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금 그들을 평화의 사도로 파견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다음과 같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평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 14-17)
“평화, 평화, 오직 평화만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은 메주고리예 발현 세 번째 날인 1981년 6월 26일 평화의 모후 성모님께서 발현목격증인 마리야 파블로비치를 통해 세상에 주신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명을 받아 평화의 모후로 이 세상에 오신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평화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사탄은 전쟁과 증오를 원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이고, 이것들은 오직 하느님을 굳건히 믿고, 그분께 끈기 있게 기도할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위해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나의 손이 되어주고 하느님과 함께 자랑스럽게 가거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가 작음과 단순함 그리고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 자신도 본인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셨고, 일생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명을 받아 평화의 사도로 이 세상에 오고 계시고, 우리 역시 당신의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도는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메시지로 교육되고 자라나 성모님의 사도로서 그분의 연장된 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대신하는 사람, 즉 우리가 성모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메시지가 들려지고, 그들이 당신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기를 바라십니다. 
   미사 끝 파견시 사제는 보통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 외에 세 가지 또 다른 표현이 있는데 그 중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미사 때 영성체를 통해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십니다. 그러므로 미사가 끝나고 우리는 혼자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성당을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직장, 학교, 교회, 그리고 세상 안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지만, 특별히 성체성사의 하느님이며,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힘으로 당신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를 마치고 어디를 가든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 성체성사의 주님과 함께 가고, 그 힘으로 살아가고, 그 힘으로, 아니 주님 자신께서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마지막 말씀이 이를 우리에게 확증시켜 줍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 나가게 하셨다. 아멘.”(마르 16, 20) 성모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자랑스럽게 가거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2019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가르치며 회개의 길로 너희를 인도할 수 있도록 자비로이 허락하셨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를 위해, 또 너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구원 계획을 위하여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도록, 너희는 모두 부름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고 너희의 공로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러므로 하느님 손에 가치있는 도구들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가르치며 회개의 길로 너희를 인도할 수 있도록 자비로이 허락하셨다.

자비(慈悲)는 '사랑하고(慈) 불쌍히(悲)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비의 라틴어 ‘misericordia’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한자어 의미가 더 풍부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자비를 베푸십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지니셨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실 때 바로 그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가르치며 회개의 길로 너희를 인도할 수 있도록 자비로이 허락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자비로이’ 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성모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고, 우리를 가르치며 회개의 길로 인도하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과 메시지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지 그 마음을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로 우리에게 성모님을 보내주시고,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또 그분의 자비가 헛되지 않도록 성모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회개의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를 위해, 또 너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구원 계획을 위하여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도록, 너희는 모두 부름을 받고 있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한 뱀, 즉 사탄에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 15)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비록 직접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여자와 그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리아와 예수님을 이미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천지창조 처음부터, 구세사의 처음 시작부터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참여와 협력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원칙은 구약과 신약에서도 계속 이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홀로 하실 수 있지만 여전히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참여와 협력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가르치고 회개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구원 계획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감히 우리가 무엇인데 하느님 구원 계획이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한 가족입니다. 가족은 모든 면에서 함께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하느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함께 이루는 가족 전체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그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그 일에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시고, 함께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도록 우리가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하나되어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기도만이 필요합니다. 그외 다른 것이 필요했다면 성모님은 그것을 언급하시면서 온 마음을 다해 실천에 옮겨달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도록 부름받고 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계획이나 말, 능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도록 우리는 겸손되이 기도로 함께 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인생은 짧고 너희의 공로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러므로 하느님 손에 가치있는 도구들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아주 어린 시절도 마치 어제처럼 느껴집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뭔가 많은 것을 한 것같은데 막상 돌이켜보면 별로 한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나마 뭔가를 이루어 놓았다 하더라도 짦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다음 세상으로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현명하다면 이제라도 우리 인생이 짧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들, 즉 기도, 단식, 자선 같이 성스러운 일들로 우리의 짧은 인생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천사들의 손을 거쳐 우리가 하늘에 쌓을 수 있는 공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모르게 하늘에 쌓여진 그와 같은 공로가 있다면 그에 비례하여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는 영원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 덧붙여서 하느님마저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삶은 지나가는 삶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더 짧으며, 자신들들은 그저 나그네 혹은 순례자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열어주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그에 참여하기를 늘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삶은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끝도 없는 삶이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행복과 안식이 있는 삶입니다.
   이 영원한 내세의 삶, 즉 천국에서의 삶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 동안 그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말입니다. 또 우라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인류 구원 계획을 위해 그분의 도구로 쓰여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셨다면 그것처럼 영광스럽고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1987년 1월 25일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손에 가치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오늘부터 새 삶을 살기 시작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싶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의 위대한 계획에 사용하시기 위해, 너희 각자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하느님의 계획에서 너희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지 너희는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러므로 기도하여라. 기도하면서, 너희와 함께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계획을 온전히 다 이룰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1987년 1월 25일)

   
 
 
2019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다. 어린 자녀들아, 미움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너희 안에서, 또 너희 주변에서 지배하도록 용납하지 마라.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사랑과 기도가 되라고 부름받고 있다. 악마는 평화 부재와 무질서를 원하지만 어린 자녀들아, 너희 각자를 위해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이 되어라. 그분께서 너희에게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죽음을 이기셨다. 너희가 그분 안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자랑스럽게 여겨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다. 어린 자녀들아, 미움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너희 안에서, 또 너희 주변에서 지배하도록 용납하지 마라.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사랑과 기도가 되라고 부름받고 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 45 참조)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이들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기에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도록 명하셨습니다. 
   “지금은 은총의 때이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 그 하느님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그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이 때에, 이를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 악마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미움, 불안, 두려움, 의심 등의 씨앗을 뿌려 우리 마음에서 사랑과 평화를 앗아가고자 합니다. 그는 우리 마음이 닫혀 우리를 향해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을 수 없게 만들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미움, 불안, 두려움, 의심 같은 것이 느껴지면 그 뒤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히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사탄도 우리가 ‘예’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에 미움, 불안, 두려움, 의심 같은 것이 느껴지만 마음 속으로, 혹은 소리 내어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아, 나는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분께 속한 사람이다. 나에게서 멀리 떠나 예수님의 발 밑으로 가거라.” 혹은 1884년 10월 13일 사탄의 환시를 보신 후 교황 레오 13세께서 직접 작성하신 기도문인 성 미카엘 대천사에게 드리는 기도를 바쳐도 좋습니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 
그리고 천상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키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미움 그리고 평화 부재의 바람이 너희 안에서, 또 너희 주변에서 지배하도록 용납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또 우리 주변에 설령  미움과 평화 부재가 있다하더라도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영향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고, 우리가 천상의 힘을 빌어 그 뒤에 있는 사탄까지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사랑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랑과 기도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이 되고 기도가 되려면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기도해야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기도해야 우리 자신이 사랑과 기도 그 자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악마는 평화 부재와 무질서를 원하지만 어린 자녀들아, 너희 각자를 위해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이 되어라. 그분께서 너희에게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죽음을 이기셨다. 너희가 그분 안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자랑스럽게 여겨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악마는 우리가 평화와 질서 속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는 이미 천지창조 때부터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갔고, 무질서를 불러 들였습니다. 거짓말로 교만을 부추키고, 하느님께 반역하여 죄를 짓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만들어주신 평화와 질서를 무너뜨렸고, 영원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악마가 ‘처음부터 살인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요한 8,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악마는 여전히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우리 가운데서 평화를 앗아가고, 우리 안에 있는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바로 잡아주시어 우리를 새로운 질서 안에 살게 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 19 참조)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시면서 여전히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리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우리는 오직 그분께만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치셨으며,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에게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못박았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로마 6, 3-8 참조)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감사하고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지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은 지나가고 있고, 내세에 이어질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눈은 언제나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고, 우리에게는 그분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2019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다. 자연이 새 생명을 위해 자신을 새롭게 하듯이, 너희 또한 회개하라고 부름받고 있다. 하느님을 위해 결심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공허하고 기쁨이 없다. 그러므로 기도가 너희의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자연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말하고 그를 위해 싸우기 때문에 너희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자연 속에서 찾아라. 어린 자녀들아, 너희에게 평화가 없고, 너희가 너희 이웃 안에서 형제를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들과 나라들 안에서 전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다. 자연이 새 생명을 위해 자신을 새롭게 하듯이, 너희 또한 회개하라고 부름받고 있다. 하느님을 위해 결심하여라. 

‘지금은 은총의 때’라는 표현을 통해 여전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구원을 염려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총의 때를 허락하시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 완전하고 그분 마음에 들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재 우리 인류가 그 죄 때문에 멸망의 길을 가고 계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총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은 모든 인류가 죄에서 회개하여 새 생명을 얻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은총의 때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하느님과 성모님만이 아십니다. 이 은총의 시간이 끝나는 때는 오늘 당장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총의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그 자비하신 사랑을 알아듣고, 성모님 요청대로 회개하라는 부름에 지체없이 응답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공허하고 기쁨이 없다. 그러므로 기도가 너희의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인간의 마음은 물질이나 세상적인 것으로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를 지닌 유명 인사들이 마약과 섹스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많이 가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마음이 공허하고 참된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를 채울 목적으로 마약이나 과도한 음주 그리고 불법적인 섹스에 탐닉하다가 그 악행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 기계 문명으로 인해 비행기, 차, 컴퓨터, 텔레비젼, 스마트폰 등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채워 줄 수 있는 그 어떤 기계나 기구를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참 기쁨으로 가득채워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에 쏟았던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하느님을 자신의 마음 안에 모셔드리는데 써야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너희의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오직 기도만이 하느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기도에 얼마나 크게 매진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아니 삶 전체가 기도가 되어야 하니 기도에 올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말하고 그를 위해 싸우기 때문에 너희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자연 속에서 찾아라.

자연은 절대로 그 어떤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자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대로의 생명을 묵묵히 살아내기 위해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자신을 맞추어 나갑니다. 예컨대 나무가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그것이 끝나면 모든 나뭇잎을 떨구고 빈 가지들로 가득한 채 겨울을 납니다. 살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을 모두 버리고 봄을 기다리며 겨울 추위와 사투하는 나무의 모습이 전형적인 자연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말하고 싸우는 모습,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삶의 방식에 전형적으로 순응하고 그에 따르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좋은 모범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에게 평화가 없고, 너희가 너희 이웃 안에서 형제를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들과 나라들 안에서 전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기도에로 돌아오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어떤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새벽이 오느냐?” 한 제자가 답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밤이 지나고 나면 새벽이 옵니다.” 스승은 틀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가 “밤이 지나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뜰 때 새벽이 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도저히 다른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자신들은 모르겠으니 스승이 답을 해주시도록 청했습니다.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새벽은 밤이 지나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뜰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너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희의 형제로 보일 때 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 8)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귀하고, 한 가족 한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이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 사랑의 눈으로 우리 이웃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형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기도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이웃에 대한 미움을 몰아내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 많은 총성 없는 전쟁은 멈추게 될 것이고, 나라들 사이의 전쟁도 없게 될 것입니다.

   
 
 
2019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새 생명으로 부르고 있다.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은총의 때에 너희를 자연과 같이 변모시켜 주실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천국과 천상의 것들에 너희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해 사랑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새 생명으로 부르고 있다.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은총의 때에 너희를 자연과 같이 변모시켜 주실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예전에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 함의가 느껴집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성모님은 지금 우리 각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내가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지레 도전정신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록 지금 우리 자신이 생각할 때 나이가 많아 무슨 변화를 꾀할 수 있을지 걱정하거나 스스로 자포자기하지 말고 새 생명으로 부르시는 성모님의 부름에 응답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희망을 가지고 영적으로 더욱 정진하려고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우리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자기 고집이 세지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자기 주장과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자기 말만 하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내가 더 오래 살았고, 경험도 많고 지혜로우니 내 의견이 항상 옳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완고함은 그보다 젊은 세대에게 그렇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나이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계급장으로 인식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개방된 자세로 자신을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경청하고, 자신이 여전히 더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겸손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모님 앞에서 우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 눈에 우리는 늘 사랑스럽지만 어리기만한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나이를 의식해서 완고해져서는 안 됩니다. 완고함은 우리의 마음을 성모님과 예수님께 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의 생각, 의견, 판단에 갇혀 있으면 요한 복음에 나오는 완고한 유다인들처럼 되고 맙니다. 예컨대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완고한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끝내는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 3) 우리는 나이를 얼마를 먹었는지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로 늘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유치함이 아니라 순수함과 수용성을 우리의 것으로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처럼 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를 결코 어린이처럼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은총의 때에 너희를 자연과 같이 변모시켜주실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천국과 천상의 것들에 너희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을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물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겠지만 그는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꼈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오신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곧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주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과 온 인류가 새 생명을 받았다는 것 역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 7-11)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주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우리의 마음을 열었을 때를 전제로 말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체험한 사람은 이 지상에 살고 있으되 이미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으나 그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은 늘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하며 이미 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 1-2)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해 사랑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분이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칭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예”로 순명하셨습니다. 성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계획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고,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잉태 예고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늘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해 사랑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신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 1981년 6월 24일 옛 유고슬라비오 연방, 현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작은 마을인 메주고리예에서 발현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그러한 하느님의 명에 따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메주고리예에서 발현하고 계십니다. 발현이 언제까지 진행될 것인지는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고, 그분께서 성모님에게 발현을 멈추라고 하시는 때가 되면 성모님은 그 명령에 순종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 사랑의 사도로 메주고리예에 파견하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그 자체가 우리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가시적인 표징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성모님을 통해 기도, 회개, 믿음, 보속, 평화의 메시지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응답합시다. 



   
 
 
2019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너희의 삶은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있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하느님과 너희의 만남의 체험을, 너희는 사랑으로 증거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 

성녀 모니카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29년 동안 끊임없이 기도했고, 눈물과 희생으로 가득한 그녀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사제, 주교, 그리고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였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던 것이고, 아들의 회개를 넘어서 그 아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 육신의 어머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속속들이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우리를 회개로 부른다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조차도 성모님께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고 하실 때 바로 그 ‘너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느 누구도 회개하라는 어머니의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죄와 잘못 그리고 오류 속에 살면서도 그를 인지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혹은 죄에 대한 정당화나 합리화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를 죄와 악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 생명과 구원을 얻도록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르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회개하라는 어머니의 부르심은 바로 그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지만 분별력이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의 지도와 인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다 큰 것같아도 성모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어린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모님의 지도와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우리를 위한 때라고 인식할 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먼저 깨닫게 됩니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이 시간을 잘 활용하여 진정으로 우리를 위한 때가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침묵과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침묵이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까? 침묵이야말로 기도의 산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침묵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너무 시끄러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리가 아닌 수많은 세상의 소리와 그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사탄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마음이 점점 없어지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데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또 너무 많은 말을 하느라 마음의 침묵을 지킬 틈도 부족하고, 기도할 시간도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말은 많이 하지만 기도하지는 않는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기로 결심하여라.”(1993년 12월 25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침묵과 기도를 생활화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러므로, 너희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너희의 삶은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서도 가장 큰 사랑인 하느님의 사랑이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온기를 넘어서 불꽃처럼 타오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만이 하느님을 바라고, 그분을 믿게 됩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 희망과 신앙이 낟알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다면 그 온기로 낟알은 싹이 트고 자라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에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에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는 것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 하느님께 바라고 믿는 사람, 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속아내어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간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삶은 질서가 잡히고, 작은 것 하나에도 성실하게 또 책임감있게 대하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하느님과 너희의 만남의 체험을, 너희는 사랑으로 증거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불타는 사람, 하느님만 바라고 믿는 사람, 매일매일 기도에 갈증을 느끼고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집이 이 지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나그네처럼 살 수 있습니다. 또 이 지상의 것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처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오직 하느님만 변치 않으신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오직 하느님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점점 더 하느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 만남의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다른 이들 역시 그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분 가까이 가도록 만드는 참사랑을 실천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 성모님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떻습니까? 늘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분 메시지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고 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안타까움을 느낍니까?
   옛 격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도록 성모님께 ‘예’하고 응답합시다. 성모님께 우리 자신은 온전히 의탁하고, 성모님의 메시지 대로 살려고 노력합시다. 지금이라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을 ‘예’라고 말씀드립시다. 지금은 우리를 위한 때이지만 이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때가 다 지난 후 아무리 수천만번 ‘예’라고 해도 그 때는 늦을 것입니다. 

   
 
 
2018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평화가 너희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현존은 사랑의 표징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평화가 너희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어라.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연히 그곳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8 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인구 300명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셨을까요? 마리아의 배우자이자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받은 다윗의 자손 요셉의 고향이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빵의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정체성과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빵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보여주셨고,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같이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따라서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의 탄생에는 이미 성체성사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잠재적인 형태로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빵이 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십자가 죽음에서  평화를 이룩하신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 14-17)
   메주고리예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다시 모셔다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십니다. 특별히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한 한 많이 매일 미사에 참례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 앞으로 나아가 그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때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의 집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 38년 6개월 동안 4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순례하고, 성모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지만, 성모님의 그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예수님께 열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제 12, 2) 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셔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을 예수님께 활짝 열어 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늘 흘러 넘치도록 온전히 의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평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직까지 그분의 평화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특별히 우리 주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연장된 당신의 손, 당신의 사도가 되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고 산다면, 우리는 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쁨이 바로 평화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얼굴은 밝고 웃음으로 가득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저절로 그 기쁨에 전염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먼저 섬기려고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예수님의 평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평화의 전제조건이고, 기쁨은 평화의 열매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현존은 사랑의 표징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늘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역시 우리에 함께 계십니다. 더군다나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착하신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인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어 그를 증명해주고 계십니다. 
   성모님 사랑의 표징인 메주고리예에서의 그분의 현존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자체가 바로 어머니의 집이고, 어머니 마을입니다. 즉 그곳은 우리의 집이고, 우리의 고향 마을입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모님의 현존,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다시금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게중에 어떤 사람들은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와서도 아무런 감흥이나 삶의 변화도 없고,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 그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은 순례가 아니라 관광 차원에서 메주고리예 성지 관광을 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이끄시는 기도의 학교에 가서 기도하기 보다는 관광객들처럼 인간적인 편의를 구하고 뭔가 자극적인 것, 예를 들면 태양이 도는 것을 맨눈으로 보거나 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에서 태양이 회전하거나 색깔이 바뀌는 초자연적 기적이 보여지는 것은 예수님의 성체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81년 6월 24일 이래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까지 성모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사, 묵주기도, 성체조배, 성시간, 십자가의 길, 성경 봉독, 고해성사 등, 메주고리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기도이고, 기도로 끝이 납니다. 특별히 메주고리예 순례의 핵심은 하절기(5월~8월)에는 오후 6시, 동절기(9월~4월)에는 오후 5시부터 메주고리예 야고보 성당에서 본당 신자들과 모든 순례자들이 함께 모여 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들의 인도에 따라 미사 전 10단의 묵주기도, 크로아티아어 국제 미사, 미사 후 5단의 묵주기도, 치유의 기도, 그리고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미사 후 밤에 거행되는 성시간으로 이어지는 3시간의 매일 저녁 기도 프로그램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오전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고, 발현산과 십자가산을 오르면서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각종 영적 체험담과 강의를 듣고, 개인 기도를 바치며 메주고리예 순례를 하게 되면 기도의 바다에서 하루 종일 헤엄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순례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고 회개 체험을 하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이 목적이라면 절대로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도가 목적이라면 반드시 그곳에 순례를 가봐야 합니다. 자신들의 기량을 더 향상시키고, 다음 경기들을 준비하기 위해 전지 훈련을 떠나는 운동선수들처럼 기도의 선수가 되기 위해 기도하는 메주고리예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빛을 보고 싶으면 관광을 가야 하고, 기도하는 중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싶으면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극대화시켜주는 순례가 바로 메주고리예 순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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