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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과 기도의 때이고, 기다리며 주는 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 위에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너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과 가정을 열어라. 그러면 이 기다림은 기도와 사랑, 그리고 특별히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그 열매들이 멀리서 보이고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너희를 격려한다. 그 때문에 원수가 화를 내고, 너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모든 것을 사용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과 기도의 때이고, 기다리며 주는 때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교회 전례력에 의하면 오늘이 2018년 마지막 주가 됩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 전례력의 가장 끝에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가 바로 그 역사의 완성이며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간다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국에는 당신 안에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대축일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안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우주의 왕, 정의로운 심판관, 우리의 구원자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한 그분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실천하고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2019년 대림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림절 역시 은총과 기도의 때이지만, 동시에 성모님 말씀처럼 기다리며 주는 때입니다. 대림절은 이미 천지 창조 바로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난 후 하느님께서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에게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전례력에 의해 거행되는 대림절은 아니지만 바로 이때부터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은 시작된 것입니다. 
   동정녀를 통해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천년 전에 복되신 동정녀이신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모님 역시 대림절의 여인이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 동정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또 부모님에게서 배우신 대로 매일같이 두 팔을 하늘로 펼쳐 올리고 메시아,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낳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께 드렸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직접 하셨던 성모님께서 지금은 기다리며 주는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시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신뢰하며 늘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희생과 봉헌을 원하시면 기꺼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 위에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너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과 가정을 열어라. 그러면 이 기다림은 기도와 사랑, 그리고 특별히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육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우리가 믿고 체험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고, 지금도 매일 같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 계십니다. 특별히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매일 우리를 찾아오시고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 전체를 우리에게 매일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랑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아니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으로 들어가 넘쳐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이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차 늘 그 안에 당신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할 때, 우리 가족 구성원들 모두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으며, 다른 가정들에게 좋은 영향을 던져주는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가정을 하느님의 사랑에 열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과 가정에 들어오기 위해 우리 마음과 가정을 열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저절로 열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과 가정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시도록 끊임없이 개인 기도, 가정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과 가정은 열리지 않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을 동반한 끊임없는 기도만이 오직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 기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 우리 가정 전체를 하느님께 선물로 드리려는 자세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그 열매들이 멀리서 보이고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너희를 격려한다. 

성모님께서는 “그 열매들이 멀리서 보이고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너희를 격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지의 맥락을 살펴볼 때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이란 ‘기도’를 의미합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 비록 우리 눈에 아주 작아 보일지라도 그 열매가 맺어지고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기도를 할 수 있지만, 그 열매까지 스스로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그 기도의 열매를 맺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우리의 지향이 순수하고 선하며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언제,, 어떻게 어떤 크기로 맺게 될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 눈에 우리 기도의 열매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실망해서는 안 되고, 기도하기를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기도는 오랜 기다림의 작업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끊임없는 확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기도는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바쳐지는 순간 바로 하느님께 전달됩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기도 하나 예외없이 하느님은 모두 다 듣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에 잠시 스쳐가는 기도까지도 하느님은 놓치는 법 없이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우리의 뜻과 시간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시간에 맞추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그분의 손에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 때문에 원수가 화를 내고, 너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모든 것을 사용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사탄은 또한 우리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성모님께서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시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또 기도를 포기하려고 했다가 성모님의 격려를 받고 다시 기도를 시작한 사람들 때문에 사탄은 화가 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탄은 들어갈 자리가 없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으로 강해지기 때문에 사탄은 그 사람에게 점점 더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은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합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들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마다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각 사람이 가장 쉽게 빠져들 수 있고,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게 할 수 있도록 그런 도구를 쓸 것입니다. 텔레비젼, 영화, 드라마, 인터넷, 컴퓨터 게임, 도박, 마약, 술, 유흥, 쇼핑, 관광, 포르노, 문란한 성생활, 쓸데없는 대화나 수다, 탐욕, 교만, 게으름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우리가 마음과 시간을 쉽게 빼앗기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탄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여 우리를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먼저 포기하고, 그 자리에 대신 기도를 넣어야 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만일 그것이 우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모님과 사탄 사이, 그리고 성모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사탄 사이에 큰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시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2018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들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큰 은총을 지니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너희와 미래 세대들를 위한 회개의 때, 그리고 부름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너희의 마음을 내 아들 예수님께 열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사랑하며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들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큰 은총을 지니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너희와 미래 세대들을 위한 회개의 때, 그리고 부름이다.

성모님께서는 천상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서 메주고리예에 발현하고 계십니다. 비록 1981년부터 발현을 시작하셨지만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주신 것은 1984년 3월 1일부터 였습니다. 그때부터 발현목격증인 마리야 파블로비치 루네티를 통해서 1987년 1월 8일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에 메시지를 주셨고, 1987년 1월 25일부터 현재까지 한달에 한 번씩 매월 25일에 주고 계십니다. 또한 2004년 12월 2일부터 현재 매월 2일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 드라기체비치 솔도에게 발현하실 때에도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년 3월 18일 미리야나, 6월 25일 이반카 이반코비치 엘레즈 그리고 12월 25일 야콥 촐로에게 있는 연간 발현과 발현산에서 이반 드레기체비치에게 있는 특별 공개 발현에서 성모님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이 메시지들이 모두 중요하고, 의미있지만 이 가운데 매월 25일 마리야를 통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모님의 메시시가 공식적인 메시지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의 예언자로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곧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각종 공적 계시들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말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공적 계시는 사도 요한의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이유는 공적 계시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다 해주셨는데 우리가 그 말씀들을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적 계시로 분류되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공적 계시의 내용을 다시 실천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메시지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공적 계시의 내용을 뛰어 넘는 새로운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통해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고, 굳게 믿으며, 보속과 단식으로 희생할 것을 메시지 전반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 공적 계시에서 주어진 메시지들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알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다시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성모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고자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었거나 잠들어 있는 우리를 다시 잠에서 깨우고 생명으로 불러 일으키고자 우리에게 수많은 메시지들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불러주시기 위해 지난 37년 4개월 동안 수많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메시지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깊이 묵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메시지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염려하시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감사를 드리면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실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큰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컨대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너희의 하루를 짧고 열렬한 기도로 가득 채워라.”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매일같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면 분명 우리는 회개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깊어지며,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온 몸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너희와 미래 세대들을 위한 회개의 때, 그리고 부름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모님을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런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 발현은 그 끝이 있습니다. 메주고리예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 이반카, 야콥은 열 가지 비밀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매일 발현은 끝이 났습니다. 지금도 성모님의 발현을 매일 목격하고 있는 비츠카, 마리야, 이반은 각각 아홉 번째 비밀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그들 모두가 마지막 열 번째 비밀을 받게 되면 그들의 매일 발현도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 지상에서 성모님의 발현은 끝나게 되고, 현재 50대 초, 중반에 접어든 발현목격증인들은 그들의 생전에 그 비밀들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성모님 메시지대로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우리와 우리 미래 세대들을 위한 회개의 때이며, 큰 부르심입니다. 회개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성모님의 메시지에 응답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뒤늦게 깨닫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 다음 기회나 장소가 아니라 여기 이 자리에서 기도하고, 회개하여 다가올 미래와 구원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너희의 마음을 내 아들 예수님께 열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사랑하며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들을 더 많은 기도로 지내라고 촉구하십니다. 현재 우리 자신 스스로 생각할 때 많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많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양의 기도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기도에 더하여 더 많은 기도를 바쳐야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기회가 닿는 대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나 더 큰 집이나 더 좋은 차가 아닙니다. 더 많은 기도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열고, 더 활짝 열리게 하여 예수님이 들어오시어 우리 마음에 사시면서 우리 마음과 삶을 다스리시도록 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바랄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의 유일한 사랑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과 하나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20)


   
 
 
2018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 역시 너희에게 주는 열매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너희는 또한 내가 옴으로써, 풍성한 선물과 열매들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늦지 않았다. 거룩함을 선택하고, 은총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하여라. 너희가 그분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백배로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 역시 너희에게 주는 열매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너희는 또한 내가 옴으로써, 풍성한 선물과 열매들을 받고 있다.

이제 추수와 수확의 계절입니다. 이 계절에 우리는 각종 과일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합니다. 열매들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고, 우리 몸에 각종 영양소와 신선함을 제공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입니다. 그러나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그를 넘어서서 “자연 역시 너희에게 주는 열매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자연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까요? 자연이 어떻게 자신이 맺는 열매들을 우리에게 주면서 그를 통해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먼저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기본 환경을 우선 최적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만드신 다음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 안에서 어떤 것이 기본 양식이 되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 29)  자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은 인간을 위한 양식으로 주어지도록 하느님께서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자연은 그러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열매들을 맺고, 그 열매들을 인간에게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에 충실하고, 인간을 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열매들을 내어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주는 자연과 그 자연이 맺는 열매들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연은 자신이 맺는 열매들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며 동시에 인간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을 기꺼이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자신이 맺는 모든 열매들을 인간에게 사랑으로 내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인류,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영원한 생명의 문을 다시 열어주실 인류의 구세주와 그 구세주의 어머니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완전한 피조물인 마리아를 창조하시고, 그 마리아를 통해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으며, 그분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그러나 2천년 이상이 지난 그 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그분을 믿지 않으며 멸망의 길을 가고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마리아를 다시금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계속되고 있는 성모님의 오심, 즉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다시금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이미 수 천만의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다녀가고, 성모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엄청난 회개와 신앙의 열매들이 맺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지금도 메주고리예를 통해 계속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시어 당신의 메시지들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늦지 않았다. 거룩함을 선택하고, 은총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하여라. 너희가 그분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백배로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며 수많은 메시지들을 주시면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믿음을 지니고, 보속하며 평화를 살라고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매번 메시지 끝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곧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응답임을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예언자로 오시는 분이기에 성모님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말씀이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아직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설령 한때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옛 생활로 돌아간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성모님은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 9-10)고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하셨던 말씀을 우리도 듣기 위해 성모님의 부르심에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응답과 그 응답에 따른 효과에 대해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거룩함을 선택하고, 은총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하여라. 너희가 그분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백배로 주실 것이다.”


   
 
 
2018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시기이다.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말은 적게 하며 하느님께서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해 드려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시기이다.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말은 적게 하며 하느님께서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해 드려라.

‘지금은 은총의 시기’라는 성모님의 말씀에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그 멸망을 예고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복음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 41-44)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렸을까요? 하느님이 주신 그 은총의 시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예언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시기가 얼마만큼 지속될 지 오직 하느님과 성모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은총의 시간을 주신 하느님과 이를 일깨워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후 우리에게 왜 지금과 같은 은총의 시기가 주어졌는지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묵상을 바탕으로 이  은총의 시기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총의 시기는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평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준비를 위해 마련된 이 은총의 시기를 우리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그 길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말은 적게 하며 하느님께서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해 드려라.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린 자녀’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른의 도움과 보호를 절실히 요청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도움과 보호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도움과 보호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의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탄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그분 자녀로서의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속한 가정의 아버지이시고 중심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분과 소통하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마음과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그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적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기도하는 분위기만 잡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각자의 하루 생활 여건이 다르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최대한 많은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서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 없이,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여서는 안 되고, 마음을 담아, 마음을 다해 바치는 기도여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말을 적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관계를 해나가기 위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말들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합니다. 시간 허비도 문제지만 말을 많이 하다보면  쉽게 남의 험담도 하고 말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 3, 2-10)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질 때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은 먹고 마시고 말하는 것에 앞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찬미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기도는 하도록 만들어졌고, 그를 위해 우선적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제 하느님 없는 나 자신이나 타인 그리고 세상의 것들을 말하기 위해 우리의 입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그 방향을 기도에로 돌립시다. 우리의 입과 마음, 우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맨첫자리를 그분께 내어 드립시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라고 한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하느님은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끄실 수 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해드리는 그 시작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일생에 걸친 긴 작업이기에 매일 매일, 아니 우리의 일생 내내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 3)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기에 당신의 어린 자녀들인 우리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자녀들 곁에 육신의 어머니가 늘 함께 있고자 하는 것처럼 성모님 역시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시고, 실제로 함께 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가 어머니가 곁에 있으면 안심하고 편안해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성모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껴야 합니다. 
   모성애의 상징은 헌신입니다.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희생하며 자녀를 돌봅니다. 바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목숨을 자신의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어머니, 그녀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 그 어머니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2018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너희의 힘이시기 때문에 너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내가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악에 대한 피난처이시고, 그 모든 악은 숨어서, 너희 모두가 부름 받은 은총과 기쁨으로부터 영혼들을 아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살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들이 너희가 가는 길에 빛이 되기를 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너희의 힘이시기 때문에 너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내가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 달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은 메주고리예 발현의 참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다시 한번 밝혀주고 계십니다. 당신이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고, 당신 스스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을 부르시어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잊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성모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잘 따르셨으며, 지금도 역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들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안에 자신을 완전히 녹여 놓으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시는 분입니다.  성모님께는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님, 유일한 사랑이시고, 그분만이 전부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메아리입니다. 우리가 “성모님”하고 부르면, 성모님은 “하느님”으로 대답하십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크신 힘을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당신의 몸에 잉태하신 경험이 있기에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라고 노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시고, 그분을 따르면서 당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의 힘을 수없이 체험하셨고, 그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인간 스스로 자신의 힘이 가장 세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교만에 빠져 있는 이 위험한 시기에 말입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인류의 정신을 다시 깨우쳐주시기 위해 성모님은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이 무서운 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약을 주러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세상에 오고 계십니다. 바로 그 약은 기도와 의탁입니다.  “그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내가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악에 대한 피난처이시고, 그 모든 악은 숨어서, 너희 모두가 부름 받은 은총과 기쁨으로부터 영혼들을 아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대단히 교활합니다.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움직입니다. 그렇기에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행하는 모든 악은 사람들 마음 안에 교묘히 스며들어 옵니다. 우리의 시간과 돈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재미들만 찾는데 쓰게 하고, 우리의 삶과 마음을 하느님과 영적인 것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과 영혼에 심어주신 은총과 기쁨을 앗아갑니다. 그보다 한발짝 더 나아가 심한 경우에는 숱한 죄를 짓고 살면서도 자신이 죄를 짓고 사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분만이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고, 그분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피난처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슬러 일어났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물살이 우리를 뒤덮고 급류가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거품 뿜는 물살이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우리를 저들 이빨의 먹이로 내주지 않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의 도우심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 124)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살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다.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은 메주고리예에 머물렀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다시 그곳으로 순례 가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영적인 체험, 즉 천국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메주고리예는 하늘이 열려 천국과 맞닿아 있는 곳’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매일 오전 모국어 미사와 크로아티아어 저녁 국제 미사 그리고 15단의 공동 묵주기도,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저녁 성시간과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절, 발현산을 오르며 바치는 묵주기도, 십자가산을 오르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 고해성사 그외 개인 기도와 묵상, 그리고 각종 영적 증언과 강연 등을 통해 순례자들은 메주고리예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함으로써 이 지상에서 천국의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도움과 현존을 피부 깊숙이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누구나 기회가 되면, 아니 꼭 기회를 만들어서 직접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 체험을 해보면,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살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다.”고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지 못한다면, 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메주고리예 직접 순례와 비교하여 그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처해 있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메주고리예의 정신을 직접 실천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매일 적어도 묵주기도 20단씩 바치며, 가능한 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매일 성경을 읽고 희생을 바치면서 적어도 매월 한번씩 고해성사를 본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에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이 너희가 가는 길에 빛이 되기를 빈다. 

 요즘 차를 운전하고 어디를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GPS 지피에스 입니다. 물론 잘 아는 길은 GPS가 필요없겠지만 모르는 길을 찾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그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하여 많은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GPS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삶의 지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들은 멸망과 어둠의 길을 갔고, 그 반대로 그 계명들을 잘 지켰을 때는 빛 속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요약되는 하느님의 계명들은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그래도 적용되는 말씀이고,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추어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에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가는 길,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품에 안거나 업거나 혹은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갑니다. 그렇듯이 성모님은 당신의 어린 자녀들인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거나 당신의 등에 업거나 아니면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또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구원에로 이끌어주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모성애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 모성애의 깊이가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이다. 고맙다.”(2009년 3월 18일 미리야나에게 주신 성모님 메시지 중에서)

   
 
 
2018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날은 너희 각자를 위해, 회개하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을 위해,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날이다. 어린 자녀들아,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 모두를 사랑하시며,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통해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내 아들이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날은 너희 각자를 위해, 회개하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을 위해,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날이다.

오늘은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3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이 날이 우리 각자를 위해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주신 하느님께,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당신의 품에 우리를 맡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믿어주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정이 물씬 느껴집니다. 그리고 “너희 각자를 위해”라는 표현을 통해 성모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와 맺고 계시는 성모님의 관계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친밀한가를 쉽게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표현입니다.
   그런 다음 “회개하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하고 성모님 메시지를 받아들여 기도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한 이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길을 가던 어떤 자녀가 회개하여 거룩한 삶을 살면서 구원의 길을 간다면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육신의 어머니에게도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기쁨일텐데 하물며 우리의 영적 어머니,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는 오죽하겠습니까? 그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일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은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루카 15, 11-32  참조) 때문에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 곧 죄인들의 멸망을 바라지 않고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천상 아버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이렇게 당신 자녀들 때문에 주님께 감사드리시는 성모님께 우리도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를 잊지 않고 염려하시는 어머니께 감사드립시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고 온전히 하느님께만 향함으로써 우리가 회개했다는 것을 성모님께 보여드립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들을 받아들여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함으로써 매일 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어머니께 직접 보여드립시다. 또 우리에게 평화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영적인 교사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계속 보내주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시다. 

어린 자녀들아,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 모두를 사랑하시며,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통해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딸 성모님을 당신 자비와 사랑의 사절로서 37년간 메주고리예로 보내주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성모님의 메주고리예 발현 자체가 우리에 대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큰 표징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가 멸망의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여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에서 드러난 당신의 그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일깨워주시기 위해 성모님을 계속 보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런 분이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계속해서 성모님을 메주고리예에 보내주고 계시니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 16)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언제나 기뻐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내 아들이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 20, 35 참조) 우리는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속성상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기 보다 먼저 주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아니 가장 소중한 분을 주십니다. 바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 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 삶에 평화가 없다면, 성모님께 먼저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참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그리고 성모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분의 메시지대로 살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2018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없는 이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께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너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들에 너희 마음을 열고, 너희가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을 주신 내 아들 예수님을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흠숭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를 그 영원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신다. 너희의 희망이 매일의 삶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만나는 기쁨이 되기를 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니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없는 이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께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잔치에 초대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게 되었습니다. (요한 2, 1-11 참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7일 동안 열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포도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기쁨을 느끼고, 잔치의 흥은 더해 갈 수 있었습니다. 잔치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 포도주가 떨어져서 없다는 것은 잔치의 흥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된 성모님께서는 신랑집 혼주보다 먼저 잔치 도중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잔치에 포도주가 계속 공급되도록 하시면서, 동시에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만드는 첫 번째 표징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성모님께서 마치 혼인 잔치의 주인처럼 행동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의 주인이 해결해야 할 일을 마치 당신의 것인양 받아들이셨고,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쁨과 흥이 계속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이시면서도 주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책임감있게 행동하시는 성모님, 주인같은 손님으로서, 같은 손님들의 기쁨까지도 염려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평화가 없는 이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던 그 성모님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시간 속에 평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평화가 없는 현상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평화가 없는 가운데 살고 있는 당신 자녀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무게가 실린 말씀입니다. 또 앞으로 우리가 평화 속에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염려와 소망에서 멈추지 않고 성모님은 한발 더 나아가 우리에게 평화를 얻는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없는 이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께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모님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고, 참된 평화는 오직 하느님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기에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평화가 없는 가운데 사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 자녀들에게 평화를 찾아주고 싶어하십니다. 평화를 찾는 길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상 아버지의 명을 받아 천상을 떠나 평화의 모후로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어 지상에 있는 당신 자녀들에게 현재 우리 삶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평화의 길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들에 너희 마음을 열고, 너희가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을 주신 내 아들 예수님을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흠숭하여라.  

주님께서 유다의 임금 아하즈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셨습니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그러나 아하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 10-12)
   아하즈의 대답을 보면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그가 주님께 대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유다를 함락시키려고 쳐들어오는 아시리아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 이미 이집트에 군사적인 지원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짓 겸양을 떨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의 마음과 의도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 그에게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당신의 힘에 의탁하고 당신을 믿으라고 초대한 것인데 그는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곤경에 빠진 유다의 임금 아하즈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어했지만 그는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께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수많은 죄를 저지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너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선물들에 너희 마음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주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선물들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11-13) 
   이러하신 하느님, 성령, 즉 당신 자신까지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들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 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드리고, 그분과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물이 가득한 항아리는 더 이상의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오직 비어 있는 항아리만이 새로운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어 있는 항아리처럼 만들어 우리의 마음이 하늘만을 향해 열리게 만듭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일편단심이어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흠숭할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들로 어지러워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사랑과 흠숭 외에 다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다 비워내고, 온전히 예수님으로만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마음의 침묵입니다. 왜 예수님만이 우리 사랑과 마음을 전부 차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흠숭해야 합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의 구세주, 우리 생명의 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친 사람을 대단히 칭송하고 의인이라 부르고 영웅시합니다. 그처럼 고귀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어야 100년 밖에 되지 않는 이 현세에서 누구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을 높이 기린다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은 어떻게 기려야 하겠습니까?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평생 은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예수님을 흠숭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성당 감실 앞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감실 속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그분께 흠숭을 드리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만일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의 성체 혹은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 앞에서 예수님을 흠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인터넷으로 24시간 지속적인 성체조배를 하는 싸이트를 찾아가 책상에서도 그분을 흠숭할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우리의 영으로 세상 모든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성체를 흠숭하는 신령 성체조배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흠숭하며, 그분께 감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그 영원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신다. 너희의 희망이 매일의 삶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만나는 기쁨이 되기를 빈다.

예수님은 당신이 목숨을 바쳐 구원한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모두를 인도하고 싶어하십니다. 이러한 간절한 예수님의 소망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나 세상 모든 이를 영원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시는 예수님의 소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음과 실천으로 그 소망에 적극적으로 응답한다면 반드시 영원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희망 속에서 기뻐하라.”(로마 12, 12)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니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모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고, 우리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그분의 피로 맺어주신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자주 잊는다 하더라도 성모님은 결코 그를 잊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모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 그와 더불어 이제 우리도 성모님을 불러야 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하며 한없이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며, 우리를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위해 성모님은 우리에게 지난 37년 11개월 동안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면서 계속 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니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음 먹고 움직이시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도,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뭐든 잘 하기 위해서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하물려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힘을 지닌 기도는 더욱 더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히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부르심에 가장 잘 응답하는 길입니다.


   
 
 
2018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예수님과 함께 너희의 새로운 삶을 살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생의 여러 시련 중에도 늘 굳건하고 기도 속에서 충실하며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상처들로 너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부활로 너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마라. 너희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증거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예수님과 함께 너희의 새로운 삶을 살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생의 여러 시련 중에도 늘 굳건하고 기도 속에서 충실하며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상처들로 너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부활로 너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부활 제2주일 복음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면 좋을 것같습니다. 가나다해 부활 제2주일 복음 모두 똑같습니다. 요한 복음 20장 1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은 바로 몇일 전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곳에 있었지만 몇 일 전 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의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최후의 만찬인 줄도 모르고 과월절 저녁 식사를 하던 그 때 제자들은 마음이 기뻤습니다. 비록 그 만찬이 끝나고 자신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하여튼 그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시간은 제자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체포, 자신들의 배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체험하고 난 다음 그들은 이전과 같은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그 다락방은 훵하기만 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자기들 역시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었으나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그들에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죽음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기쁨도, 행복도, 평화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셨고, 제자들은 실제로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그들이 당신의 사도들이심을 재천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께서 그들을 당신의 제자, 사도들로 여기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을 그들에게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이는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 7)고 하신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었습니다. 또 용서를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다시 한 주간이 지난 다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사도 토마스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를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했지만 토마스는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고,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문은 다 잠겨 있었습니다. 역시 같은 다락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비록 문을 잠그고 있었어도 그들은 더 이상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들 마음에 있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다락방에 나타나시어 토마스를 비롯한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평화를 빌어주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는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토마스의 마음에 의심이 있고, 다른 동료들 앞에서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자리에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만난 제자들은 마음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기쁨과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사도로서 같은 동료 토마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체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의 불신앙과 의심을 알아채시고 치유하시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더욱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활 제2주일  복음 요한 20, 19-31의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30절에서 31절까지인데 요한 복음서를 쓴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특별히 당신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것도 사전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나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그들을 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 (히브4, 15)이시기에 오히려 그들이 믿음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 18) 또 당신을 배반했지만 부활하셔서 그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많은 시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가지 시련이 끝났는가 싶으면 생각지도 않게 또 다른 시련이 밀려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늘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굳건하고 기도 속에서 충실한 가운데 인내하며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와 그들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기쁨과 평화를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 5)고 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상처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평화, 구원,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복음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마라. 너희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증거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시어 우리들 가운데 살아계시는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 놓이든지 늘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제가 비록 어둠을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 4)라고 항상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요한 복음 20장을 묵상하면서 살펴본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평화와 기쁨이 우리들 마음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로 주님을 우리 마음과 삶,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에 모셔옵시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 그분이 자녀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자체가 우리의 기쁨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기쁘게 증거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성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모님을 사랑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 아기처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묵주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성모님을 부르며 겸손하게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성모님의 마음으로 들어가고, 성모님께서는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는 성모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곳, 어느 시간에 있든지 묵주를 들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느새 성모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증거가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바리사이파처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으로 바쳐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움추려 들어 소극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특별히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마치 성모님의 손을 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잡은 손에서 전해져 오는 성모님의 모성적 사랑을 한껏 느껴봅시다.


   
 
 
2018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둠이 빛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은총의 시기에 기도속에서 나와 함께 있으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고백하며 은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라. 하느님을 선택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십자가는 너희를 위한 승리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너희가 세례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너희가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마음으로 감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둠이 빛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은총의 시기에 기도속에서 나와 함께 있으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고백하며 은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악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인 사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끝나는 때에 사탄은 영광에 싸여 오시는 예수님께 완전히 패배당하고, 영원히 지옥에 감금될 것입니다. 그전까지 사탄은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용을 쓸 것이고, 우리를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가능하면 멀리 떼어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사탄이 완전히 패배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사탄의 힘에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인 사탄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힘이 있고, 그 힘으로 우리가 잘 서 있다고 믿는 그 순간에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교만 때문에 예수님과 성모님이 들어오실 자리를 우리 스스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 순간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고, 쉽게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 대단히 강력한 존재이기에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더 힘센 원군이 필요합니다. 그 원군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묵시 12, 1)이신 성모님만이 붉은 용인 사탄과의 전투에서 우리 편이 되시어 우리를 보호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둠이 빛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은총의 시기에 기도속에서 나와 함께 있으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기도속에서 있으면 우리는 우리를 어둠, 즉 죄와 악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기도의 은총으로 빚, 즉 선과 그 선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르 14,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이 존재하지만 그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편에 서 있고, 하느님의 힘을 받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다시금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악을 몰아내고, 죄의 상처들을 치유하기 우해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고 고해성사로 깨끗해진 영혼은 다시 은총 지위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 막바지에 이르러 있습니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영혼의 봄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기도와 고해성사가 우리 영혼의 봄을 준비시켜주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십자가는 너희를 위한 승리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 즉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신명 30, 15-20)
   사실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모세의 이 말씀은 천지창조 직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말씀이었고, 그 이후의 구약과 신약에서 계속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계명과 뜻을 따르면 생명과 행복 그리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그분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면 죽음과 불행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 진리는 성경 핵심 주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선택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과 뜻을 따르며, 그분이 주시는 생명과 행복 그리고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면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에게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여 더욱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그 백성에게 내렸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온 몸으로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호렙산에 올라가 자리를 비운 40일 동안 그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탈출 32, 1-6 참조)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들과 그분의 놀라운 업적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체험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분명히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지만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포기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몸은 간절하나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마르 14, 38) 우리지만 겟쎄마니 동산에서 고뇌하시며 천상 아버지과 그분의 뜻을 선택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가의 수난과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셨던 성자 예수님께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 42a)라고 기도하셨고, 고뇌에 쌓여 기도하시는 동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22,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 42b)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면 반드시 승리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례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너희가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마음으로 감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 백성, 예수님의 제자,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천주 성부 하느님께만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이처럼 큰 영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만해도 마음이  뿌듯하지 않습니까? 
   이 천상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은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당신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이 말씀에 따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그리고 그들의 협력자들인 사제들을 통해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수많은 세례가 베풀어졌고, 수많은 민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바로 예수님의 명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그 명을 받은 사람들의 사도적 계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 한 생명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세례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 1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니,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세례를 통해 우리의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와 우리의 본죄로부터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의 용서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 3-6)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세례를 받은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하시고 이루신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다음과 같이 이를 긍정해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 3-6)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좋으신 뜻에 따라 세상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우리를 당신 계획의 일부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자녀로 거룩하게 흠없이 살고, 당신이 이루시려고 하는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보태는 어린 자녀들의 손을 부모님들이 결코 작게 여기지 않으시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계획을 위해 우리가 바치는 작은 노력과 정성을 고맙게 여기십니다. 좋으신 뜻에 따라 세상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당신 계획의 일부로 불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마음으로 늘 감사드립시다.

   
 
 
2018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너희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계명들을 살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그 계명들은 성사들을 통해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세상과 세상적인 유혹들이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그분의 피조물들을 아름답고 겸손하게 바라보아라. 그리고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너희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계명들을 살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그 계명들은 성사들을 통해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무엇이든 닫혀 있는 곳에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문을 닫아 걸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은총을 내려주시려고 해도 그 은총은 결코 우리에게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주시는 은총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때에 우리 자신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 마음과 영혼의 문을 열어 드립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살려면 우선 우리에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분께서 주신 계명들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우리를 속박하기 위해서 아니라 우리를 더욱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에 옮겨야 하는 주요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2부에서 십계명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준수해야 하는 계명들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후 모세를 통해 주신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 생명, 행복, 축복 그리고 번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마련해주신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외의 다른 세부적인 계명들도 율법과 법령들로 주셨는데 그것들 역시 그 근간이 되는 십계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잘 살 수 있도록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폐지하러 오지 않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고,(마태 5, 17 참조) 모든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기에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구약을 통해 주신 계명들의 핵심을 정리해주셨습니다.(마르 12, 28-34 참조)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계명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계명들을 살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을 다시 잘 살기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계명들에 비추어 어떤 점에서 우리의 삶이 어긋났는지 깊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계명들에 비추어 우리의 양심과 삶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또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는지 돌아다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즉 회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계명들과 어긋난 삶을 살았던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 다시 계명들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세상과 세상적인 유혹들이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그분의 피조물들을 아름답고 겸손하게 바라보아라. 그리고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포함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좋은 의도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좋은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의 관계가 서로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촉발된 원죄로 인해 이 모든 좋은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교만, 절제되지 않은 욕망, 분별없는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여전히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각종 대중매체들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세상적인 것들을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놓으라고 인간을 유혹하고, 비도덕적이고 과도하며 무분별한 욕망을 부추키고 있습니다. 이 유혹과 시험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느님만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간 역시 그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피조물을 정복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주신 귀한 선물임을 깨닫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선을 바라보면서 겸손하게 감사 드려야 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하느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것 위에 계시고, 그분만이 모든 영광과 사랑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오직 그때만 하느님께서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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