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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새 생명으로 부르고 있다.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은총의 때에 너희를 자연과 같이 변모시켜 주실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천국과 천상의 것들에 너희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해 사랑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를 새 생명으로 부르고 있다.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은총의 때에 너희를 자연과 같이 변모시켜 주실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예전에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 함의가 느껴집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성모님은 지금 우리 각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내가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지레 도전정신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록 지금 우리 자신이 생각할 때 나이가 많아 무슨 변화를 꾀할 수 있을지 걱정하거나 스스로 자포자기하지 말고 새 생명으로 부르시는 성모님의 부름에 응답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희망을 가지고 영적으로 더욱 정진하려고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너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통해 성모님은 우리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자기 고집이 세지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자기 주장과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자기 말만 하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내가 더 오래 살았고, 경험도 많고 지혜로우니 내 의견이 항상 옳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완고함은 그보다 젊은 세대에게 그렇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나이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계급장으로 인식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개방된 자세로 자신을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경청하고, 자신이 여전히 더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겸손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모님 앞에서 우리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 눈에 우리는 늘 사랑스럽지만 어리기만한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나이를 의식해서 완고해져서는 안 됩니다. 완고함은 우리의 마음을 성모님과 예수님께 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의 생각, 의견, 판단에 갇혀 있으면 요한 복음에 나오는 완고한 유다인들처럼 되고 맙니다. 예컨대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완고한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끝내는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 3) 우리는 나이를 얼마를 먹었는지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로 늘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유치함이 아니라 순수함과 수용성을 우리의 것으로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처럼 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를 결코 어린이처럼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은총의 때에 너희를 자연과 같이 변모시켜주실 예수님께 너희의 마음을 열어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천국과 천상의 것들에 너희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을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물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겠지만 그는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꼈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오신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곧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주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과 온 인류가 새 생명을 받았다는 것 역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 7-11)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주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우리의 마음을 열었을 때를 전제로 말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체험한 사람은 이 지상에 살고 있으되 이미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으나 그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은 늘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하며 이미 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 1-2)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해 사랑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분이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칭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예”로 순명하셨습니다. 성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계획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고,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잉태 예고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늘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해 사랑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신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 1981년 6월 24일 옛 유고슬라비오 연방, 현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작은 마을인 메주고리예에서 발현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그러한 하느님의 명에 따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메주고리예에서 발현하고 계십니다. 발현이 언제까지 진행될 것인지는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고, 그분께서 성모님에게 발현을 멈추라고 하시는 때가 되면 성모님은 그 명령에 순종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 사랑의 사도로 메주고리예에 파견하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그 자체가 우리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가시적인 표징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성모님을 통해 기도, 회개, 믿음, 보속, 평화의 메시지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응답합시다.
2019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너희의 삶은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있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하느님과 너희의 만남의 체험을, 너희는 사랑으로 증거할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
성녀 모니카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29년 동안 끊임없이 기도했고, 눈물과 희생으로 가득한 그녀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사제, 주교, 그리고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였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던 것이고, 아들의 회개를 넘어서 그 아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 육신의 어머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속속들이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우리를 회개로 부른다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조차도 성모님께서 “너희를 회개로 부르고 있다.”고 하실 때 바로 그 ‘너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느 누구도 회개하라는 어머니의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죄와 잘못 그리고 오류 속에 살면서도 그를 인지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혹은 죄에 대한 정당화나 합리화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를 죄와 악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 생명과 구원을 얻도록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르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회개하라는 어머니의 부르심은 바로 그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지만 분별력이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의 지도와 인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이 다 큰 것같아도 성모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어린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모님의 지도와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이 때는 너희를 위한 때이고, 침묵과 기도의 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우리를 위한 때라고 인식할 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먼저 깨닫게 됩니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이 시간을 잘 활용하여 진정으로 우리를 위한 때가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침묵과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침묵이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까? 침묵이야말로 기도의 산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침묵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너무 시끄러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리가 아닌 수많은 세상의 소리와 그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사탄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마음이 점점 없어지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데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또 너무 많은 말을 하느라 마음의 침묵을 지킬 틈도 부족하고, 기도할 시간도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말은 많이 하지만 기도하지는 않는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기로 결심하여라.”(1993년 12월 25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침묵과 기도를 생활화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러므로, 너희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자라기를 바란다. 어린 자녀들아, 그러면 너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너희의 삶은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서도 가장 큰 사랑인 하느님의 사랑이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온기를 넘어서 불꽃처럼 타오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만이 하느님을 바라고, 그분을 믿게 됩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 희망과 신앙이 낟알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다면 그 온기로 낟알은 싹이 트고 자라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속에서 희망과 신앙의 낟알이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에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에 영양분을 주고 물을 주는 것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더 기도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 하느님께 바라고 믿는 사람, 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속아내어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간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삶은 질서가 잡히고, 작은 것 하나에도 성실하게 또 책임감있게 대하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하느님과 너희의 만남의 체험을, 너희는 사랑으로 증거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불타는 사람, 하느님만 바라고 믿는 사람, 매일매일 기도에 갈증을 느끼고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집이 이 지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나그네처럼 살 수 있습니다. 또 이 지상의 것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처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오직 하느님만 변치 않으신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오직 하느님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점점 더 하느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 만남의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다른 이들 역시 그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분 가까이 가도록 만드는 참사랑을 실천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 성모님과 비교하여 우리는 어떻습니까? 늘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분 메시지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너희의 ‘예’가 없으면 나는 할 수 없다.”고 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안타까움을 느낍니까?
옛 격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도록 성모님께 ‘예’하고 응답합시다. 성모님께 우리 자신은 온전히 의탁하고, 성모님의 메시지 대로 살려고 노력합시다. 지금이라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을 ‘예’라고 말씀드립시다. 지금은 우리를 위한 때이지만 이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때가 다 지난 후 아무리 수천만번 ‘예’라고 해도 그 때는 늦을 것입니다.
2018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평화가 너희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현존은 사랑의 표징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님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평화가 너희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어라.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연히 그곳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8 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인구 300명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셨을까요? 마리아의 배우자이자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받은 다윗의 자손 요셉의 고향이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빵의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정체성과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빵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보여주셨고,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같이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따라서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의 탄생에는 이미 성체성사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잠재적인 형태로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빵이 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십자가 죽음에서 평화를 이룩하신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 14-17)
메주고리예는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다시 모셔다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십니다. 특별히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한 한 많이 매일 미사에 참례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 앞으로 나아가 그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때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의 집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 38년 6개월 동안 4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순례하고, 성모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지만, 성모님의 그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예수님께 열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제 12, 2) 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셔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을 예수님께 활짝 열어 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늘 흘러 넘치도록 온전히 의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평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직까지 그분의 평화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특별히 우리 주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연장된 당신의 손, 당신의 사도가 되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고 산다면, 우리는 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쁨이 바로 평화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얼굴은 밝고 웃음으로 가득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저절로 그 기쁨에 전염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먼저 섬기려고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예수님의 평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평화의 전제조건이고, 기쁨은 평화의 열매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은총의 시기에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현존은 사랑의 표징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늘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역시 우리에 함께 계십니다. 더군다나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착하신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인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어 그를 증명해주고 계십니다.
성모님 사랑의 표징인 메주고리예에서의 그분의 현존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메주고리예 자체가 바로 어머니의 집이고, 어머니 마을입니다. 즉 그곳은 우리의 집이고, 우리의 고향 마을입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모님의 현존,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다시금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게중에 어떤 사람들은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와서도 아무런 감흥이나 삶의 변화도 없고,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 그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은 순례가 아니라 관광 차원에서 메주고리예 성지 관광을 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이끄시는 기도의 학교에 가서 기도하기 보다는 관광객들처럼 인간적인 편의를 구하고 뭔가 자극적인 것, 예를 들면 태양이 도는 것을 맨눈으로 보거나 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에서 태양이 회전하거나 색깔이 바뀌는 초자연적 기적이 보여지는 것은 예수님의 성체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81년 6월 24일 이래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까지 성모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사, 묵주기도, 성체조배, 성시간, 십자가의 길, 성경 봉독, 고해성사 등, 메주고리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기도이고, 기도로 끝이 납니다. 특별히 메주고리예 순례의 핵심은 하절기(5월~8월)에는 오후 6시, 동절기(9월~4월)에는 오후 5시부터 메주고리예 야고보 성당에서 본당 신자들과 모든 순례자들이 함께 모여 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들의 인도에 따라 미사 전 10단의 묵주기도, 크로아티아어 국제 미사, 미사 후 5단의 묵주기도, 치유의 기도, 그리고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미사 후 밤에 거행되는 성시간으로 이어지는 3시간의 매일 저녁 기도 프로그램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오전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고, 발현산과 십자가산을 오르면서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각종 영적 체험담과 강의를 듣고, 개인 기도를 바치며 메주고리예 순례를 하게 되면 기도의 바다에서 하루 종일 헤엄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순례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고 회개 체험을 하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이 목적이라면 절대로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도가 목적이라면 반드시 그곳에 순례를 가봐야 합니다. 자신들의 기량을 더 향상시키고, 다음 경기들을 준비하기 위해 전지 훈련을 떠나는 운동선수들처럼 기도의 선수가 되기 위해 기도하는 메주고리예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빛을 보고 싶으면 관광을 가야 하고, 기도하는 중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싶으면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극대화시켜주는 순례가 바로 메주고리예 순례입니다.
2018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과 기도의 때이고, 기다리며 주는 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 위에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너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과 가정을 열어라. 그러면 이 기다림은 기도와 사랑, 그리고 특별히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그 열매들이 멀리서 보이고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너희를 격려한다. 그 때문에 원수가 화를 내고, 너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모든 것을 사용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과 기도의 때이고, 기다리며 주는 때이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교회 전례력에 의하면 오늘이 2018년 마지막 주가 됩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 전례력의 가장 끝에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가 바로 그 역사의 완성이며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간다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국에는 당신 안에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대축일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안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우주의 왕, 정의로운 심판관, 우리의 구원자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한 그분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실천하고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2019년 대림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림절 역시 은총과 기도의 때이지만, 동시에 성모님 말씀처럼 기다리며 주는 때입니다. 대림절은 이미 천지 창조 바로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난 후 하느님께서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에게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전례력에 의해 거행되는 대림절은 아니지만 바로 이때부터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은 시작된 것입니다.
동정녀를 통해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천년 전에 복되신 동정녀이신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모님 역시 대림절의 여인이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 동정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또 부모님에게서 배우신 대로 매일같이 두 팔을 하늘로 펼쳐 올리고 메시아,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낳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께 드렸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직접 하셨던 성모님께서 지금은 기다리며 주는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시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신뢰하며 늘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희생과 봉헌을 원하시면 기꺼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 위에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너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너희의 마음과 가정을 열어라. 그러면 이 기다림은 기도와 사랑, 그리고 특별히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육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우리가 믿고 체험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고, 지금도 매일 같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고 계십니다. 특별히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매일 우리를 찾아오시고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 전체를 우리에게 매일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랑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아니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으로 들어가 넘쳐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이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차 늘 그 안에 당신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할 때, 우리 가족 구성원들 모두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으며, 다른 가정들에게 좋은 영향을 던져주는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가정을 하느님의 사랑에 열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과 가정에 들어오기 위해 우리 마음과 가정을 열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저절로 열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과 가정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시도록 끊임없이 개인 기도, 가정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과 가정은 열리지 않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을 동반한 끊임없는 기도만이 오직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 기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 우리 가정 전체를 하느님께 선물로 드리려는 자세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그 열매들이 멀리서 보이고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너희를 격려한다.
성모님께서는 “그 열매들이 멀리서 보이고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너희를 격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지의 맥락을 살펴볼 때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이란 ‘기도’를 의미합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 비록 우리 눈에 아주 작아 보일지라도 그 열매가 맺어지고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기도를 할 수 있지만, 그 열매까지 스스로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그 기도의 열매를 맺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우리의 지향이 순수하고 선하며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언제,, 어떻게 어떤 크기로 맺게 될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 눈에 우리 기도의 열매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실망해서는 안 되고, 기도하기를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기도는 오랜 기다림의 작업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끊임없는 확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기도는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바쳐지는 순간 바로 하느님께 전달됩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기도 하나 예외없이 하느님은 모두 다 듣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에 잠시 스쳐가는 기도까지도 하느님은 놓치는 법 없이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우리의 뜻과 시간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시간에 맞추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그분의 손에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 때문에 원수가 화를 내고, 너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모든 것을 사용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사탄은 또한 우리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성모님께서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시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또 기도를 포기하려고 했다가 성모님의 격려를 받고 다시 기도를 시작한 사람들 때문에 사탄은 화가 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탄은 들어갈 자리가 없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으로 강해지기 때문에 사탄은 그 사람에게 점점 더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은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합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들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마다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각 사람이 가장 쉽게 빠져들 수 있고,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게 할 수 있도록 그런 도구를 쓸 것입니다. 텔레비젼, 영화, 드라마, 인터넷, 컴퓨터 게임, 도박, 마약, 술, 유흥, 쇼핑, 관광, 포르노, 문란한 성생활, 쓸데없는 대화나 수다, 탐욕, 교만, 게으름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우리가 마음과 시간을 쉽게 빼앗기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탄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여 우리를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먼저 포기하고, 그 자리에 대신 기도를 넣어야 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만일 그것이 우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모님과 사탄 사이, 그리고 성모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사탄 사이에 큰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시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2018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들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큰 은총을 지니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너희와 미래 세대들를 위한 회개의 때, 그리고 부름이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너희의 마음을 내 아들 예수님께 열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사랑하며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들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큰 은총을 지니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너희와 미래 세대들을 위한 회개의 때, 그리고 부름이다.
성모님께서는 천상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서 메주고리예에 발현하고 계십니다. 비록 1981년부터 발현을 시작하셨지만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주신 것은 1984년 3월 1일부터 였습니다. 그때부터 발현목격증인 마리야 파블로비치 루네티를 통해서 1987년 1월 8일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에 메시지를 주셨고, 1987년 1월 25일부터 현재까지 한달에 한 번씩 매월 25일에 주고 계십니다. 또한 2004년 12월 2일부터 현재 매월 2일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 드라기체비치 솔도에게 발현하실 때에도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년 3월 18일 미리야나, 6월 25일 이반카 이반코비치 엘레즈 그리고 12월 25일 야콥 촐로에게 있는 연간 발현과 발현산에서 이반 드레기체비치에게 있는 특별 공개 발현에서 성모님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이 메시지들이 모두 중요하고, 의미있지만 이 가운데 매월 25일 마리야를 통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모님의 메시시가 공식적인 메시지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당신의 예언자로 보내고 계시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곧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각종 공적 계시들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말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공적 계시는 사도 요한의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이유는 공적 계시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다 해주셨는데 우리가 그 말씀들을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적 계시로 분류되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공적 계시의 내용을 다시 실천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메시지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공적 계시의 내용을 뛰어 넘는 새로운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통해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고, 굳게 믿으며, 보속과 단식으로 희생할 것을 메시지 전반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 공적 계시에서 주어진 메시지들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알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다시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성모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고자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었거나 잠들어 있는 우리를 다시 잠에서 깨우고 생명으로 불러 일으키고자 우리에게 수많은 메시지들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불러주시기 위해 지난 37년 4개월 동안 수많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메시지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깊이 묵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메시지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염려하시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감사를 드리면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실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큰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컨대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너희의 하루를 짧고 열렬한 기도로 가득 채워라.”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매일같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면 분명 우리는 회개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깊어지며,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온 몸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너희와 미래 세대들을 위한 회개의 때, 그리고 부름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모님을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런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 발현은 그 끝이 있습니다. 메주고리예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 이반카, 야콥은 열 가지 비밀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매일 발현은 끝이 났습니다. 지금도 성모님의 발현을 매일 목격하고 있는 비츠카, 마리야, 이반은 각각 아홉 번째 비밀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그들 모두가 마지막 열 번째 비밀을 받게 되면 그들의 매일 발현도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 지상에서 성모님의 발현은 끝나게 되고, 현재 50대 초, 중반에 접어든 발현목격증인들은 그들의 생전에 그 비밀들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성모님 메시지대로 지금은 은총의 때이고, 우리와 우리 미래 세대들을 위한 회개의 때이며, 큰 부르심입니다. 회개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성모님의 메시지에 응답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뒤늦게 깨닫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 다음 기회나 장소가 아니라 여기 이 자리에서 기도하고, 회개하여 다가올 미래와 구원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너희의 마음을 내 아들 예수님께 열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사랑하며 내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들을 더 많은 기도로 지내라고 촉구하십니다. 현재 우리 자신 스스로 생각할 때 많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많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양의 기도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기도에 더하여 더 많은 기도를 바쳐야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기회가 닿는 대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나 더 큰 집이나 더 좋은 차가 아닙니다. 더 많은 기도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열고, 더 활짝 열리게 하여 예수님이 들어오시어 우리 마음에 사시면서 우리 마음과 삶을 다스리시도록 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바랄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의 유일한 사랑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과 하나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20)
2018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 역시 너희에게 주는 열매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너희는 또한 내가 옴으로써, 풍성한 선물과 열매들을 받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늦지 않았다. 거룩함을 선택하고, 은총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하여라. 너희가 그분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백배로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자연 역시 너희에게 주는 열매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너희는 또한 내가 옴으로써, 풍성한 선물과 열매들을 받고 있다.
이제 추수와 수확의 계절입니다. 이 계절에 우리는 각종 과일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합니다. 열매들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고, 우리 몸에 각종 영양소와 신선함을 제공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입니다. 그러나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그를 넘어서서 “자연 역시 너희에게 주는 열매들을 통해 너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자연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까요? 자연이 어떻게 자신이 맺는 열매들을 우리에게 주면서 그를 통해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먼저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기본 환경을 우선 최적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만드신 다음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 안에서 어떤 것이 기본 양식이 되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 29) 자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은 인간을 위한 양식으로 주어지도록 하느님께서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자연은 그러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열매들을 맺고, 그 열매들을 인간에게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에 충실하고, 인간을 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열매들을 내어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주는 자연과 그 자연이 맺는 열매들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연은 자신이 맺는 열매들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며 동시에 인간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을 기꺼이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자신이 맺는 모든 열매들을 인간에게 사랑으로 내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인류,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영원한 생명의 문을 다시 열어주실 인류의 구세주와 그 구세주의 어머니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완전한 피조물인 마리아를 창조하시고, 그 마리아를 통해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으며, 그분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그러나 2천년 이상이 지난 그 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그분을 믿지 않으며 멸망의 길을 가고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마리아를 다시금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계속되고 있는 성모님의 오심, 즉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다시금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이미 수 천만의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를 다녀가고, 성모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엄청난 회개와 신앙의 열매들이 맺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지금도 메주고리예를 통해 계속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시어 당신의 메시지들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늦지 않았다. 거룩함을 선택하고, 은총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하여라. 너희가 그분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백배로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며 수많은 메시지들을 주시면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믿음을 지니고, 보속하며 평화를 살라고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매번 메시지 끝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모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곧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응답임을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예언자로 오시는 분이기에 성모님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말씀이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너희가 내 부름에 얼마나 많이 응답했는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아직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설령 한때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옛 생활로 돌아간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성모님은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 9-10)고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하셨던 말씀을 우리도 듣기 위해 성모님의 부르심에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응답과 그 응답에 따른 효과에 대해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거룩함을 선택하고, 은총과 평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하여라. 너희가 그분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백배로 주실 것이다.”
2018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시기이다.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말은 적게 하며 하느님께서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해 드려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금은 은총의 시기이다.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말은 적게 하며 하느님께서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해 드려라.
‘지금은 은총의 시기’라는 성모님의 말씀에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그 멸망을 예고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복음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 41-44)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렸을까요? 하느님이 주신 그 은총의 시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예언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시기가 얼마만큼 지속될 지 오직 하느님과 성모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은총의 시간을 주신 하느님과 이를 일깨워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후 우리에게 왜 지금과 같은 은총의 시기가 주어졌는지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묵상을 바탕으로 이 은총의 시기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총의 시기는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평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준비를 위해 마련된 이 은총의 시기를 우리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그 길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더 많이 기도하고 말은 적게 하며 하느님께서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시게 해 드려라.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린 자녀’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른의 도움과 보호를 절실히 요청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도움과 보호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도움과 보호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의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탄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그분 자녀로서의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속한 가정의 아버지이시고 중심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분과 소통하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마음과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렇기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그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적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기도하는 분위기만 잡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각자의 하루 생활 여건이 다르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최대한 많은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서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 없이,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여서는 안 되고, 마음을 담아, 마음을 다해 바치는 기도여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말을 적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관계를 해나가기 위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말들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합니다. 시간 허비도 문제지만 말을 많이 하다보면 쉽게 남의 험담도 하고 말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 3, 2-10)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질 때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은 먹고 마시고 말하는 것에 앞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찬미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기도는 하도록 만들어졌고, 그를 위해 우선적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제 하느님 없는 나 자신이나 타인 그리고 세상의 것들을 말하기 위해 우리의 입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고, 그 방향을 기도에로 돌립시다. 우리의 입과 마음, 우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맨첫자리를 그분께 내어 드립시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라고 한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하느님은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끄실 수 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해드리는 그 시작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일생에 걸친 긴 작업이기에 매일 매일, 아니 우리의 일생 내내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 3)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기에 당신의 어린 자녀들인 우리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자녀들 곁에 육신의 어머니가 늘 함께 있고자 하는 것처럼 성모님 역시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시고, 실제로 함께 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가 어머니가 곁에 있으면 안심하고 편안해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성모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껴야 합니다.
모성애의 상징은 헌신입니다.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희생하며 자녀를 돌봅니다. 바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목숨을 자신의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어머니, 그녀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 그 어머니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2018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너희의 힘이시기 때문에 너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내가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악에 대한 피난처이시고, 그 모든 악은 숨어서, 너희 모두가 부름 받은 은총과 기쁨으로부터 영혼들을 아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살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들이 너희가 가는 길에 빛이 되기를 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분은 너희의 힘이시기 때문에 너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내가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 달 메시지를 통해 성모님은 메주고리예 발현의 참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다시 한번 밝혀주고 계십니다. 당신이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고, 당신 스스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을 부르시어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잊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성모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고 계시는 하느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잘 따르셨으며, 지금도 역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들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안에 자신을 완전히 녹여 놓으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시는 분입니다. 성모님께는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님, 유일한 사랑이시고, 그분만이 전부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메아리입니다. 우리가 “성모님”하고 부르면, 성모님은 “하느님”으로 대답하십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크신 힘을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당신의 몸에 잉태하신 경험이 있기에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라고 노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시고, 그분을 따르면서 당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의 힘을 수없이 체험하셨고, 그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인간 스스로 자신의 힘이 가장 세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교만에 빠져 있는 이 위험한 시기에 말입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인류의 정신을 다시 깨우쳐주시기 위해 성모님은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이 무서운 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약을 주러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세상에 오고 계십니다. 바로 그 약은 기도와 의탁입니다. “그 때문에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라고, 내가 너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악에 대한 피난처이시고, 그 모든 악은 숨어서, 너희 모두가 부름 받은 은총과 기쁨으로부터 영혼들을 아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대단히 교활합니다.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움직입니다. 그렇기에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행하는 모든 악은 사람들 마음 안에 교묘히 스며들어 옵니다. 우리의 시간과 돈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재미들만 찾는데 쓰게 하고, 우리의 삶과 마음을 하느님과 영적인 것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과 영혼에 심어주신 은총과 기쁨을 앗아갑니다. 그보다 한발짝 더 나아가 심한 경우에는 숱한 죄를 짓고 살면서도 자신이 죄를 짓고 사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분만이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고, 그분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피난처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슬러 일어났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물살이 우리를 뒤덮고 급류가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거품 뿜는 물살이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우리를 저들 이빨의 먹이로 내주지 않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의 도우심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 124)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살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다.
메주고리예 순례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은 메주고리예에 머물렀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다시 그곳으로 순례 가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영적인 체험, 즉 천국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메주고리예는 하늘이 열려 천국과 맞닿아 있는 곳’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매일 오전 모국어 미사와 크로아티아어 저녁 국제 미사 그리고 15단의 공동 묵주기도,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저녁 성시간과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절, 발현산을 오르며 바치는 묵주기도, 십자가산을 오르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 고해성사 그외 개인 기도와 묵상, 그리고 각종 영적 증언과 강연 등을 통해 순례자들은 메주고리예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함으로써 이 지상에서 천국의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도움과 현존을 피부 깊숙이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누구나 기회가 되면, 아니 꼭 기회를 만들어서 직접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서 체험을 해보면, “어린 자녀들아, 여기 지상에서 천국을 살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다.”고 하신 성모님의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메주고리예 순례를 가지 못한다면, 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메주고리예 직접 순례와 비교하여 그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처해 있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메주고리예의 정신을 직접 실천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매일 적어도 묵주기도 20단씩 바치며, 가능한 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매일 성경을 읽고 희생을 바치면서 적어도 매월 한번씩 고해성사를 본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에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이 너희가 가는 길에 빛이 되기를 빈다.
요즘 차를 운전하고 어디를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GPS 지피에스 입니다. 물론 잘 아는 길은 GPS가 필요없겠지만 모르는 길을 찾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그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하여 많은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GPS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삶의 지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들은 멸망과 어둠의 길을 갔고, 그 반대로 그 계명들을 잘 지켰을 때는 빛 속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요약되는 하느님의 계명들은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그래도 적용되는 말씀이고,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추어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에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가는 길,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품에 안거나 업거나 혹은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갑니다. 그렇듯이 성모님은 당신의 어린 자녀들인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거나 당신의 등에 업거나 아니면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또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구원에로 이끌어주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모성애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 모성애의 깊이가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이다. 고맙다.”(2009년 3월 18일 미리야나에게 주신 성모님 메시지 중에서)
2018년 6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날은 너희 각자를 위해, 회개하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을 위해,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날이다. 어린 자녀들아,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 모두를 사랑하시며,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통해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내 아들이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날은 너희 각자를 위해, 회개하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을 위해,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날이다.
오늘은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3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이 날이 우리 각자를 위해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주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주신 하느님께,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당신의 품에 우리를 맡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믿어주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정이 물씬 느껴집니다. 그리고 “너희 각자를 위해”라는 표현을 통해 성모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와 맺고 계시는 성모님의 관계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친밀한가를 쉽게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표현입니다.
그런 다음 “회개하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하고 성모님 메시지를 받아들여 기도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한 이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길을 가던 어떤 자녀가 회개하여 거룩한 삶을 살면서 구원의 길을 간다면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육신의 어머니에게도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기쁨일텐데 하물며 우리의 영적 어머니,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께는 오죽하겠습니까? 그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일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은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루카 15, 11-32 참조) 때문에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 곧 죄인들의 멸망을 바라지 않고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천상 아버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이렇게 당신 자녀들 때문에 주님께 감사드리시는 성모님께 우리도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를 잊지 않고 염려하시는 어머니께 감사드립시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고 온전히 하느님께만 향함으로써 우리가 회개했다는 것을 성모님께 보여드립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들을 받아들여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함으로써 매일 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어머니께 직접 보여드립시다. 또 우리에게 평화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영적인 교사로 성모님을 우리에게 계속 보내주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시다.
어린 자녀들아,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너희 모두를 사랑하시며,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통해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딸 성모님을 당신 자비와 사랑의 사절로서 37년간 메주고리예로 보내주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성모님의 메주고리예 발현 자체가 우리에 대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큰 표징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가 멸망의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여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에서 드러난 당신의 그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일깨워주시기 위해 성모님을 계속 보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런 분이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계속해서 성모님을 메주고리예에 보내주고 계시니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 16)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언제나 기뻐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내 아들이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 20, 35 참조) 우리는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속성상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기 보다 먼저 주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아니 가장 소중한 분을 주십니다. 바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 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 삶에 평화가 없다면, 성모님께 먼저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참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그리고 성모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분의 메시지대로 살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2018년 5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없는 이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께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너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들에 너희 마음을 열고, 너희가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을 주신 내 아들 예수님을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흠숭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를 그 영원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신다. 너희의 희망이 매일의 삶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만나는 기쁨이 되기를 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니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없는 이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께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잔치에 초대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게 되었습니다. (요한 2, 1-11 참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7일 동안 열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포도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기쁨을 느끼고, 잔치의 흥은 더해 갈 수 있었습니다. 잔치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 포도주가 떨어져서 없다는 것은 잔치의 흥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된 성모님께서는 신랑집 혼주보다 먼저 잔치 도중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잔치에 포도주가 계속 공급되도록 하시면서, 동시에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만드는 첫 번째 표징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성모님께서 마치 혼인 잔치의 주인처럼 행동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의 주인이 해결해야 할 일을 마치 당신의 것인양 받아들이셨고,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쁨과 흥이 계속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이시면서도 주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책임감있게 행동하시는 성모님, 주인같은 손님으로서, 같은 손님들의 기쁨까지도 염려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평화가 없는 이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던 그 성모님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시간 속에 평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평화가 없는 현상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평화가 없는 가운데 살고 있는 당신 자녀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무게가 실린 말씀입니다. 또 앞으로 우리가 평화 속에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염려와 소망에서 멈추지 않고 성모님은 한발 더 나아가 우리에게 평화를 얻는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평화가 없는 이 때에,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께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나를 보내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모님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고, 참된 평화는 오직 하느님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기에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평화가 없는 가운데 사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 자녀들에게 평화를 찾아주고 싶어하십니다. 평화를 찾는 길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상 아버지의 명을 받아 천상을 떠나 평화의 모후로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어 지상에 있는 당신 자녀들에게 현재 우리 삶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평화의 길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선물들에 너희 마음을 열고, 너희가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을 주신 내 아들 예수님을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흠숭하여라.
주님께서 유다의 임금 아하즈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셨습니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그러나 아하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 10-12)
아하즈의 대답을 보면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그가 주님께 대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유다를 함락시키려고 쳐들어오는 아시리아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 이미 이집트에 군사적인 지원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짓 겸양을 떨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의 마음과 의도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 그에게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당신의 힘에 의탁하고 당신을 믿으라고 초대한 것인데 그는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곤경에 빠진 유다의 임금 아하즈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어했지만 그는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께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수많은 죄를 저지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너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선물들에 너희 마음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주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선물들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11-13)
이러하신 하느님, 성령, 즉 당신 자신까지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들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 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드리고, 그분과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물이 가득한 항아리는 더 이상의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오직 비어 있는 항아리만이 새로운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어 있는 항아리처럼 만들어 우리의 마음이 하늘만을 향해 열리게 만듭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일편단심이어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흠숭할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들로 어지러워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사랑과 흠숭 외에 다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다 비워내고, 온전히 예수님으로만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마음의 침묵입니다. 왜 예수님만이 우리 사랑과 마음을 전부 차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흠숭해야 합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의 구세주, 우리 생명의 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친 사람을 대단히 칭송하고 의인이라 부르고 영웅시합니다. 그처럼 고귀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어야 100년 밖에 되지 않는 이 현세에서 누구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을 높이 기린다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은 어떻게 기려야 하겠습니까?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평생 은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예수님을 흠숭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현존하시는 성당 감실 앞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감실 속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그분께 흠숭을 드리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만일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의 성체 혹은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 앞에서 예수님을 흠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인터넷으로 24시간 지속적인 성체조배를 하는 싸이트를 찾아가 책상에서도 그분을 흠숭할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우리의 영으로 세상 모든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성체를 흠숭하는 신령 성체조배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흠숭하며, 그분께 감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그 영원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신다. 너희의 희망이 매일의 삶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만나는 기쁨이 되기를 빈다.
예수님은 당신이 목숨을 바쳐 구원한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모두를 인도하고 싶어하십니다. 이러한 간절한 예수님의 소망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나 세상 모든 이를 영원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시는 예수님의 소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음과 실천으로 그 소망에 적극적으로 응답한다면 반드시 영원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희망 속에서 기뻐하라.”(로마 12, 12)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니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모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고, 우리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그분의 피로 맺어주신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자주 잊는다 하더라도 성모님은 결코 그를 잊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모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 그와 더불어 이제 우리도 성모님을 불러야 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하며 한없이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며, 우리를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위해 성모님은 우리에게 지난 37년 11개월 동안 메주고리예에 발현하시면서 계속 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며, 또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번 달 메시지에서는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니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음 먹고 움직이시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도,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뭐든 잘 하기 위해서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하물려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힘을 지닌 기도는 더욱 더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히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부르심에 가장 잘 응답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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